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걸고 살리시는 주님

마12:9~21

2016. 12/18. 11:00(대강절Ⅳ)

현대판 화타(華佗)사건

몇 년 전, 현대판 화타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전라북도에서 91세의 노인이 무면허의료행위를 했다고 하여 1심에서 집행유예와 일천만 원 벌금형을 받았다. 그런데 항소심을 앞두고 그에게서 치료를 받고 병이 나은 사람들이 구명운동을 나섰다. 그들 중에 전북대학교 한 교수는 위암이 복막과 장으로까지 전이되어 한 달 정도밖에 살 수 없다는 선고를 받았는데, 그에게 치료를 받고 완치가 되었고, 허리 디스크, 간질, 아토피 피부염, 심지어 불면증이나 우울증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치료를 받았다. 그래서 그들이 구명운동을 나선 것이다. 일각에서는 그의 탁월한 의술이 정당한 의료행위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담당검사는 그의 의료행위는 실정법 위반이라고 잘라 말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 노인이 생명의 은인이었다. 정말 그는 많은 생명을 구했다. 그런데 그렇게 생명을 구한 행위 때문에 처벌을 받게 되었다. 생명을 구했다는 것은 칭찬을 받아야 할 일인데, 오히려 처벌을 받아야하는 역설적인 사건이 되고 말았다. 자격을 갖춘 사람만 진료를 할 수 있다는 의료법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병든 사람을 치료해서 살리기 위한 것이 의료정신이다. 의료정신에 따르면 그는 칭찬을 받아야 하지만, 의료법의 문구에 의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법의 문자규정과 그 정신의 불일치 사이에 이 현대판 화타의 운명이 끼어있었다. 본문 역시 ‘안식일(율법)의 정신이냐? 안식일 규정(율법)의 문구냐?’는 문제를 놓고 예수님과 바리새인 사이의 충돌사건이다.

 

세 종류의 손

날로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유대교 지도자들의 경계도 심해졌다. 주님의 부상이 자신들의 입지를 위태롭게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의 저변에는 시기와 질투가 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시기와 질투고, 또한 제일 치사하고 치명적인 죄다. 그러던 중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걷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이삭을 잘라먹은 것이다(1). 그래서 이 일로 주님과 바리새인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안식일에 도무지 해서는 안될 일을 제자들이 했다는 것이다(2). 그런데 본문에서 다시 안식일 문제로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본문과 앞의 사건이 다른 것은 앞부분은 제자들에 의해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지만 본문은 바리새인에 의해 기획된 것이다(10, “고발하려 하여”). 그래서 주님이 직접 관련된 사건이다. 아무튼 이 사건을 계기로 유대교 지도자들이 주님에 대한 음모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14,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이와 같은 배경을 가지고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세 종류의 손’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다.

 

1. 마른 손

흔히 손을 ‘제2의 뇌’, 혹은 ‘외부에 보이는 뇌’(뇌에서 파견한 일꾼)라고 한다. 우리의 삶에서 손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동물의 세계에는 발전이 없다. 동물의 생활은 천 년 전이나 백 년 전이나 지금이 똑같다. 하지만 인간 세상은 적응하기가 힘들 만큼 빠르게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이 차이가 손의 사용에 있다. 사람과 동물 사이의 차이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차이도 어떻게 손을 사용하느냐에 달렸다. 그래서 한 사람에 대한 평가는 ‘평생 그가 손을 어떻게 사용했느냐?’로 결정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는 이렇게 소중한 손을 사용할 수 없게 된 사람, 곧 “한쪽 손 마른 사람”(10)이 나온다.

 

여기서 ‘마른’(ξηραν)이란 혈액순환이 원활치 못하거나 손의 기능이 쇠퇴되어 손을 쓸 수 없는 상태를 뜻한다. 본문에는 이 사람의 손이 이렇게 된 것이 선천적인 것인지 후천적인 것인지가 분명치 않다. 그런데 같은 사건을 취급하고 있는 마가복음에서는 현재완료 수동태 분사(3:2)를 사용하여 이 사람의 장애가 후천적으로 어떤 질병이나 사고에 의한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ξηραινω의 현재완료 수동태 분사 εξηραμμενην를 사용하여). 살다가 갑자기 이런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외경에서는 이 사람의 직업을 ‘석공’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손으로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꾸려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게다가 누가복음은 이 사람의 마른 손이 힘의 상징인 ‘오른 손’이라고 했다(6:6). 손으로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꾸려가고 있는데, 그 손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것도 오른 손이 그렇게 되었으니, 이 사람의 처지가 얼마나 절박한지를 짐작할 수가 있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 처한 그가 찾은 곳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회당이다. 평생 이런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살다보면 누구나 이런 상황에 빠질 수 있다. 그 때 어떻게 해야 할까?

 

2. 죽이는 손

또 하나의 손은 ‘죽이는 손’이다. 바리새인의 손이다. 그들은 첫 번째 안식일 논쟁(1~8)에서 패배한 것을 설욕이라도 하려는 듯한 기세다. 그들은 손 마른 사람을 앞세워 주님께 물었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습니까?’(10b). 그들이 이렇게 묻는 것은 주님을 ‘고발하기 위해서’(κατεγορεω), 즉 고발하기로 이미 마음을 먹고 그 실마리를 잡기 위해서였다. 주님의 관심을 이 사람에게 집중시켜 주님으로 하여금 이 사람을 고칠 수밖에 없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고쳐주면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되고, 만약 외면하면 그 동안 가르쳤던 내용과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이 되니 위선자가 되는 것이다.

 

우린 여기서 타락한 종교의 잔인하고 비겁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주님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이기적인 목적의 도구, 그것도 악의적인 도구로 이용하였다. 살리는 말씀을 죽이는 도구로 만든 것이다. 게다가 손이 마비되어 자신과 가족의 생계까지 위협을 받고, 그래서 하나님의 위로와 도움을 받고자 회당을 찾은 안타까운 사정을 가진 사람까지 이용을 했다. 그들에게는 주님을 무너뜨릴 생각 외에는 아픈 사람에 대한 일말의 동점심도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도 이웃의 가슴 아픈 사연도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에 불과했던 것이다. 왜 이들이 이렇게 파괴하고, 무너뜨리고, 죽이는 손으로 전락했을까? 그 이유가 마가복음에 나온다. ‘미음이 완악’(막3:5)했기 때문이다. ‘완악함’(πωρωσει)이란 대리석처럼 ‘단단히 굳어버린 마음’을 뜻한다. 여기서 굳은 마음은 죽은 마음이다. 마음이 죽어버리면 주님도, 사람도, 다른 사람의 고통이나 괴로움도 보이지 않는다.

 

3. 살리는 손

살리는 손’은 주님의 손이다. 주님은 안식일의 규정을 적극적으로 적용하셨다. 바리새인처럼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일보다 안식일에 해야 할 일을 강조하셨다. 안식일은 ‘적극적으로 선을 실천하는 날’(7)이라고 하셨다. 더 나아가 안식일의 규정문구보다 안식일 정신을 강조하셨다. 그리고 안식일 정신은 ‘생명을 살리는 것’(11,12)이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주님은 바리새인의 함정을 피하기보다 정면으로 도전하셨다. 함정이라는 것을 아시면서, 그리고 따르게 될 불이익을 감수하시면서 안타까운 사정을 가진 이 사람의 문제를 즉시 해결해주셨다.

 

바리새인은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이 사람을 이용했는데, 주님은 이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셨다. 주님은 자신의 안위(安慰)보다 손 마른 사람의 사정을 먼저 생각하셨다. 자신은 돌아보시지도 않고 살리는 일에만 집중하셨다. 살리는 일이라면 어떤 비난이 따르고, 불이익이 따르고, 희생이 따르더라도 멈추지 않으셨다. 주님은 바리새인처럼 얄팍한 실리(實利)에 매달리지 않고 조건없이 행동하는 영어로 ‘Do for nothing!’의 원리로 사셨다. 그래서 마태는 이와 같은 주님의 모습을 이사야서에 나온 말씀을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20). 한마디로 주님은 살리는 손을 가지신 분, 죽어가는 것들을 살려내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손을 내밀라!

며칠 전에 사임한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자신은 친(親)박도 비(非)박도 아닌 ‘낀 박’이라고 했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친박의 세력이 크니까 친박에게 자꾸 휘둘렸다. 사실 이것이 우리의 실존이다. 바울도 자신을 ‘삶과 죽음 사이에 끼어있다.’고 고백했다(빌1:23). 그러므로 죽이는 손과 살리는 손 사이에 끼어있는 한쪽 손 마른 사람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그런데 안타깝고 억울한 것은 새누리 원내 대표처럼 이 사람도 죽이는 악한 손에게 이용을 당했다. 우리 주님은 이런 우리를 구원하고 살리시는 선한 손으로 오셨다. 본문에서도 이것을 유감없이 보여주셨다.

 

주님은 손 마른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손을 내밀라.”(13). 주님의 이 명령은 매우 엄중하고 단호하며 강력한 믿음의 요구다. 여기서 ‘내밀라’(εκτεινον)는 ‘부정과거 명령형’이다. 헬라어에서 부정과거 명령형실제적으로 그 행위가 완수되기를 바라면서 내린 강제성을 가진 긴급한 명령을 할 때 사용한다. 게다가 주님의 이 명령은 상황적으로 실천 불가능한 것이었다. 마비된 손을 어떻게 내밀 수 있겠는가? 이런 실천 불가능한 명령은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고, 또한 주님께 대한 강력한 믿음의 요구다. 주님이 고치신다는, 고치실 것이라는, 아니 고치셨다는 믿음이다. 이런 믿음이 없이는 실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주님의 이 명령에 단번에 결연히 응답(‘내밀매’, 부정과거 능동태 직설)했고, 또한 즉각 회복(‘회복되어’, 부정과거 수동태 직설)되었다. 무엇이든 주님의 명령에 믿음으로 응답하면 기적은 상식이 된다. 우리 안에도 마비된 것들, 죽어가는 것들이 많다. 이런 우리를 향해 주님은 ‘손을 내밀라.’고 명령하신다. 주님의 명령에 즉각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이 대강절에 우리 안에 마비된 것들이 다 회복되고, 죽어가는 모든 것들이 살아나는 기적을 경험하기 바란다. 아울러 바리새인처럼 무너뜨리고, 파괴하고, 죽이는 악한 손이 아니라 주님처럼 잡아주고, 붙들어주고, 세워주고, 회복시키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베풀고, 나누고, 살리는 선한 손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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