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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해야 산다.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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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121회 작성일 08-07-08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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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해야 산다.Ⅱ

엡2:11~18

2008. 7/6 11:00

관계지수(Network Quotient)

21세기는 ‘know how'(어떻게 아느냐!)보다 ‘know who'(누구를 아느냐!)가 중요하다고 한다. 즉 방법보다 사람이 중요하고,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공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선 관계(공존)지수(NQ)를 높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 공존(관계)지수를 높이는 방법을 Network의 알파벳 첫 문자로 설명을 한다.

   N/ Need              상대방의 욕구나 질문에 민감하라.

   E/ Encouragement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말라. 관계를 키워가는 데는 칭찬과 격려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T/ Thank you         항상 감사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라.

   W/ Wow              사소한 것에도 감동하고 감탄하라.

   O/ OK                 무슨 일이든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하라.

   R/ Remember         관심을 가지고 상대방의 이름이나 기념일 등을 기억하라.

   K/ Kindness           늘 친절을 베풀며 살라.

이 모든 말을 소통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소통은 건강한 관계의 필수요소다. 서로 통하지 않고는 건강한 관계를 기대할 수 없고, 잘 통하면 관계의 깊이와 폭이 날로 깊어지고 넓혀진다. 그러므로 관계지수는 소통에 달려있다.


지난 주일, 하나님과 통하는 방법과 그 필요성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이 시간에는 사람과 통하는 방법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말씀드린 대로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소통의 조건을 이미 가지고 있다. 본문이 이를 확인해 준다. 본문은 그 때에이제는이란 부사를 통하여 예수님을 믿기 전과 믿은 후의 우리의 소속과 상태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11~13).


그 때에 우리는 이방인이고, 무할례당이고,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었다. 하나님은 물론 사람(유대인)과도 소통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특히 허시고’(14), 폐하셨으니’(15), 소멸하시고’(16)라는 동사들은 소통의 장애물을 제거하신 주님의 사역을 묘사한다. 이렇게 허시고, 폐하시고, 소멸하신 이유는 둘로 하나를 만들고(14),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짓기 위함이다(15). 나아가서는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도록 하기 위함이다(21).


주님께서 죄악의 담을 허셔서 하나님과 통하게 되었고(화목), 사람들과도 통하게 되었다(화평). 그렇지만 사람들과의 소통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람들과의 소통은 많은 훈련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종교적 사회적 제도적으로 잘못된 것들이 습관화 되고 문화화 되면 그것을 바꾸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종차별과 신분제도를 생각해 보자. 본문에서 주님은 이미 십자가로 이와 같은 차별들을 허무시고, 폐하시고, 소멸하셨다. 그래서 서로 형제와 자매로 차별이 없이 통할 수 있도록 하셨다. 그렇지만 이런 제도는 기독교 사회 안에서조차 근대까지도 계속되었고, 아직도 인종적 차별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이런 악습들이 습관화 되고 문화화 되었기 때문이다. 교회와 신자는 이런 장벽과 담들을 허물고, 폐하고, 소멸하여 소통의 길을 열어가야 할 사명이 있다.


건강한 소통을 위하여

1. 서로에 대한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9.11테러 이후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이슬람계 미국인 엄마가 테러가 난 며칠 후 아이를 데리고 동네 도서관을 갔다. 평소처럼 히잡을 쓰고 도서관을 들어가던 그녀는 결국 황당한 경우를 맞았다. 도서관 안내 데스크에 앉아 있던 여인이 두려움과 경계의 표정으로 옆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경비를 불러야겠어요. 테러 이후 미국에서 이슬람계 사람들이 선입견 때문에 겪은 고통의 일면이다. 미국인들에게 이슬람계 사람들은 테러리스트라고 하는 잘못된 선입견이 형성된 것이다.

 

선입견은 어떤 것을 고정된 틀에 가두고 그 틀 안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선입견은 모든 것을 막아버리고, 그 안에서 썩게 만드는 무서운 것이다. 아무튼 소통의 가장 큰 적은 선입견이다. 관계를 막고 왜곡시키는 주범이다. 선입견은 편견을 낳는다. 편견이란 어느 한쪽으로 쏠린 시각, 혹은 비뚤어진 시각이다. 그러니 선입견이 있는 한 사물이나 사건, 사람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요1:46, 9:1~2).


아울러 이 선입견은 보는 것뿐만 아니라 듣는 것에도 작용한다. 선입견을 가지면 상대방에 대하여 제대로 들을 수가 없다. 들어도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들리게 되고,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된다(막10:32~45). 그러므로 우리가 이웃과 소통하기 위해선 선입견을 극복하고 버려야 한다. 우리 눈에서 마음에서 선입견이라고 하는 들보를 빼내야 한다(마7:5). 대신 주님의 관점과 시각으로 주변을 보고, 이웃을 보아야 한다. 주님의 마음으로 이웃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선입견을 극복하고 볼 수가 있고, 들을 수가 있는 것이다. 올바로 소통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것은 말씀과 기도다. 성경은 말씀을 커다란 망치와 불로(렘23:29), 수술용 칼로(히4:12) 비유를 하고 있다. 선입견은 우리의 관계를 파괴시키는 마음속의 종양과 같은 존재다. 이것을 말씀의 칼로 도려내야 한다. 그리고 선입견은 흙 속에 파묻혀 있는 암반과 같다. 이것이 있는 한 어떤 식물도 뿌리를 내리고 자랄 수가 없다. 말씀의 망치로 그 암석을 깨뜨리고 말씀의 불로 태워야 한다. 그러므로 말씀이 선입견을 극복하는 방법이다.


또한 기도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강한 빛 때문에 눈이 어두워진 사울이 선지자 아나니아의 기도로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행9:18). 이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 지금까지 사울의 삶은 예수님을 핍박하는 생활이었다.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선입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의 눈이 어둡게 되었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그의 삶이 어둠 속에서 헤매는 삶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져 나가 다시 보게 되었다함은 비로소 선입견에서 벗어나 바로 보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일이 기도를 통해 일어났다. 리처드 포스터는, 기도할 때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생각하게 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원하게 되며,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게 된다. 기도할 때 사물을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에서 보는 법을 배운다.고 했다. 신자의 거룩한 삶의 두 바퀴인 말씀과 기도는 소통의 장애인 선입견을 극복하는 최선의 길이다.


2. 서로 공감하는 것이다.

사람들 사이의 갈등은 자기와 생각이나 취향, 관점이 다른 것을 나쁜 것, 잘못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시작된다. 


밀드레드 알드리치는 두 물체는 동시에 같은 장소를 차지할 수 없다. 따라서 두 사람은 사물을 같은 위치에서 볼 수 없으며, 보는 각도가 약간이라도 달라지면 사물이 다르게 보인다.고 했다. 사람들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같은 사물을 보고도 각기 다르게 해석을 하기 때문이다.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이유는 경험이나 관점 등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 다른 것은 당연한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이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관계는 금이 가고 힘들어진다. 인간관계에서 통하지 못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한 왕이 어떤 사람에게서 바다새를 한 마리를 선물로 받았다. 왕은 사람뿐만 아니라 새까지도 사랑하고 존중하는 사람이었다. 왕은 이 바다새를 마치 칙사를 대접하듯 그렇게 돌보았다. 영빈관으로 가져와서 송아지까지 잡은 진수성찬에 훌륭한 악사와 무희들을 불러서 흥겨운 노래와 춤을 추게 했다. 새로 즐겁게 식사를 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렇지만 바다새는 전혀 즐거워하지도 않고 음식을 먹지도 않았다. 왕의 지극한 대접에도 불구하고 새는 결국 삼일 만에 굶어죽고 말았다.


새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처럼 대접한다고 고마워하지도 즐거워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새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내 입장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도 상대방에게 전혀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이 왕처럼 상대방이 고려되지 않는 일방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일방적인 것은 관계의 독이다. 그러므로 관계에서 갈등을 줄이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선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공감이라 한다.


공감이란 그 사람의 느낌 속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자아의 울타리를 넘어가서 타인 안에서 감정의 둥지를 틀고 타인의 감정을 자신의 감정으로 느끼는 것이다. 내게 좋고 편하다고 해서 상대방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그 사람이 되어 보는 것. 그 사람의 입장과 관점에서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러면 그가 보인다. 그의 아픔과 기쁨이 보이고, 그의 상처가 보인다. 또한 들린다. 그의 탄식과 신음이 들린다. 그래서 그와 통하는 길이 보이고 열린다.


우리 예수님의 삶에서 이를 분명하게 볼 수가 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여기 체휼이란 단어. 우리 주님의 생애를 요약한 말이다. 체휼은 처지를 이해하고 가엾게 여긴다.는 뜻이다. 왜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을까? 왜 부요하신 자로서 평생 머리 둘 곳도 없이 가난한 자로 사셨을까? 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자면서 인간들에게 붙잡혀 십자가라는 극형을 받으셨을까? 그것은 가련한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우리가 당하는 일에 함께 동참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공감이다. 그러면 통하게 된다. 말이 통하고, 생각이 통하고, 뜻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게 된다. 그래서 주변과 건강하고 아름다운 소통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공감하는 것이 쉽지 않다. 체휼을 한자로 풀어보면 그것을 알 수가 있다. 체휼은 몸 체(體)에 사랑할 휼(恤)이다. 휼(恤)은 마음 심(心)에 피 혈(血)로, 피를 흘리는 마음(心+血=恤)을 뜻한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되 온 몸으로 사랑하셨는데, 피 흘리는 마음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 이로써 주님과 우리 사이에 공감이 일어났다. 누군가와 공감을 하기 위해선 온 몸으로 피를 흘리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공감할 수가 있는 것이다. 비로소 차이가 이해가 되고, 소통이 이루어진다.


현대는 '이미지메이킹'(image-making/자기관리)을 넘어 '이미지케이션'(image-cation)시대라고 한다. 이미지케이션(=image+communication)이란 자기관리와 대인관계에서 서로의 원활한 소통을 의미하는 신조어다. 자기관리를 넘어서 다른 사람과 올바른 소통을 이루어야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와 신자를 보면 우리 사회에서 image-making에 실패했다(부흥이 정체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 때문에 image-cation은 더욱 힘든 상황이다. 건강한 신앙생활은 소통에 달렸다. 위로는 주님과의 소통이고, 옆으로는 지체들과의 소통, 나아가서 세상과의 소통이다. 이 삼자가 원만하게 잘 이루어져야 건강한 신자, 건강한 신앙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와 같은 소통에 힘쓰는 신자, 교회를 지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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