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기적을 경험하는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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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799회 작성일 08-06-15 17:38본문
인생의 기적을 경험하는 비결
요2:1~11
2008. 6/15 11:00
일본의 어느 기업체에서는 욕을 들어주는 화풀이 전화를 개설하여 직원들의 정신적 압박감을 덜어줌으로써 작업능률을 향상시켰고, 미국에서는 상당한 액수의 돈을 받고 '무슨 말이든 5분씩 들어주겠다.'라고 광고를 했더니 주문이 쇄도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른바 선진국형 병폐라 할 수 있는 정신적인 압박감과 스트레스 질환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우울한 단면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자신의 고민이나 아픔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고, 털어놓을 곳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런데 문제는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알게 모르게 상처를 받고 억울한 감정과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어디에도 하소연 할 곳이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어떤 분은 현대인의 삶을 비상구가 없는 건물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신앙인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주님께 무엇이든지 말할 수 있고, 우리가 한 말은 무엇이든 들어주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기도는 비상구다. 주님께로 향한 우리 영혼의 비상구일 뿐만 아니라 우리 인생의 비상구이다. 아무리 힘든 상황, 황당한 사건이 발생해도 기도라는 비상구를 통하여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것이다(고후4:8).
본문은 예수님이 처음 행하신 표적 이야기다(11). 갈릴리 가나 마을 혼인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인데, 이 사건은 당시 유대 종교와 율법의 한계를 지적함과 동시에 예수님과 예수님의 가르침의 탁월성을 강조한 것이다. 예수님을 포도주의 모자람으로 궁지에 빠진 혼인잔치를 구할 뿐만 아니라,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전보다 더 좋은 포도주를 제공하신 분으로 소개한다. 아울러 이 사건은 기도자의 자세에 대한 중요한 교훈, 즉 인생의 기적을 경험할 수 있는 비결을 교훈하고 있다. 인생의 기적을 경험할 수 있는 비결은 기도이고, 나아가서 기도자의 자세에 달려 있음을 보여준다.
1. 기도는 현실에 대한 바른 인식과 진단에서 시작된다.
본문에 나온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태도가 이를 잘 보여준다. 모두들 잔치에 몰두해 있을 뿐 포도주가 모자란다는 사실을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유대인들은 보통 잔치를 일주일씩 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종종 발생했다고 한다. 하지만 잔치 중간에 포도주가 떨어지는 일은 주인에겐 난처한 일이요, 손님에 대한 큰 결례였다. 이 심각한 일에 잔치를 주관하고 있는 연회장도, 잔치의 주인공인 신랑과 신부도, 신랑/신부의 부모도, 잔치를 돕고 있는 누구도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오직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이 사실을 발견했고,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예수님께 요청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3절, “포도주가 모자란지라.”에서 ‘모자란다.’는 말은 단순히 포도주가 떨어져간다는 의미 이상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는 당시 유대교와 율법의 한계를 나타냄과 동시에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존적 상태를 보여주는 말이다. 인생의 비애와 고통, 안타까움이 바로 이 때문이다. 원하는 대학, 원하는 직장에 가고 싶지만 실력이 부족해서 못가고, 멋지게 사업을 하고 싶지만 자금이 모자라서 못한다. 자녀들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무엇이든 다해주고 싶지만 능력이 부족해서 못한다.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꿈꾸었지만 서로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고 인내와 이해가 부족하여 결혼생활을 비극적으로 끝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원함은 있으나 미치지를 못한 것. 이것이 인생이다.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노력하고 연구하고 분투한 이유가 이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돌아온 것은 비참한 실패뿐이다.
우리 인생이란 결핍에 대한 반응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결핍에 대한 반응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가 있다. 그가 신자인지 아닌지, 성숙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가 있다. 이 결핍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다. 불평과 원망, 나아가서 폭력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전쟁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자기 집단의 결핍을 해결하기 위한 다른 집단에 대한 도발이다. 결핍에 대한 폭력적인 반응이 전쟁인 것이다.
반면에 결핍을 기도의 기회로 삼는 사람들이 있다. 본문의 마리아가 바로 그 사람이다. 마리아는 포도주의 모자람을 기도로 연결하였다. 그녀는 예수님을 찾아가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말했다. 예수님께 기도한 것이다. 특히 여기서 모자람은 마리아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문제였다. 그런데도 그것을 위해 기도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약점을 보면 물고 늘어지는 것이 세상인심인데 이를 위해 기도하다니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모자람을 넘침(7)으로 바꾸어 놓으셨다.
불평과 원망으로 결핍을 해결할 수 없다. 폭력으로도 해결할 수가 없다. 그럴수록 인간의 결핍은 더 커지고 깊어지는 것이다. 주님만이 우리 결핍의 해결자시고,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 그 해결책이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결핍을 느끼거든 기도하라는 말씀이다. 기도하면 결핍은 기회가 된다. 주님의 풍성함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 주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기 된다. 결핍을 느낄 때 주님을 찾는 것은 신자의 특권이다. 그러므로 부족함을 보거든 주님을 찾자, 그리고 기도하자!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부족과 결핍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다(막2:17).
2. 기도는 대상에 대한 전적인 신뢰에서 지속된다.
앞에서 말한 대로 결핍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것은 자신의 결핍을 알지 못한 점이다. 본문에서 마리아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다. 때문에 기도의 무릎을 꿇을 수가 없는 것이다. 신자는 모자라는 자신의 현실과 존재를 분명하게 볼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의 결핍을 안타까워하며 주님 앞에 무릎으로 나아가야한다. 결핍이나 모자람은 곧 갈급함, 사모함, 간절함의 다른 모습이다. 결핍을 느끼고 자신의 부족과 모자람을 아는 사람이라야 주님의 채워주심 갈망하게 되고, 주님의 풍성함을 사모하게 된다.
그런데 이 기도라는 게 그렇게 만만치가 않다. 기도에는 항상 강력한 저항이 따른다. 그것은 기도의 중요성을 알고 그것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마리아가 기도하자 예수님은 즉시 응답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강하게 거절하셨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4).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강한 거절에 대한 마리아의 태도이다. 마리아는 거절에도 불구하고 하인들에게 주님의 명하신대로 할 것을 당부했다(5). 예수님에 대한 마리아의 전적인 신뢰를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다. 기도의 방해를 극복하는 길은 주님께 대한 강한 신뢰다. 주님께 대한 강한 신뢰를 갖고 있는 한 어떤 방해 속에서도 기도할 수 있다. 어떤 기도의 시험도 극복할 수가 있다.
예수님은 낙심하지 말고 기도할 것에 대한 교훈으로 불의한 재판관과 홀로 사는 한 여인의 이야기를 비유로 말씀하셨다(눅18:1~8).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었고, 또 홀로 사는 한 여인이 있었다. 이 여인이 자주 재판관을 찾아가서 자기 원한을 풀어달라고 했으나 듣지 아니하였다. 그렇지만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찾아갔고, 재판관은 귀찮아서 그녀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이에 대해 주님은 이렇게 결론을 맺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7~8). 믿음이 있어야 어떤 경우에도 낙심하지 않고 기도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막5:36, 야이로). 응답받는 기도, 능력을 경험하는 기도는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는 기도이다. 그러기 위해선 반드시 주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가 있어야 한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1:6~8).
어느 교회학교 어린이부에서 반 소풍을 계획하고 선생님과 아이들이 준비 기도를 했다. 특히 소풍날 좋은 날씨를 달라고 기도를 했다. 그리고 당일이 되어 야외로 나가서 예배를 드리고 재미나는 게임도 하고, 준비한 도시락으로 맛있게 점심도 먹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비가 쏟아졌다. 이 때 선생님이 가방 속에서 우산을 꺼내 펼쳐들고선 아이들을 우산 속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그 때 한 아이가 ‘선생님 미워, 선생님은 거짓말쟁이야’하고 외치며 울면서 빗속으로 뛰어갔다. 그것은 비가 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함께 기도하고, 기도했으니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 말한 선생님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다. 어른 입장에선 준비성이 철저한 선생님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나 순수한 어린이 입장에선 믿음이 없는 말뿐인 기도,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선생님의 태도에 큰 배신감을 느낀 것이다. 우리가 늘 주님께 기도하지만 우리의 기도가 공허하게 허공만 울릴 뿐 쓰레기 취급을 당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신자라면 누구나 물이 포도주로 변하듯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삶이 의미로 가치로 채워지는 삶으로 변화하기를, 이런 기적이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기를 기대할 것이다. 그래서 모자라는 삶이 풍성함으로 채워지고, 기쁨이 가득한 잔칫집 같은 인생, 가정, 교회, 일터가 되기를 소망할 것이다. 우린 그 가능성을 이미 가지고 있다.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가정에, 교회에, 일터에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을 이를 현재화시키는 것인데, 부족을 느낄 때마다 주님께 나아가는 것과 끝까지 믿음을 놓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면 모자람이 풍성함으로 채워지고 기쁨이 가득한 잔칫집 같은 인생의 기적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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