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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새롭게 (06-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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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5,610회 작성일 06-03-14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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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새롭게  
엡3:14~19  

조선을 창건한 태조 이성계와 이를 도왔던 무학대사 간의 일화입니다. 왕이 어느 날 무학과 대화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스님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돼지같이 생겼네요." 물론 농담입니다. 그런데 이 스님은 왕을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임금님은 부처님을 닮았습니다." 그러자 왕이 말했습니다. “비록 우리가 임금과 신하사이이지만 나는 그대에게 돼지 같다고 했는데, 그대는 왜 나를 부처님 같다고 하는 것이요." 이때에 이 무학이 한마디 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마음 생긴 대로 남의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나는 내 마음이 부처님 같으니까, 다 부처님으로 보이고. 임금님은 마음이 돼지 같으니까, 나를 돼지로 보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결국 왕이 무학에게 지고 말았다는 이야깁니다.

우리는 자기 마음 생긴 대로 생각합니다. 자기 마음 생긴 대로 남을 보고, 자기 마음 생긴 대로 행동도 합니다. 마음에 없으면 보아도 보지 못합니다. 들어도 들리는 것이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이렇게 다 같이 앉아서 같은 설교를 듣고 있지만 여러분의 마음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들릴 것입니다. 이렇게 듣기도 하고, 저렇게 듣기도 합니다. 이렇게 깨닫기도 하고, 정반대로 깨닫기도 합니다. 결국 내 마음 생긴 대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마음을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형제와 이웃을 사랑해야 할 줄 알면서도 만나면 미워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용서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용서를 못합니다. 정직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번번이 거짓말을 합니다. 부지런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오늘도 여전히 게으름을 피웁니다. 봉사하며 살아야겠다고 하면서도 어느 사이에 섬김을 받으려는 마음이 앞서고, 생각하면 감사해야할 일이 너무 많지요. 국가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정말 따져서 생각하면 너무 감사합니다. 그래서 이제 범사에 감사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느 사이에 한숨이 나오고 원망소리가 나옵니다. 걱정근심에서 헤어나질 못합니다. 왜 이러는 것입니까?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언은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 보다 낫다.”(16:32)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느 용사보다 더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건강을 잃어버리게 하기도 하고, 마음을 병들게 하는 것이 사회학적으로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사회적으로 소외를 당할 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고, 많은 사람에게 내가 필요치 않다고 느낄 때, 고독을 느끼면서 그 마음이 병들게 됩니다.  

둘째는 삶의 중요한 변화에 부딪힐 때입니다. 바로 배우자가 죽었다든가 자녀가 죽었다든가 갑자기 실직을 했다든가 큰 사건에 부딪힐 때, 그만 감당을 못하고 마음의 병을 갖게 됩니다.

셋째는 자신감이 없고 자기만족이 없을 때입니다, 매사에 자신이 없고 무슨 일을 해도 만족이 없습니다. 보람을 느끼지 못합니다. 자신감이 사라지면 두려움이 엄습하게 되고, 만족이 없으면 의욕을 상실하게 됩니다. 의욕을 상실하면 점점 마음이 어두워지고, 이것이 가속화되면서 마음이 무너져 내려갑니다.

그리고 넷째는 이것이 염세주의로 마음에 자리를 잡습니다. 하나의 잘못된 세계관, 가치관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 염세주의(비관주의)가 내 마음에 자리잡고 나면 만사가 어둡고, 괴롭고, 짜증이 납니다. 도대체가 살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결국 이것은 정신적인 자살입니다. 이미 마음이 죽은 것입니다.

요즈음 건강을 위해 술을 먹지 마라, 담배를 피우지 마라, 이런 얘기들 많이 합니다. 심지어는 담배 피우는 사람들을 사회적으로 왕따를 시키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술 먹고, 담배 피운 사람 많습니다. 이들도 술/담배가 몸에 해롭다는 것 다 압니다. 알면서도 끊지를 않습니다. 한마디로 괴로우니까 죽을 테면 죽어라 하고 피우고 마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폭탄주를 마시는 사람이 살자는 것이겠습니까? 오늘 밤 죽어라 하고 마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폭탄을 마시고 살기를 바라겠어요. 죽기를 각오한 것이지요. 그런데 불행하게도 다음날 아침에 살아나니까 문제입니다. 이게 살자는 것 아닙니다. 왜 이렇습니까? 정신적으로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정신적으로 죽었기에 죽음을 위한 행동을 과감하게 거침없이 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조금 더 발전하면 내가 살고 싶지 않으니 남의 생명도 해하는 것입니다. 너도 그만 살아라 그 말입니다. 모두가 마음이 병들고 정신이 병들어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그렇다면 이같이 무너진 마음, 찢기고 상한 마음을 누가, 무엇으로 치료하고 회복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말씀이 바로 그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기도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마음을 바로 다스리고, 치료하고 회복하여 새롭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1. 마음을 새롭게 하는 길은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여 사는 것입니다.(17)
대학생 선교단체 사람들에 의하면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자연인으로,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전도 대상자들입니다. 두 번째는 육에 속한 신자입니다. 이 사람은 주님을 영접하기 했으나 여전히 자신이 자기 삶의 주인인 사람입니다. 모양만 신자이지 불신자와 다름이 없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영적인 신자입니다. 자기의 마음의 왕좌를 주님께 내어 드린 사람입니다. 바람직한 신자의 모습입니다.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산 사람입니다. 본문은 이 세 번째에 해당됩니다. 새번역 성경을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속에 머물러 계시게(永住) 해주시기를 빕니다.”(17) 이는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여 주님이 나를 다스리시도록 내 마음을 내어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주인으로 왕으로 모실 때, 우리의 삶에서 주님의 통치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새롭게 하는 길은 주님을 왕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왕좌를 주님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마음의 주인이 바뀐면 마음이 바뀌고 삶도 바뀝니다.

내 마음 나도 모릅니다. 오직 주님만이 내 마음을 아십니다. 내 마음이지만 내 마음대로 못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다스릴 수가 있습니다. 주님이 내 마음을 다스리셔야 모든 불행의 고리들이 다 끊어집니다. 옛 사람의 더러움으로부터 자유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주님을 내 마음에 영접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내 마음에 영주(永住)하셔서 다스리시도록, 주님이 내 마음의 주인이 되시도록 내 마음을 내어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내 마음이 치료되고 회복됩니다.

2. 마음을 새롭게 하는 길은 오직 성령으로,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16)
‘네 속사람을 성령의 능력으로 겅건하게 하옵시며' 이 말은 의지 이전의 말입니다. 마음은 생각이나 의지로 다스릴 수도 치료하고 회복할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 성령의 능력으로만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내 마음에 오실 때, 내가 이 모든 악으로부터 자유하게 되고, 내 심령이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령의 능력으로‘란 말은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의 중요한 행동원리입니다. 신자는 자기 지혜, 자기 능력, 자기 경험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사는 사람만이 자신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마귀를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들을 풍성하게 맺을 수 있습니다(갈5:22~23). 바로 이 행동원리에 따라 살아야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린 성경에서 베드로를 통해 이를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성령에 충만하게 될 때, 그의 어두운 과거, 그의 나약함, 다 이기고 오로지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은혜에 충만하여 위대한 역사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완덕에의 길'이라고 하는 요한 타울러의 책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우리의 내적 생명을 고갈시키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가 세속적 교만이라고 말합니다. 그 다음은 감각적 만족이라고 합니다. 감각적 만족에는 반드시 죄책이 따라옵니다. 육체를 따라간 일에는 반드시 후회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분노와 의심과 성급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런 것들을 무엇으로 물리칠 수 있습니까? 내가 이길 수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내가 겸손할 수 있습니까? 내가 스스로 내 마음을 비울 수 있습니까? 스스로 감각적 만족을 끊고, 분노와 의심과 성급함을 다스릴 수 있습니까?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주의 영이 내게 임할 때, 내 마음이 새롭게 됩니다. 새롭게 된 마음만이 이 어두운 마음을 물리치고 밝은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이렇게 외칩시다. 성령이여 내 마음에 오셔서 내 마음을 다스려주시고 치료하시고 회복시켜 주옵소서!

3. 마음을 새롭게 하는 길은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17~18)
데일 카네기는 인간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방관자입니다. 인간의 대부분이 방관자인데, 방관자이면서도 막연한 두려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공해도 두렵고, 실패해도 두렵습니다. 그래서 비겁한 방관자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둘째는 패배자입니다. 철저하게 패배의식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항상 실패한 의식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가진 것은 생각하지 않고 못 가진 것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은혜의식으로 사는 승리자입니다. 이 사람은 항상 승리의식, 행복의식으로 삽니다. 오늘 실패해도 이것은 다음에 성공하기 위한 과정으로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스케줄 속에 이루어진다고 믿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여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선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은혜의식으로 사는 사람은 모든 것을 사랑으로, 감사로 받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응답은 감사요, 사랑의 결과는 선함입니다. 사랑받는 사람의 마음은 선해집니다.

사랑받는 사람에겐 세상에 두 종류의 사람밖에 없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불쌍히 여기는 사람, 그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혹 사람들의 허물이 보입니까? 남 실수가 보입니까? 못마땅한 것이 보입니까? 아직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 죄를 구속하신 주님의 엄청난 사랑을 깊이 체험한 사람에겐 두 가지밖에 안 보입니다. 잘못된 사람을 보면 그저 불쌍하게만 보입니다. 이것도 불쌍하고, 저것도 불쌍합니다. 그냥 불쌍하게만 보일 뿐입니다. 그 사람이 나쁘게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장점만 보게 됩니다. 단점은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런 마음을 소유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본문 17~18절이 그 해답입니다.

어떤 청년이 교통사고로 안구가 튀어 나와 실명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술을 받게 될 때 의사가 말했습니다. "수술은 하겠지만 안구가 다 빠져나와서 눈을 볼 수는 없을 걸세." 이 청년은 소리소리 질렀습니다. “장님으로 사느니 죽겠다"는 것입니다. 이대로 죽도록 내버려 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사는 “이 사람아, 생명은 소중한 것이야. 이 어려움을 극복해야지." 그리고 강제로 붙들고 마취를 하고 수술을 했습니다. 수술 며칠 후에 붕대를 풀게 될 때 의사가 말했습니다. “축하하네. 자네는 분명히 실명을 했지만 자네를 위해서 안구를 기증해 주는 분이 있어서 눈 하나는 볼 수 있을 것 같네." 이 청년이 또 소리 지릅니다. 외눈으로 살기보다 죽는 게 났다는 것입니다. 의사는 크게 책망을 했습니다. “자네를 위해서 멀쩡한 눈을 빼준 고마운 분이 있는데, 그 무슨 망령된 발악인가?" 그러면서 붕대를 풀어주었습니다. 뿌옇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점점 밝게 환하게 보이는데 눈앞에 서있는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눈 하나가 없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청년은 여기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저는 평생 절대로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오로지 감사한 이 감격으로 살아가겠습니다. 이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어머니를 끌어 앉고 통곡을 했습니다. 이 청년처럼 사랑을 알게 될 때, 그 사랑을 깨닫게 될 때,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마음속에 감사가 넘치게 되고, 감격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치료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새로운 헌신과 결단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영접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속사람이 강력한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으로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마음은 물질로도, 환경으로도 되지 않습니다. 환경을 바꾸고 이사를 가도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풍성한 사랑 안에서 마음은 깨끗해 질 수 있고 굳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 넘치는 사랑을 깨닫게 될 때, 그 사랑으로 충만하게 될 때, 우리 마음이 새롭게 되고, 우리 앞에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상처받은 내 마음, 비뚤어진 내 마음, 더럽고 잘못된 사상으로 오염된 내 마음. 이와 같은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을 내 마음에 모시고 살면 주님이 내 마음을 다스려 주십니다. 주의 성령을 따라 주님 사랑 안에서 살면 새롭게 됩니다. 치료되고 회복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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