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본받아, ‘회복시켜주심

12:9~13

2018. 10/28. 11:00(종교개혁기념주일)

변화를 시도하는 일은 어렵다.

청빙 받아가는 목회자에게 불문율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부임 3년간은 가급적이면 아무것도 바꾸려고 하지마라!대부분의 사람들은 조금 불편해도 길들여진 것, 익숙한 것을 좋아한다. 바꾸려고 하면 심한 경우는 불안감을 느끼면서 반발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한 목회자가 어느 교회에 새로 부임했다. 그런데 강대상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강대상을 가운데 놓고 설교를 했으면 좋겠는데, 전임 목회자가 그렇게 한 것이라 당장 옮겨놓을 수가 없었다. 고심을 하다가 매주일 3씩 강대상을 가운데로 옮기기로 했다. 3니까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시간은 조금 걸렸지만 마침내 원하는 대로 강대상을 가운데 놓고 설교를 할 수 있었다. 참으로 지혜로운 태도다. 왜 사람들이 몰랐겠는가? 물론 처음에야 몰랐겠지만 나중에는 알아도 문제로 생각하지 않게 된 것이다.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도 힘들지만 이미 있는 것을 새롭게 바꾸는 것은 더욱 어렵다. 이것을 아이작 뉴턴의 운동법칙에 적용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뉴턴의 운동 제1법칙을 관성의 법칙이라고 한다. 관성이란 외부에서 다른 힘이 가해지지 않으면 정지해 있는 물체는 영원히 정지해 있으려고 하고, 운동하고 있는 물체는 영원히 같은 속도 같은 방향으로 운동하려고 하는 성질을 말한다. 예를 들어 모처럼 새벽예배를 나왔는데, 하루 종일 몽롱하고 너무 힘들었다. 습관이란 관성 때문이다. 매일 7시에 일어났는데, 갑자기 5시에 일어나니 관성이 작용하여 힘이 든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거나 이미 있는 것을 바꾸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런 관성을 극복하려면 거기에 상응하는 힘을 작용해야 한다. 새벽에 일어나려면 적어도 저녁에 일찍 자야한다. 이것이 운동의 제2법칙 가속도 법칙이다. 정지해 있는 10의 물체를 움직이려면 이에 상응하는 힘을 가해야 움직이게 되고, 움직이고 있는 10의 물체를 멈추게 하거나 방향을 바꾸기 위해서도 이에 상응하는 힘이 가해져야 한다. 문제는 이렇게 힘을 가하게 되면 반드시 반작용이 따르게 된다. 저녁에 일찍 자려고 하니 저녁에 하였던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 갈등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것이 운동의 제3법칙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다. 공기가 가득 든 풍선의 주둥이를 놓으면 공기가 빠져나가면서 풍성이 뒤로 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관성적으로 해온 일에 변화를 주거나 새롭게 바꾸려면 이에 상응하는 힘을 가해야 하고, 힘을 가하면 필연적으로 반작용(저항)이 일어난다. 때문에 변화가 어렵다. 그러나 성장과 성숙을 위해선 어려워도 감수해야 한다. 세상에 의미있는 변화를 가져왔던 사람들의 공통점이 이런 어려움을 감수했다는 것이다.

 

안식일 논쟁

본문을 비롯하여 복음서를 보면 주님께서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과 충돌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그 이유는 종교적 관성에 사로잡힌 그들에게 주님께서 그 관성을 깨기 위해 힘을 가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주님의 작용에 그들의 반작용으로 충돌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본문도 마찬가지다. 본문이 바로 앞 사건의 연속인지 독립된 사건인지는 논란이 있지만 사건은 달라도 논지는 같다. 소위 안식일 논쟁이다. 앞의 사건은 주님 제자들의 부주의한 행동에서 비롯되었고(1), 본문은 바리새인들에 의해 의도된 사건이다(10). 앞 사건은 회당 밖에서 일어난 것이고, 본문은 회당 안에서(9) 일어난 사건이다.

 

사실 이 사건은 주님께서 바리새인의 지적에 사과하고 앞으로 조심하도록 제자들에게 주의를 주겠다고 했으면 문제가 이렇게까지 확대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이 일을 통하여 그들의 관성적인 안식일 준수, 나아가서 율법준수에 문제를 제기하셨다. 한 마디로 바리새인이 안식일의 정신, 율법의 정신은 잃어버리고 기계적으로 안식일(율법) 자체에만 매달려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안식일이라는 제도 자체보다 사람이 먼저고,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존재한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율법준수의 예외적인 사례를 구약성경을 통해 제시하셨고(3,4), 또한 직무상 제사장들이 안식일 준수를 어긴 것을 예로 들었다(5). 그러자 바리새인이 주님께 앙심(怏心)을 품고 본문에서 이런 음모를 꾸민 것이다.

 

한편 손 마른 사람

주님께서 회당 안으로 들어가셨을 때 한쪽 손 마른 사람을 앞세우고 바리새인들이 앉아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주님께서 들어오시자 물었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습니까?주님의 의견을 듣자고 이런 질문을 한 것이 아니다. 10절 말씀처럼 주님을 함정 빠뜨리기 위한 음모였다. 그러자 주님께서, 비록 안식일이라도 짐승도 구덩이에 빠지면 구출하는데(11), 하물며 고귀한 사람이 질병으로 고생하는데 안식일에 고쳐준다고 하여 무엇이 문제가 되겠냐면서 병자에게 손을 내밀게 해서 고쳐주셨다(12,13).

 

우린 이 사건을 통해 관성에 사로잡힌 종교, 종교적인 관성에 묶인 종교인의 실상을 볼 수가 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할 신성한 공간을 논쟁의 장소로 바꾸었고, 안타까운 삶의 문제를 해결 받고 싶어 예배의 자리에 나온 사람을 자신들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이용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이 사람은 석공인데, 갑자기 오른손이 마비가 된 것이다(6:6). 한 사람의 불행은 그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와 관련된 사람들까지 모두 불행하게 만든다. 이렇게 심각한 문제를 가진 사람을 주님을 무너뜨리기 위한 덫으로 이용한 것이다. 이 정도면 종교적인 열정은 있고, 자기 종교에 헌신한 사람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사람은 아니다. 인간성이 사라진 사람이다. 율법준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고, 안식일 준수는 그 사랑하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율법이 존재하고 안식일이 존재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이와 같은 율법의 정신, 안식일의 정신은 관심이 없고 율법의 조문 자체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예배를 드리는 장소도 예배시간도 주님을 곤경에 빠뜨리는 일에 이용한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정말 안타까운 문제를 가지고 예배를 드리러 나온 사람까지 이용한 것이다.

 

상황이 이쯤 되다보니 주님께서 충돌을 불사하면서까지 안식일에 일부러 병자를 고쳐주신 것이다. 사실 한쪽 손 마른 것은 시간을 다투는 병이 아니니까 다음날로 미뤄서 치료해 주실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이런 충돌을 피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굳이 안식일에, 그것도 회당 안에서 환자에게 손을 내밀게 하여 고쳐주셨다. 바리새인들이 의도적으로 이 사람을 내세웠던 것처럼 주님께서도 의도적으로 이 사람을 고쳐주셨다. 그렇지만 그 의도된 내용은 전혀 달랐다. 바리새인의 의도는 주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것이었고, 주님의 의도는 사람을 살리고 안식일 정신을 회복하기 위함이었다. 종교의 본질, 신앙의 본질은 생명이다. 생명을 구하고 살리는 일이다. 여기에서는 그 어떤 이론도, 교리도, 사상도 침묵해야한다. 안식일도 마찬가지다. 주님께서 유대교 지도자들과 충돌을 불사하면서까지 안식일 논쟁을 하셨던 이유가 종교의 본질회복, 신앙의 본질회복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본질은 생명회복이고, 생명구원에 있다.

 

내 손을 내 밀라!

한쪽 손 마른 사람의 치유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이 동일하게 취급하고 있는 사건이다. 모두 안식일 논쟁사건에서 나오고 있는데, 상징성이 크다. 이 사람은 안식일이라는 제도(규례)에 갇혀 생명력을 잃어버린 당시 유대교와 유대교 지도자들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누가 보더라도 당시 유대인은 율법규례에 철저하게 헌신된 사람들이었다. 주님께서도 인정하셨지만 그들은 박하와 근채의 소산까지 십일조를 드렸다(23:23). 사소한 것까지 꼼꼼히 챙겨서 율법을 지켰다는 것이다. 주님은 결코 그들의 이런 열심을 비난하거나 책망하지 않았다. 단지 십일조의 정신인 ()와 인()과 신()을 버린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철저한 안식일 준수를 문제 삼으신 것이 아니라 안식일 정신을 잃어버린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아무리 좋은 것도 정신을 잃어버리거나 정신이 왜곡되면 쓸모없는 장애물이 되고 만다. 주님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서 이 점을 보셨고, 이 점을 회복해야 한다고 도전하셨다. 안타깝게도 종교적 관성에 사로잡힌 그들은 이와 같은 주님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저항했다. 오히려 주님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무너뜨리려 한다고 생각하여 끝내는 주님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오늘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지 501주년이 되는 기념주일이다. 종교개혁도 어떤 새로운 것을 지향한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본질회복에 있다. 성경적인 교회, 성경적인 신앙을 회복하자는 것이 종교개혁이다. 그래서 영어로 개혁하다.는 단어도 원래의 상태다시돌아간다는 뜻이다(reform=re+form). 본문에서 주님은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손을 내 밀라.’(13). 물론 이 말씀은 직접적으로는 이 병자에게 하신 것이다. 동시에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 특히 유대교 지도자들(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 주신 말씀이다. 그렇다. 회복의 은혜를 받으려면 손을 내밀어야 한다. 문제를 주님께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놓아야 해결이 된다. 내 안에 말라붙은 것들을 내놓고 기도해야 한다. 내놓고 부르짖어야 한다. 내놓고 도움을 구해야 한다. 말라붙은 것은 손뿐이 아니다. 눈도 귀도 입도 발도 마음도 생각도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면 말라붙은 것이다. 관계도 물질도 가족도 신앙도 말라붙을 수 있다. 주님은 다 보시고, 다 아시고, 우리를 찾아오셨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말라붙은 모든 것을 내밀라!우리의 말라붙은 모든 것을 주님께 내어놓아 회복의 은혜를 경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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