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본받아, ‘희생

11:47~53

2018. 9/2. 11:00

생명이 생명을 낳는다.
태평양 연안에 천축잉어라는 물고기가 산다고 한다. 암컷이 알을 낳으면 수컷이 그 알을 입에 담아 부화시킨다. 수컷은 알의 안전을 위해 알이 부화할 때까지 입을 열지 않는다. 그러니 아무 것도 먹을 수가 없다. 아무 것도 먹지 못하니 수컷은 점점 쇠약해지고, 급기야 알이 부화하는 시점에는 기력을 잃어 죽고 만다. 입 안에 있는 알을 그냥 내뱉기 만하면 죽음을 피할 수 있다. 하지만 수컷은 죽음을 뛰어넘는 사랑을 선택한다. 그렇게 목숨을 걸고 알을 부화시킨 것이다. 수컷의 희생을 통해 수많은 생명이 새롭게 태어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생명이 소중한 것이다.

 

생명이 생명을 낳는다. 한 생명의 희생으로 다른 생명이 태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그 생명은 다른 생명의 희생을 거름삼아 평생 살다가 자신 또한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성장을 위해 희생하는 것으로 생을 마감한다. 이것의 거룩한 순환이 자연법칙이다. 이것이 내가 산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다. 건강을 위해 운동 삼아 주로 산을 가지만 가끔은 나무 밑에 수북이 쌓여 나무의 거름이 되고 있는 낙엽을 보면서 내 삶에 거름이 되어준 낙엽들을 생각하며 새삼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 그래서 산을 간다. 어린 시절, 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불을 지펴 물을 끓이고, 밥을 하고, 방을 따뜻하게 했다. 나도 손을 보태기 위해 가끔 나무를 했다. 이렇게 땔감으로 나무를 사용하다보니 그 땐 벌겋게 속살을 드러낸 민둥산이 많았다. 물론 나무를 심어놓고 보호하는 구역도 있었다. 그곳에서는 나무를 밸 수 없고, 낙엽은 주울 수가 있었다. 그래서 갈퀴로 나무의 밑동이 드러나도록 낙엽을 굵어 모아 집으로 가져왔는데, 그 때마다 나무의 밥을 빼앗는 기분이었다. 아무튼 그것이 식물이든 짐승이든 사람이든 생명은 생명을 거름 삼아 태어나고, 자라고, 또한 거름이 되어 사라진다. 영적 생명도 마찬가지다.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거름 삼아 우리가 태어났고, 또한 자라고 있는 것이다. 이 시간에는 우리의 영적 생명을 위해 거름이 되어주신 주님의 거룩한 희생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희생을 요구하는 사람

사람들 중에는 다른 사람의 희생을 담보로 자신의 안위를 보장받으려는 사람이 있다. 소위 희생을 강요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한 개인의 인격과 사회의 성숙도를 알아보는 척도다. 이기적인 사람일수록 타인의 희생을 담보로 자신의 안위를 확보하려하고, 성숙하지 못한 사회일수록 체제보장내지는 기득권 세력의 권력유지를 위해 여러 사람의 과도한 희생을 강요한다. 본문에 나온 주님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와 그의 휘하(麾下)에 있는 유대종교가 그랬다. 가야바의 말이 이를 잘 보여준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도다.”(50). 모두가 사는 길이 희생에 있으니 한 사람을 희생시켜 모두를 살게 하자는 말이다. 흔히 하는 말로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자는 뜻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저자는 가야바의 이 말을 그가 대제사장이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주님의 대속적인 죽음을 예언한 것으로 해석했다.

 

사실 가야바가 이렇게 말한 속뜻은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 살길을 도모하자는 정치적 수사였다. 본문 앞부분을 보면 이 사실이 분명해진다. 유대 지도자들은 주님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다. 주님의 출현으로 자신들의 입지가 나빠졌고, 이 틈에 불순한 무리가 민란(民亂)이라도 일으켜 자신들의 기반을 무너뜨리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주님께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이 있었다. 이로 인해 주님의 인기는 더욱 치솟았고, 많은 유대인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11:44,45). 일이 이렇게 되자 유대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 공회가 소집되었고, 거기서 여러 대책의 말이 오가는 중에 결론적으로 가야바가 말을 했다. 바로 이 말이다. 이는 단순한 의견이 아니라 주님을 죽여라는 일종의 지시였다. 실제로 가야바의 이 말 이후 그동안 은밀하게 진행되던 주님을 죽이려는 움직임이 이제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냈다(53,57). 문제는 자신들에게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없으니까 로마의 손을 빌리기 위해 민란을 핑계 삼은 것이다. 명분은 나라와 백성을 로마로부터 보호한다는 것이지만 결국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꼼수였다. 그런데 요한복음 저자는 이를 하나님의 대속적인 섭리로 해석한 것이다. 이는 우리의 잘못과 실수까지 하나님의 섭리적 도구가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하여 우리의 실수나 잘못이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가룟 유다를 기억하라!).

 

자신을 주는 사람

반면에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 있다.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생명을 세우고, 다른 생명을 회복하고, 다른 생명을 구하는 사람이 있다. 다른 생명을 잘 되게 하는 사람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않고 스스로 희생을 선택한 사람이다. 예수님이다. 주님도 가야바와 같은 의미의 말씀을 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12:24). 희생해야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뜻이다. 가야바는 자신과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다른 사람의 희생을 역설했고, 주님은 많은 사람에게 풍성한 열매(생명)를 주시려고 솔선하여 희생의 본을 보여주셨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10). 같은 말이지만 이렇게 차이가 있다. 그러니 말의 내용보다 그것을 말한 사람이 더 중요한 법이다.

 

사실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주님의 삶은 그 자체가 희생의 본이었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하나님이신 주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탄생하신 일을 시작으로, 가난한 가정에서의 비천한 탄생, 사람대접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과 함께 하시면서 그들을 섬기고 돌보고 천국복음을 가르치면서 보낸 비천한 생애, 흉악범 취급을 받아 십자가에 달린 비참한 죽으심. 이 모두가 죄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고귀한 희생이었다. 어린 새끼들의 생명을 지켜내기 위해 자신의 살과 피를 준 어미 새 펠리칸(pelican)처럼, 주님은 우리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희생의 삶을 사셨다. 그래서 오늘의 우리가 있고, 우리 교회가 있는 것이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지만 주님은 주와 선생으로서 제자의 발을 씻겨주시는 섬김과 목숨까지 내어주시는 희생의 모범이 되기 위해 오셨다. 그러면서 내가 그랬으니 너희도 그래야 한다고 하셨다. 12:24의 말씀도 이렇게 받아야 한다. 성도는 되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비결이 바로 이 말씀에 있다.

 

날 연보(Day-offering)

우연히 개미와 관련된 논문을 한 편 읽었다. 거기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일개미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때로는 전사로 적과 싸우고, 적뿐만 아니라 동족살해도 서슴지 않고, 계급싸움도 벌이고, 여왕개미에게 반기도 들고, 여왕개미의 개체수를 조절하고, 자신의 유전인자를 물려주기 위해 기발한 전략을 사용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어떤 종보다 탁월하게 지구 전체에 서식하고 있는데, 추위에 약하지만 해발 3,600미터 히말라야 고원에도 살고, 섭씨 55도를 웃도는 사하라 사막에도 산다. 개미가 이렇게 놀라운 환경적응능력을 가지고 세계 각지에서 서식하는 비결을 이 논문은 개미의 집단성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집단은 이타성에 바탕을 둔 원활한 소통과 배려를 통해 유지된다고 했다. 개미의 이타적인 희생이 지구상에 광범위하게 서식하는 비결이라는 것이다. 결국 희생이 모두가 잘 사는 비결이라는 것을 개미를 통해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 실험결과를 소개하고 있었는데, 알프스에서 서식하고 있는 한 종류의 개미를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개미집에 불타는 초를 세워놓았더니 개미들이 자신의 몸을 불속에 던져 불을 끄는 데 전력을 다했다. 개미의 몸이 불타면 키츤스라는 불연성 진액이 나와 불이 꺼지기 때문이다. 공동체를 구하기 위해 개미들이 기꺼이 자기를 희생한 것이다. 개미의 이런 희생정신이 개미를 곤충의 왕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닐까? 희생은 참으로 아름답고 숭고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침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지금까지 우리 한국교회는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크게 부흥했다. 겨우 선교 백년이 조금 넘었는데 미국 다음으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한 것은 자랑이 아닐 수 없다. 그 배후에는 선배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에 논밭팔고 집 팔고, 재산 몽땅 털어서 지어진 교회들이 많다. 심지어는 돈이 없어 물질로 헌신을 할 수 없으니까 매달 하루씩 날을 드렸다. 이를 날 연보’(Day-offering)라고 한다. 우리 한국교회에만 있었던 제도였다. 그래서 그날은 온전히 교회를 위해서 일했다. 교회 청소도 하고, 수리할 곳이 있으면 수리하고, 교회 나무도 하고, 목회자와 함께 심방도 다니고, 사람을 찾아다니며 전도도 했다. 모든 성도가 이렇게 한 달에 하루씩 헌신하여 교회를 섬기니 교회가 부흥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짧은 선교역사에 이토록 획기적인 부흥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희생은 새로운 삶을 탄생시키는 것은 물론 지켜내는 위대한 힘이다. 주님의 희생으로 우리가 있고, 신앙 선배들의 희생으로 우리 교회가 있다. 이제는 우리가 응답해야할 차례다. 교회의 침체원인이 여럿 있겠으나 가장 중요한 원인은 희생하지 않는 것이다. 가야바처럼 다른 사람의 희생만 기대하기 때문이다. 주님을 본받아 신앙 선배들처럼 주님과 주님의 몸된 교회, 이 교회의 지체를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자! 우리의 미래, 교회의 미래, 그리고 가정의 미래는 우리의 희생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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