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이 약속된 말씀, ‘섬김

11:1~10

2019. 4/14. 11:00

종려주일(Palm Sunday)

오늘은 예수님의 지상생애 마지막 한 주간(고난주간)의 첫날이다. 교회력에서는 이를 종려주일’(Palm Sunday)이라고 부른다. 주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많은 사람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한데서 유래되었다. 이 종려주일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고난주간이 시작된 것을 알리는 날이다. 주님의 이 영광스러운 입성은 고난과 죽음의 전주곡이라는 것이다. 겉으론 주님께서 사람들의 환호를 받고 있지만 모진 고통의 길을 향해 이를 악물고 전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스리기 위해 권좌(權座)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죽음의 잔을 마시기 위해 죽음의 자리 골고다를 향해 나아가고 계신 것이다. 이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군림하여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 아니라 섬기고 자신을 화목제물로 주시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인간의 연약함과 완악함을 생각하게 하는 날이다. 주님을 그토록 열열이 환호하며 환영하던 사람들이 단 며칠 만에 전혀 딴 사람으로 돌변했다.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흔들어대던 그 손으로 주님을 향해 삿대질을 하고, 호산나를 외치며 찬양하던 그 입으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면서 주님께 저주를 퍼부었다. 일주일도 못되어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 이것은 말 그대로 인간의 연약성과 완악성을 보여준다. 그러니 매년 찾아오는 종려주일마다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마음의 완악함을 생각해야 한다. 이런 우리 자신을 보면서 자신을 제물로 내어놓기 위해 고난당하신 주님을 묵상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나귀와 나

본문은 주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을 들어가시는 모습이다. 만왕의 왕이신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이처럼 소박하다 못해 초라했다. 말이 영광스러운 입성이지 말()도 아닌 어린 나귀를 타고, 단 한 사람의 호위병사도 없이 입성하셨다. 이것이 어찌 왕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것은 스가랴의 예언대로 주님이 겸손의 왕, 평화의 왕이신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9:9). 아무튼 이 시간에는 종려주일에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도운 나귀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한다. 본문에 나온 이 나귀에 대해 살펴보면 최소한 네 가지의 모습을 생각해 볼 수가 있다. 첫째는 매여 있는나귀이고, 둘째는 풀어진나귀이고, 셋째는 주님을 태운나귀,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님을 태우고 환호를 받으면서성으로 들어가는 나귀의 모습이다. 이와 같은 나귀의 모습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미래의 모습이다.

 

매여 있는 나귀

주님은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 제자 둘을 맞은 편 마을로 보내시며 말씀하셨다.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2). 여기 베다니 맞은 편 마을에 매여 있는 이 나귀는 믿기 전 우리 모습이고,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한 사람의 모습이다. 루소는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디서나 사슬에 묶여있다.고 했다. 사실 인간은 누구도 예외 없이 태어날 때부터 어디서나 묶인 존재다. 원죄를 안고 태어난 죄인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죄에 묶이고, 사단에 묶여 죄의 종, 사단의 종으로 살고 있다. 불의한 생각, 악한 생각, 탐욕적인 부끄러운 온갖 생각에 사로잡혀 있고, 나쁜 습관, 악한 습관, 경건하지 못한 여러 습관에 매여 있고, 근심과 걱정, 불안과 염려, 시기와 질투 등과 같은 나쁜 감정에 매여 있다. 질병에 묶여 있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 플라톤은 인간을 동굴안의 죄수에 비유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불행이고 비극이다. 그런데 더욱 불행한 것은 자신이 묶인 존재라는 사실을 모르고 사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냥 체념하고 사는 것이다. 베다니 맞은 편 마을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매여 있는 새끼 나귀는 수많은 것에 의해 매여 살았던 과거 우리의 모습이고, 아직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풀어진 나귀

그런데 주님께서 두 제자를 보내 그 매여 있는 나귀를 풀어 끌고 오라.고 하셨다. 그래서 매여 있던 이 새끼 나귀는 제자들에 의해 풀리게 되었다. 매임에서 놓이게 되고, 속박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나귀는 주님에 의해 묶임에서 풀리게 되고, 매임에서 놓이게 되고, 속박에서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죄의 본성을 갖고 있는 존재이기에 죄를 짓는 일을 멈출 수가 없다. 이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는데, 이 구원은 주님의 선물이다. 세상의 어떤 철학이나 사상(이념)이나 지식, 제도나 종교가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어떤 훈련으로도 불가능하다(2:16). 오직 그리스도이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모든 묶임에서 풀리게 하시고, 매임에서 놓이게 하시고,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신다. 찬송가 가사처럼 오직 예수의 피 밖에 없다.’(252). 주님만이 우리 구원의 유일한 길이다(14:6, 4:12). 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사람이 우리다. 제자들의 손에 의해 자유롭게 된 어린 나귀는 이와 같은 우리의 모습이다.

 

주님을 태운 나귀

자유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으로부터의 자유’(From freedom)이고, 다른 하나는 ~을 위한 자유’(For freedom). 후자를 성도의 자유라고 한다. 본문이 이를 잘 보여준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귀를 풀어 끌고 오라고 하실 때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히셨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려느냐 묻거든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3). 주님께서 이 나귀를 풀어주신 이유다. 주께서 쓰시기 위해서였다. 예루살렘 입성이라는 영광스러운 일에 이 나귀를 사용하시기 위해서 풀어오게 하신 것이었다(7). 그러니까 이 나귀는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풀려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실 때도 동일하게 말씀하셨다. 그들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렇다. 성도의 자유는 자유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섬기기 위한 자유다.

 

사르트르는 자유를 이렇게 정의했다. ‘자신의 삶의 의미를 살려내기 위해서는 어떤 것으로부터 벗어나야함은 물론 어떤 것에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잡아매는 행위를 해야한다.’(앙가주망, engagement). 그러니까 자유란 현재 상태로부터의 자기해방이면서, 동시에 스스로 선택한 상태로의 자기구속인 것이다. 이것은 이미 바울이 성도의 자유를 이야기할 때 말한 것인데, 바울은 더 구체적으로 이를 말하고 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5:13). 주님께 받은 자유를 올바르게 사용하라는 것인데,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기회로 삼으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섬김의 기회로 사용하라는 것이다. 어린 나귀처럼 섬기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도의 삶이다. 성도에게 섬김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이고 목적이기 때문이다.

 

영광을 받은 나귀

이렇게 주님 앞에 끌려온 어린 나귀는 주님을 태우고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한 번도 등에 짐을 실어본 적이 없는 이 나귀에게 30대의 건장한 주님을 태운 것은 숨이 막히도록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예루살렘은 해발 천 미터가 넘는 고지대에다 건조하고 뜨거운 땅이다. 물론 베다니에서 예루살렘까지는 그리 먼 길(2~3)은 아니어도 길들여지지 않은 어린 나귀에게는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섬김이라는 것이 그렇다. 힘들고 어렵고 부담스러운 것이 섬김이다. 자신의 생활이 있고 계획이 있는데, 거기서 특별한 시간을 내고 열정을 쏟고 물질을 드리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도 일회적으로 끝나면 괜찮은데 지속적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좁은 길에 비유한 것이다. 힘들고 어려운 섬김의 길이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주님을 업고 땡볕 길을 걷고 있는 어린 나귀는 신앙의 길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 일로 세상에 태어나 거친 일만 하다가 죽을 이 어린 나귀가 큰 영광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나는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다. 물론 주님을 위한 것이었지만 주님을 태운 이 어린 나귀는 뭇사람의 겉옷이 깔리고 나뭇가지가 깔린 길을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걷게 되었다(7~10). 주님을 업고 있었기 때문에 누린 호사(好事)이고 환대였다. 그 땅에 얼마나 많은 나귀가 있었겠는가? 그런데 이 어린 나귀만이 만왕의 왕이신 주님을 태운 유일한 나귀가 되었다. 나귀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다. 이것이 섬김의 복이다. 주님을 섬겼기 때문에 환영을 받고, 주님을 섬겼기 때문에 영광을 받은 것이다. 섬김은 힘들고 어렵고 부담스러운 것이지만 섬김에는 이런 복이 따르고 영광이 따르게 된다. 그리고 섬김 자체가 복이다. 이 나귀가 주님을 태우게 된 것은 오직 주님께서 그를 택해주셨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택해주셨기에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또한 주님을 섬겼기에 영광을 받았다. 그러니 섬기는 것도 은혜이고 특권이다. 영광이고 자랑이다. 축복이다.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부르신 주님을 위해 헌신하여 섬기자. 그러면 주님 때문에 인정받고, 주님 때문에 환영받고, 주님 때문에 영광을 받게 된다. 또한 주님의 복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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