호산나, 지금 구하소서!

12:12~19

2018. 3/25(종려주일). 11:00

주님의 행차

어느 날부터 개구리 나라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평화롭기만 하던 그 나라에서 왕을 세우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왕이 있으면 지금보다 행복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이 많은 개구리가 제우스를 찾아가 간청했다. ‘신이여. 우리에게도 왕을 부내주소서.이에 제우스는 가소롭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으며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개구리 나라인 연못에 나무 막대기 하나를 던져주었다. 개구리들은 나무 막대기를 신이 보낸 왕으로 알고 크게 기뻐하며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는 숨을 죽이며 왕의 분부를 기다렸다. 하지만 한나절이 지나도 왕은 분부는커녕 움직일 줄도 몰랐다. 이상하게 생각한 개구리들은 나무 막대를 건드리기도 하고, 올라타기도 해보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날 나이 많은 개구리는 다시 제우스를 찾아갔다. ‘신이여, 우리에게 멋진 왕을 보내주소서.그러자 제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들에게 물뱀을 왕으로 보내주었다. 이제 물뱀은 개구리 나라 왕이 되어 연못을 헤엄쳐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 날이 못 되어 개구리들은 물뱀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는 다름 아닌 자기들을 잡아먹는 포악한 존재였다. 개구리들은 자신들을 행복하게 잘 다스려줄 왕을 원했는데, 오히려 자신들을 해치고 잡아먹는 포악한 존재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상 지배자의 모습이다.

 

본문은 만왕의 왕 되신 주님의 행차다. 여느 왕의 행차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대부분의 왕 행차에는 호위부대가 있고, 왕의 행차를 알리는 선발대가 있고, 많은 수행원과 의장행렬이 따른다. 그리고 멋진 네 마리의 말이 끄는 4두 마차에 왕권을 상징하는 황금으로 수놓은 옷을 입은 왕이 몹시 거만한 모습으로 백성을 살피며 지나갔다. 그렇지만 주님은 호위부대도 선발대도 의장행렬도 없었다. 수행원이라곤 열 두 제자가 전부였고, 말 대신 어린 새끼 나귀를 타고 계셨다. 하지만 백성의 환영만큼은 여느 왕 못지않았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유월절이면 예루살렘은 순례자로 만원을 이루었는데, 2백만 명 정도 모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른 역사가들도 그 정도는 아니라도 당시 예루살렘의 인구나 숙박시설 등에 미루어 몇 십만 명은 모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주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을 입성하실 당시 이렇게 예루살렘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고, 주님에 대한 소문도 널리 퍼져있었다. 때문에 주님께서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이 알아보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을 하였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여!그러니 행렬은 초라해도 뜨거운 환영을 받으셨다. 그러면 주님께서 왜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예루살렘을 들어가신 것일까? 주님은 군림하는 지배자가 아니라 섬기는 겸손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해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이 고난과 해()를 받으시는 평화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죽이는 자가 아니라 자신이 죽어 생명을 살리는 승리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종려주일을 맞아 겸손의 왕, 평화의 왕, 승리의 왕으로 오신 주님이 나의 삶에서 정말 왕 대접을 받고 계신지, 내가 오직 주님만을 왕으로 섬기고 있는지를 살피면서 왕 되신 주님을 뜨겁게 환영하는 성도가 되자.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길은 사방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런데 주님은 마지막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동쪽으로부터 오는 길을 택하셨다. 이 길은 여리고를 통과해서 감람산을 넘어 벳바게와 베다니를 거쳐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로 상당히 험하다. 주님이 이 길을 택하신 것은 갈릴리에서 출발하여 요단계곡으로 내려오다 여리고를 지나서 오시기 때문에 당연하지만 이 길로 오신 것에 메시야적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유대인은 40:343:2-4에 근거하여 메시야가 광야를 통해서 동쪽으로부터 성전에 임하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이 길을 택하신 것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아울러 장차 감당해야 할 십자가의 험한 길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리고 주님이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을 본문은 예언의 성취로 보았다(15). 랍비들은 스가랴의 예언에 따라 나귀를 메시야의 짐승으로 이해하였다(9:9). 메시야가 오실 때 나귀를 타고 오실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성경은 메시야가 오시는 방법에 대하여 두 가지로 기술하고 있다. 하나는 다니엘의 예언대로 구름을 타고 영광중에 오시는 것이고(7:13), 다른 하나는 스가랴의 예언대로 나귀를 타고 오시는 것이다. 3세기 초 랍비 조슈아(Joshua)세상이 아직 메시야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때에는 메시야가 나귀를 타고 오실 것이고, 세상이 메시야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을 때에는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라.고 가르쳤다(탈무드). 주님께서 첫 번째 오셨을 때 나귀를 타고 오셨다. 그러나 다시 오실 때에는 구름을 타고 영광중에 오실 것이다(1:11).

 

호산나가 십자가로

그러면 사람들은 왜 새끼 나귀를 타신 주님께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호산나를 외치면서 열광했을까? 종려나무 가지는 유대인에게 마카비 혁명이후로 정치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것은 자유와 해방(구원)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유(해방)를 바라는 마음으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다녔다. 당시 동전에 종려나무 가지가 새겨져있는 것도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다. 한편 호산나(‘지금 구원하소서!’)라는 이 외침도 종교적인 구원에 대한 간구라기보다 정치적인 구호에 가깝다(19:39 참조).

 

주님 당시 사람들은 어느 때보다 메시야에 대한 강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그들은 명절에 메시야가 오실 것인데, 유월절과 같은 명절에 오시리라 믿고 있었다. 때맞추어 많은 사람이 주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가장 최근의 일로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던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사건이다(11:). 이 사건으로 사람들의 관심이 주님께 집중되었다. 사건 자체도 매우 놀랍지만 메시야의 사역과 완전히 일치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님이 기다리는 메시야가 아닐까 더욱 기대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기대를 가지고 있을 때 주님이 메시야의 짐승인 나귀를 타고, 그것도 메시야적 의미가 부여된 예루살렘 동쪽 문으로 들어오시자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호산나를 외치며 환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며칠이 못되어 그들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다. 그들이 기대하는 메시야가 아닌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들이 기대했던 것은 로마로부터 자유롭게 해줄 정치적 메시야였다. 때가 유월절인데도 자유의 상징인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쳤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들의 기대가 어긋나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를 연호하던 그들이 이제는 멸시와 조롱을 퍼부어대면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다. 예루살렘 거리를 가득 매웠던 호산나 군중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골고다의 길로 옮겨와서 호산나가 십자가로 바뀌었다. 그래서 주님 생애에 가장 길었던 고난주간이 시작되었다.

 

주님의 뜻을 이루는 삶

인심(人心)은 조석변(朝夕變)이라고 했다. 본문에서 이 말을 다시 한 번 실감한다.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를 연호하던 함성이 미처 사라지기도 전에 멸시와 조롱과 저주를 퍼부어대면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다. 그래서 호산나를 외치며 환영했던 이 종려주일이 고난주간의 시작이 된 것이다. 이것은 매우 충격이고, 또한 중요한 교훈을 준다. 사실 주님의 지상생애에 있어서 종려주일만큼 주님께서 열광적인 환호와 영광을 받은 적이 없었다. 장차 주님께서 받으실 영광의 예표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사람들의 환호가 태양처럼 주님께 찬란히 드리웠다. 잠시나마 사람들의 우상이자 기쁨이었다. 그런데 그 영광의 환호가 며칠이 못가서 극렬한 분노로 바뀌어 주님을 사지로 내몰았다. 말 그대로 어제의 미소가 오늘의 조소가 되고, 어제의 환호가 오늘의 야유가 되고, 어제의 우상이 오늘의 조롱거리가 되고, 어제의 신뢰가 오늘의 칼날이 되어 주님을 찔렀다. 이것이 세상의 인심이다. 우린 여기서 사람들의 환호나 영광이 얼마나 헛된지 실감하게 된다. 사람의 인기는 거품과 같다. 사람의 찬사도 거품과 같다. 환호나 영광도 거품과 같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 기대고, 이것을 목말라하고, 이것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이것을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종려주일을 통하여 여기에 기대지 말라고 한다.






대신 주님처럼 주님의 뜻을 이루는데 초점을 두고 주어진 길을 묵묵히 가야한다. 주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는 삶에 초점을 두고 사셨다. 예루살렘 동문을 택하신 것도 어린 새끼 나귀를 타신 것도 모두 말씀을 성취하기 위함이었다. 이후 사람들과 심지어 제자에게까지 배신을 당하신 것도, 거짓 증인에 의해 무고하게 고발을 당하면서 입을 열지 않으신 것도, 병사에게 멸시와 조롱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고 가셔서 달리신 것도, 십자가 위에서 남기신 말씀도 모두가 말씀을 성취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그 짧은 생애를 사셨으면서도 다 이루었다.’(19:30)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숨을 거두셨던 것이다(여기서 다 이루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종려주일은 잠시 누리는 세상의 영광을 뒤로하고 장차 누리게 될 영원한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묵묵히 실현하는 주님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이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습, 살아내야 할 모습이다. 성도에게 성공은 자신의 꿈이나 야망을 실현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뜻과 계획을 성취한 것이 성공이 아니다. 주님의 뜻을 실현한 것이 성공이고,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온전한 성취다. 이를 위해 주님의 뜻을 묵묵히 실천하는 것이 성도의 삶이다. 종려주일은 이러한 삶으로 우리를 초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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