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본받아, ‘평안

4:35~41

2018. 8/12. 11:00

걱정의 실체

아마 들어보았을 것이다. 심리학자 젤린스키(Ernie J. Zelinski)는 그의 책 느리게 사는 즐거움에서 우리가 걱정하는 것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걱정거리의 40%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한 것이고, 30%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이고, 22%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사소한 일에 대한 것이고, 4%는 우리 힘으로 어쩔 도리가 없는 일에 대한 것이다. 단지 나머지 4%만이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일에 대한 것이다. 즉 우리가 걱정하는 것의 96%는 쓸데없는 걱정인 것이다.걱정의 96%는 쓸데없는 것이고, 게다가 4%도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것이니 걱정거리가 될 수 없다. 결국 우리는 쓸데없는 걱정에 매여 살고 있다는 셈이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6:27). 걱정해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성경은 걱정의 심각성을 역설하고 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17:22). 최고의 보약은 즐겁게 사는 것이고, 가장 나쁜 바이러스는 근심과 걱정, 염려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걱정을 털어내지 못하고 그림자처럼, 혹은 혹처럼 달고 살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인류 역사상 유명한 건축물은 걱정(불안)해소 위해 세워진 경우가 많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파라오의 죽음에 대한 걱정해소를 위해 세워졌다. 중국의 만리장성은 황제의 정치적 걱정해소를 위해 세워진 건축물이다. 이런 불가사의한 건축물 말고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울타리나 담장, (), 그리고 각종 보안장치도 결국은 걱정해소가 주목적이다. 11장의 바벨탑도 흩어짐에 대한 걱정해소를 위해 쌓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걱정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하지 못해서 생겨나는 마음의 현상이다(3:7,8, 4:17). 그런데 이렇게 걱정해소를 위해 많은 비용을 지불했지만 제대로 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그래서 성경은 진정한 걱정해소방법에 대해 이렇게 말씀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4:6,7). 모든 일을 주님께 맡기고, 그저 감사함으로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래야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신다는 것이다. 걱정은 생각의 문제이고, 또한 생각의 근원인 마음의 문제다. 그리고 그 마음과 생각을 다스릴 수 있는 분은 그것을 지으신 하나님밖에 없다. 그러니 결국 걱정극복은 전적으로 주님께 맡기는 믿음의 문제이고, 또한 기도의 문제다. 이를 잘 보여준 것이 본문이다.

 

풍랑 속으로

흔히 사람들은 평안을 단순한 고요함, 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모든 조건이 완전하게 갖춰진 상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별일이 없으면 편하다. 혹은 평안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기에 작은 일만 일어나도 그 평안은 금방 깨진다. 그러니 이것은 참 평안이 아니다. 참 평안은 본문의 주님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태도다. 본문의 내용은 이렇다. 주님과 제자들이 늦은 밤에 작은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고 있었다. 바다 중간쯤 가다가 돌풍(突風)을 만나 배가 뒤집힐 지경에 이르렀다. 주님을 제외한 제자들 모두 바다와 바람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지만 거세게 몰아치는 바람과 그 바람으로 인한 파도를 당할 수가 없다. 나름 최선을 다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상황이 점점 더 악화되어 갔다. 결국 그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무시는 주님을 깨워 살려달라고 아우성쳤다.

 

이와 같은 돌풍은 갈릴리 바다의 지형적인 특성 때문이다. 갈릴리 바다는 남북으로 약21km, 동서로 약15km에 달하는 마치 심장처럼 생겼다. 해면은 해발보다 약210m 가량이 낮고, 수심은 얕은 곳이 25m, 깊은 곳은 228m에까지 이르며, 사방이 해발 1000m가 넘는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런 지형적인 특성으로 낮에 달궈진 땅이 저녁이 되면 급속히 식으면서 차가운 공기를 만들고, 그 공기가 산을 타고 내려와 바다로 유입되면서 돌풍을 만들었다. 그러니 노련한 기상전문가도 가늠하기 어려운 것이 갈릴리 바다의 상황이다. 예측이 어렵기는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이런 점에서 갈릴리 바다는 우리 인생을 닮았다. 이내 평온하다가 갑작스럽게 돌풍이 일어나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요동치는 갈릴리 바다처럼 우리 인생에도 돌풍이 얼마나 많은가! 안전한 방법은 밤바다에 나가지 않는 것이지만 바다를 터전으로 삼고 살면서 그럴 수는 없는 일이고, 또한 살다보면 부득불 밤에 배를 움직여야 할 때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늘 두려움과 걱정을 안고 바다로 나가야했다. 그런데 본문에서 제자들에게 그 걱정과 두려움이 현실이 되었다.

 

풍랑 속에서도

지난 주일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가치관을 가진 사람인지를 알아보는 법에 대하여 여러 가지 예를 드렸는데, 문제를 만났을 때 대응하는 태도를 보면 또한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가 있다. 본문에서 풍랑을 대하는 주님과 제자들의 태도가 전혀 다르다. 제자들은 풍랑이 두려워 죽게 되었다고 아우성을 쳤으나 주님은 풍랑 속에서도 편히 주무셨고(38), 또한 말씀 한 마디로 풍랑을 잠잠하게 만드셨다(39). 이와 같이 풍랑을 대하는 주님의 태도는 주님이 누구신지, 어떤 분이신지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준다. 주님은 어떤 환경에도 영향을 받지 않으신 분이시라는 것이다. 오히려 환경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이는 주님의 신성(神性), 곧 주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아무튼 주님은 풍랑 속에서도 평안하게 주무셨다. 거센 풍랑도 주님의 고요를, 주님의 내적 평안을 깨뜨리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참 평안이고, 참된 평안을 누리는 사람의 모습이다. 참 평안은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 역시 이런 평안을 누리기를 원하신다. 주님께서 풍랑으로 인하여 두려워 쩔쩔매는 제자들의 태도를 책망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실 배를 삼킬 것 같은 거센 풍랑, 배안으로 쇄도하는 거친 물결 앞에서 아무리 바다에 익숙하고 노련한 어부출신이라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이상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목숨을 걱정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그들을 책망하셨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40). 풍랑에 대한 두려움의 문제, 걱정의 문제는 곧 믿음의 문제라는 것이다.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풍랑 앞에서 마음의 평안을 잃고 걱정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신 것이다.

 

문제는 믿음이다.

그러면 그 믿음이란 어떤 믿음인가?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 나와 함께 하신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믿음이다.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함께 하신 주님이 환경을 초월하시고, 말씀 한 마디로 그 환경을 다스리는 분이신 것을 몰랐다.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사람의 목숨이 풍랑에 달린 것이 아니라 천지의 유일한 주권자이신 주님께 달렸다는 사실이다. 참새 한 마리도 주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문제는 그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이 사실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풍랑 앞에 쩔쩔매며 두려워했던 것이다. 주님은 이 점을 지적하여 책망하신 것이다.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다. 작은 일에도 마음의 평안을 잃고, 쉽게 걱정의 노예, 염려의 노예, 두려움의 노예로 전락하는 것은 결국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이 항상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 그 주님이 말씀 한 마디로 세상을 창조하시는 세상의 유일한 주권자이신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여전히 이 걱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공중을 나는 작은 새는 물론 이름 모를 들풀까지 돌보시는 주님을 믿지 못한 까닭이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고 책망하신 것이다. 그러면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18:8)고 하셨다. 믿음을 보시겠다는 뜻이다.

 

문제는 믿음이다. 주님이 도우신다는 믿음, 주님이 지키신다는 믿음, 주님이 해결해 주신다는 믿음, 주님이 끝까지 책임져 주신다는 믿음......주님께 대한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평안을 잃지 않게 된다. 좋은 예가 행27장에 나온다.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배를 타고 로마로 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 배가 유라굴로라는 거대한 풍랑을 만나게 되었고, 바울은 물론 그 배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이 죽음의 공포에 휩싸였다. 그런데 바울은 그 풍랑 속에서도 사람들을 격려하며 보살폈다. 그 사람들 속에는 선주도 선장도 바울의 호송을 책임지고 있는 백부장도 있었다. 이렇게 차이나는 삶의 비결은 믿음이다. 바울은 주의 천사로부터 너희 중에 아무도 생명에는 손상이 없을 것이다.’(27:22)는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을 믿었다. 그는 이렇게 사람들에게 선포했다.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25). 이것이 주님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의 태도다. 우리가 이 믿음을 가질 때 주님처럼, 그리고 바울처럼 인생의 거친 풍랑 속에서도, 인생의 거센 바람 속에서도 고요함을 맛보고, 내적 평강을 유지할 수 있다.

 

 

조회 수 :
142
등록일 :
2018.08.12
10:17:34 (*.0.40.41)
엮인글 :
http://www.joypc.or.kr/51436/d95/trackback
게시글 주소 :
http://www.joypc.or.kr/51436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수 추천 수 비추천 수 날짜 최근 수정일
602 주님을 본받아, ‘알아줌’ 장양식 48     2018-09-16 2018-09-16 12:53
주님을 본받아, ‘알아줌’ 요1:43~51 2018, 9/16. 11:00 군자(君子)됨의 조건 논어(論語)에 이런 말이 있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나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냐!’(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유명한 말이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공자(孔子)의 이상이고 지향점이었다. 사람들이 이런 군자가 되기를 공자는 희망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을 뒤집어 생각해보면 공자가 이 말을 강조했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에 군자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공자는 왜 군자의 조건으로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나지 않는 것’으로 제시한 것일까? 이...  
601 주님을 본받아, ‘눈물’ 장양식 49     2018-09-09 2018-09-09 13:37
주님을 본받아, ‘눈물’ 요11:33~35 2018. 9/9. 11:00 눈물, 인간다움의 표시 인도의 정글에서 늑대에게 길러진 모글리(Mowgli)라는 늑대소년의 모험이야기를 담은「정글북」이란 책이 있다. 모글리는 친구인 갈색곰 발루(Baloo)와 흑표범 바기라(Bagheera)에게 정글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런데 어느 날, 슬픔으로 인해 눈물이 흐르자 모글리는 자신이 죽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때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흑표범 바기라가 이렇게 말한다. ‘동생, 그것은 인간만이 흘리는 눈물이라는 거야. 너는 이제 인간의 아기가 아니야. 진정한 인간이 된 것이지!’ 눈물은 인간됨의 ...  
600 주님을 본받아, ‘희생’ 장양식 113     2018-09-02 2018-09-02 13:38
주님을 본받아, ‘희생’ 요11:47~53 2018. 9/2. 11:00 생명이 생명을 낳는다. ​태평양 연안에 천축잉어라는 물고기가 산다고 한다. 암컷이 알을 낳으면 수컷이 그 알을 입에 담아 부화시킨다. 수컷은 알의 안전을 위해 알이 부화할 때까지 입을 열지 않는다. 그러니 아무 것도 먹을 수가 없다. 아무 것도 먹지 못하니 수컷은 점점 쇠약해지고, 급기야 알이 부화하는 시점에는 기력을 잃어 죽고 만다. 입 안에 있는 알을 그냥 내뱉기 만하면 죽음을 피할 수 있다. 하지만 수컷은 죽음을 뛰어넘는 사랑을 선택한다. 그렇게 목숨을 걸고 알을 부화시킨 것이다. 수컷의 희생을 통해 수많은 생...  
599 주님을 본받아, ‘섬김’ 장양식 115     2018-08-26 2018-08-26 14:20
주님을 본받아, ‘섬김’ 요13:1~15 2018. 8/26. 11:00 섬김의 르네상스 어떤 분이 말하기를 지금 우리 사회는 ‘섬김의 르네상스’라고 했다. 섬김이란 말이 이 시대의 화두(話頭)가 되었다는 뜻이다. 사실 교회에서 목회자나 성도는 물론 정치하는 사람이나 일반 사람들 사이에서도 요즘처럼 이 단어가 자주 입에 오르내린 적이 없는 듯하다. 우리 사회가 그만큼 섬김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섬김이란 단어는 중요한 우리 기독교 용어다. 그래서 영어권에서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예배에 섬김(Service)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기독교 사역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봉...  
598 주님을 본받아, ‘겸손’ 장양식 127     2018-08-19 2018-08-19 12:46
주님을 본받아, ‘겸손’ 마3:13~17 2018. 8/19. 11:00 거룩한 바보 정호승 시인의 〈빈손의 의미〉라는 소박하면서도 멋진 시가 있다.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내가 누군가의 손을 잡기 위해서는 내 손이 빈손이어야 한다. 내 손에 너무 많은 것을 올려놓거나 너무 많은 것을 움켜쥐지 말아야 한다. 내 손에 다른 무엇이 가득 들어 있는 한 남의 손을 잡을 수 없다. 소유의 손은 반드시 상처를 입으나 텅 빈 손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한다. 그동안 내가 빈손이 되어 다른 사람의 손을 얼마만큼 잡았는지 참으로 부끄럽다. 이 시를 읽다보니 겸손...  
» 주님을 본받아, ‘평안’ 장양식 142     2018-08-12 2018-08-12 10:17
주님을 본받아, ‘평안’ 막4:35~41 2018. 8/12. 11:00 걱정의 실체 아마 들어보았을 것이다. 심리학자 젤린스키(Ernie J. Zelinski)는 그의 책 「느리게 사는 즐거움」에서 우리가 걱정하는 것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걱정거리의 40%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한 것이고, 30%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이고, 22%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사소한 일에 대한 것이고, 4%는 우리 힘으로 어쩔 도리가 없는 일에 대한 것이다. 단지 나머지 4%만이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일에 대한 것이다. 즉 우리가 걱정하는 것의 96%는 쓸데없는 걱정인 것이다.’ 걱정의 96%는 쓸데없는 것이...  
596 주님을 본받아, ‘기쁨’ 장양식 172     2018-08-05 2018-08-05 13:01
주님을 본받아, ‘기쁨’ 눅10:17~24 2018. 8/5. 11:00 그가 누구인지를 아는 법 행동심리학에 따르면 옷을 벗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내 경우는 어느 정도 맞는 것 같다. 나는 집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속옷만 남겨두고 다 벗어서 일정한 곳에다 둔다. ‘이런 사람은 간편하고 격식이 없는 것을 좋아하고, 웬만하면 복잡한 생각이나 관계에 끼고 싶어 하지 않지만 한번 파고들면 그 끝장을 보고야 만다. 또한 자신의 생각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더라도 충분히 감수하고, 다른 사람 앞에 나서기보다는 뒤에서 팔짱을 끼고 관전하기를 좋아하는 편...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