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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멀리는 가지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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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291회 작성일 08-08-03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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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출8:25~32

2008. 8/3 11:00

고슴도치형 관계

해외생활, 특히 이민생활에서 상처받지 않고 그런대로 건강하게 살려면 3척 원리를 잘 지켜야 한다고 한다. 그 3척이란 ①보아도 못 본 척, ②들어도 못 들은 척, ③알아도 모르는 척이다. 그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사는 것이 상책이라는 말이다. 물론 이런 태도가 보신(保身)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자기성장과 주변에 선한 영향력이 주는 삶을 살 수는 없다.


이와 비슷한 말로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이란 말이 있다. 너무 가깝게도 하지 말고, 그렇다고 너무 멀리 하지도 말라는 뜻이다. 불(물)을 너무 가까이 하면 화상을 입기(물에 빠지기) 쉽고 그렇다고 너무 멀리하면 살 수가 없다.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사람이란 너무 가까우면 단점과 허물이 드러나게 되고, 그래서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며, 때로는 다투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매일 얼굴 부딪치면서도 안면몰수하고 모른 척하거나, 송아지가 강아지 보듯이 멀뚱멀뚱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살라는 것이다.


경영학에서도 사장과 사원 사이가 불가근 불가원이 좋다고 한다. 사장과 사원 사이가 너무 가까워지면 사장이 사원들에게 약점을 보이게 되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멀리하면 사원들이 열심히 일을 안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목회자와 신자 사이도 그래야 한다고 말한다. 목회자도 사람인지라 허물과 약점이 많다. 그런데 너무 가까우면 자연히 이런 약점과 허물이 보이게 되고, 따라서 목회자의 존경과 권위가 손상을 입고, 신자들에게 실망을 주어서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하는데 장애가 된다는 것이다.


너무 가깝지도 않고 너무 멀지도 않는 관계. 이는 소위 고슴도치형 관계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는 신앙적 가치관과는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신앙은 이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최소한 주님과의 관계, 신자들과의 관계는 이것을 넘어서야 한다.


세상은 약점이나 단점을 비난거리로 삼고, 그것을 빌미로 이용하기도 하고 무시하기도 한다. 신앙은 약점이나 단점을 기도의 제목으로 본다. 내가 돕고 섬김의 기회와 대상으로 생각한다. 장점 역시 세상은 시기와 질투의 대상으로 보고 그것을 무너뜨리려 하지만 신앙은 감사의 대상으로 본다. 약점은 기도, 장점은 감사! 이것이 신앙적 가치관이다. 무엇보다도 주님은 미온적인 태도를 기뻐하지 않는다(계3:16)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속적인 가치관을 대변하는 이와 같은 말들이 신자들에게까지 설득력이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말을 들을 때 아니라고 강하게 부정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저 고개가 끄덕여 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말뚝은 세상에 박아놓고 교회만 나가라.

이와 비슷한 말을 오늘 본문에 나온 애굽왕 바로의 입을 통해 듣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한지 430년이 되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유롭게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긴 고통의 세월이었다. 모세는 바로에게 하나님을 자유롭게 섬기도록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땅으로 보내달라고 요구했으나 바로가 거절한다. 바로는 생활이 편하니까 이런 헛된 생각을 갖는다며 더 혹독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렸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로가 항복할 때까지 모세를 통해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린다(7:14~12:36). 본문은 네 번째 파리재앙이 내려졌을 때 일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거하는 고센 땅을 제외한 애굽 전역에 파리 떼를 보내서 큰 피해를 주었다. 70인 역()에 의하면 이는 개파리(dog-fly)로 짐승이나 사람을 쏠 뿐만 아니라 병까지 옮기는 특종의 파리이다. 바로는 이 파리 떼로 인하여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모세를 불러서 타협안을 제시한다. 바로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희생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28).


신자에게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 출애굽의 목적도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자유보다 종교의 자유였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8:1). 이와 같은 모세의 요구에 바로가 멋진 타협안을 제시한 것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라. 단 조건이 있다.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는 것이다. 25절에서는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고 하였다. 한편으로 모세의 요구를 들어주는 듯 하면서도 여전히 이스라엘을 자신의 통치권아래 두고자 하는 바로의 간교한 계산을 보여준다. 네 가치관, 정신, 삶은 세상에 말뚝 박아놓고 교회만 나가라는 것이다. 바로가 모세에게 제안했던 가치관이나 삶에 변화가 없는 형식적인 신앙생활. 신자에 대한 사단의 전략이고 바램이다.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너무 깊이는 들어가지 말라. 적당한 선에서 해라. 세상 사람들이 늘 하는 말이다. 이 땅의 바로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광야에 가기는 가더라도 너무 멀리는 가지 말고 멀지 않은 곳에서 적당히 제사를 드리고 오라는 바로의 말처럼, 예수를 믿기는 믿어도 세상과 너무 동떨어진 채 열심부리지 말고, 너무 거리를 두지 말고, 적당히 믿으면서 세상도 적당히 즐기라는 말이다. 신앙을 단순한 소일거리, 취미생활을 전락시키고자 하는 계획이다.


예수를 믿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예수를 믿어도 적당히 믿으라는 말이다. 기도를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기도를 해도 적당히 하라는 말이다. 봉사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봉사를 해도 적당히 하라는 말이다. 성경을 읽지 말라는 말도 아니다. 성경을 읽어도 적당히 읽으라는 말이다. 그저 적당히 폼만 잡으라는 말이다. 오늘날 이 땅의 신자들에게 사탄이 유혹하는 말이다. 많은 신자들이 이러한 미끼에 걸려들고 있다. 마치 멀리 가면 안되는 것처럼, 마치 신앙에 깊이 빠지면 잘못된 것처럼, 믿음생활을 열심히 하면 마치 광신자인 것처럼, 그렇게 한마디로 매도하고 웃음거리로 만들려하는 것이 세상이다. 이것이 바로의 작전이고 사단의 전략이다. 신자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애굽 가까이에서, 가까운 광야에서 적당히 폼만 잡는 사람들이 아니다. 애굽을 떠나, 멀리 떠나 광야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다.


신앙은 존재가 바뀌는 것이다.

신앙은 형식의 문제가 아니다. 폼만 잡는 것이 아니다. 본질의 문제이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 인생의 주인을 바꾸는 일이다. 주인이 바뀌면 내 마음은 물론 내 존재도 바뀌게 된다. 삶의 중심이 바뀌게 된다. 그래서 이 믿는다는 것을 존재의 변화라고 표현한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처럼 말이다(요2:1~11).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은 물이 얼이 되거나 수증기로 되는 단순한 물리적인 변화가 아니라 분자식이 바뀐 화학적 변화(H2O→C2H5OH), 즉 본질의 변화다. 빛깔이 바뀌고, 맛이 바뀌고, 향기가 바뀌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것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나쁜 사람이 좋은 사람, 불량한 사람이 착한 사람으로 변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되는 영적인 거대한 화학작용이다. 존재의 변화이다. 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고후5:17).


신앙은 떠나는 것이다.

이런 변화에는 반드시 전제조건이 있다. 그것은 떠나는 것이다. 이것을 영적 출애굽이라 한다. 죄로부터 떠나고, 악한 습관, 잘못된 태도, 세속적인 가치관,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태도와 생활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이 영적 출애굽이 없이는 존재의 변화도 없다. 그런데 바로의 타협안을 보면, 어디서든 예배를 드리면 그만이지 꼭 멀리 갈 필요가 있느냐(떠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25,28). 이는 신자의 영적 출애굽을 부정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떠나지 않으면 그들은 여전히 자신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고, 그들의 섬김은 형식에 지나지 않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포구에 묶인 배는 넓은 바다로 나아갈 수가 없다. 세상에 박힌 말뚝을 뽑지 못하면 평생 그 주변을 맴돌며 살아갈 뿐이다. 교회를 십 수 년을 다녔지만 삶 속에서 아무런 신앙적인 변화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여전히 세속적인 가치관을 벗어나지 못한 세상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 이유는 영적 출애굽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게 있어서도 아직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깊이 살펴볼 일이다!


애굽을 떠나지 못한 사람, 세상의 가치를 버리지 못한 사람. 그는 종교인은 될는지 모르나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은 아니다. 잎만 무성한 나무처럼 종교적인 행위는 요란해도 신앙의 열매는 맺을 수가 없다. 그래서 모세는 바로의 이와 같은 타협에 대하여 강하게 거부한다. 모세가 이르되 그리함은 불가(不可)하니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것은 애굽 사람이 싫어하는 바이온즉 우리가 만일 애굽 사람의 목전에서 제사를 드리면 그들이 그것을 미워하여 우리를 돌로 치지 아니하리이까.(26).


신앙생활에 타협은 없으나 설득은 필요하다. 모세의 이 답변을 보면 타협에 대한 단호한 거절과 함께 거절한 내용에 대한 차분한 설득이 뒤따르고 있다. 많은 신자들이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강한 거절만 표현하고, 이에 합리적이고 차분한 설득이 따르지 못함을 본다. 때문에 신자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사람들이란 인상을 주고 있다. 애굽 사람은 짐승을 섬기는 사람이고, 우리는 짐승을 잡아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다. 우리가 짐승을 잡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 애굽 사람들이 가만히 있겠느냐는 것이다. 즉 당신과 우리는 가치관이 다르고, 생활방식과 문화와 종교가 다르니 서로 함께 할 수가 없다는 것. 그러니 애굽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적당한 선에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하나님을 믿으라, 주의 일을 하라는 사탄의 속삭임을 강하게 거부해야 한다. 신앙생활에 적당히는 없다. 신앙생활은 하는 것과는 거리 멀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다. 신앙에서 주님과의 적당한 거리는 곧 실패를 의미한다. 그게 사단의 노림수고, 사단의 거점을 확보해 주는 것이다. 신앙생활이란 세상의 상징, 사단의 상징인 애굽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그래서 주님과의 간격을 좁히는 것이다. 모쪼록 우리 모두 날마다 영적 출애굽을 하여 세속적인 가치, 습관, 생각, 어둠의 생활로부터 점점 멀어지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빛된 생활, 거룩한 습관, 주님 중심의 신앙적 가치들을 붙잡고 척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님을 가까이에서 섬기는 영광에 참여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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