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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이 든 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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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965회 작성일 08-08-10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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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이 든 신자

요4:27~35

2008. 8/10 11:00

철없는 자식

글을 배우지 못한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자신의 인생을 비관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소매치기를 하다가 결국 소년원에 갇혔다. 소년은 단 한번도 면회를 오지 않는 어머니를 원망하고, 자신을 가둔 사회를 저주하였다. 이런 소년을 지켜보던 한 교도관이 어느 날 새끼 참새 한 마리를 선물하며 말했다.

네가 이 새끼 참새를 어른 참새로 키워내면 네가 석방되도록 힘써 보겠다.

하루라도 빨리 나갈 욕심에 소년은 쾌히 승낙을 했지만, 참새를 키우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감방 안에서 다른 사람들의 장난을 막아 주어야했고, 춥지 않도록 감싸주어야 했으며, 때론 먹이도 줘야했다. 그런데 참새는 조금 자란 뒤부터 자꾸 감방의 창살 틈으로 날아가려했다. 날아가지 못하도록 실로 다리를 묶었더니 참새는 그 실을 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소년이 먹이를 주고 달래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지친 소년이 교도관에게 참새를 그만 풀어 주어야겠다고 했다.

저는 계속 키우고 싶은데 참새가 제 마음을 몰라주는군요.

그러자 교도관이 웃으며 말했다.

그게 바로 네 어머니의 마음일거야. 다 자라지도 않은 너를 붙잡고 싶지만 너는 줄을 끊고 날아가 버린 거지. 그래서 네가 지금 여기 있는 거야.

소년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그는 계속 말했다.

네 어머니는 지금도 너를 사랑하고 계신다. 네가 새끼 참새를 생각하는 것보다 수백 배 말이다. 어머니는 너를 위해서 그동안 글씨를 배우신 모양이다. 네 석방을 간청하는 탄원서를 손수 쓰셨더구나.

비로소 소년은 자신을 향한 어머니의 마음, 사랑, 수고를 알게 되었고, 어머니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은 삶을 살게 되었다.


철이 든다는 것

흔히 철들다. 혹은 철나다.는 말을 사용하는데, 사리를 분별하여 판단할 수 있는 힘을 철이라고 한다. 이를 한자어로 표현하면 성숙(成熟)이다. 그러므로 철이 들었다는 것은 사리를 분별하여 판단할 수 있다는 뜻이다. 자식도 철없는 자식이 있고, 철든 자식이 있다. 철없는 자식은 늘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불안하게 하고 힘들게 하지만 철든 자식은 부모의 마음을 시원케 한다. 철든 자식이란 부모의 마음과 뜻, 그 심정을 이해하는 자식이다. 신자도 철든 신자가 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그 심정을 이해하고 아는 사람이다. 성경에서 철든 신자의 모델을 찾으라면 단연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의 삶은 온통 하나님의 마음과 뜻, 관심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이 땅에 오셨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사셨고, 그 뜻을 위해 죽으셨다. 본문에서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당신의 숨겨진 양식이라.(32,34)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푯대(모델)로 삼아 신앙을 경주하라고 말씀한다(히12:1~2).


우리 주님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뜻을 받들어 섬기는 것이 모든 신자의 간절한 바람일 것이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나도 좋아하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나도 싫어하며,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나도 사랑하고,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것을 나도 바라보고,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내 마음을 두는 것. 철난 신자의 태도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

그러기 위해선 하나님의 마음과 뜻, 하나님의 관심을 알아야한다. 그것은 주님의 마음과 뜻, 관심을 알면 알 수가 있다. 본문에 우리 주님의 마음, 관심이 잘 나타나 있다. 주님의 마음과 관심, 뜻은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일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이루고자 하셨던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잃어버린 영혼이다. 영혼에 대한 사랑, 관심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고 뜻이다.


본문은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라는 유명한 사건이다. 이 사건 속에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주님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잃은 한 영혼 때문에 균형감각을 잃어버리신 주님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1. 지역의 장벽(민족적 편견과 차별)을 넘어선 예수님

수 백 년 동안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앙숙(怏宿)으로 지내왔다. 특히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이방인보다 더 못하게 취급을 하였고, 그들과 상종하는 것조차 싫어했다(9). 유대인은 예루살렘에서 갈릴리(혹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로 갈 때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가까운 길을 택하지 않고 요단 골짜기의 먼 길을 택했다. 사마리아인을 만나지 않기 위해서다. 사마리아는 원래 북왕조 이스라엘의 수도였다. 그런데 주전 722년 앗수르에게 망했다. 앗수르는 융화정책으로 다른 민족들을 사마리아로 이주하게 하였고, 자연히 민족들 간에 통혼이 이루어지면서 사마리아인은 이스라엘 혈통의 순수성을 상실하였다. 그래서 순수 이스라엘을 자처하는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이방인과 같이 불결하게 생각하여 상종을 금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혈통의 문제는 차츰 종교적 관행도(사마리아인은 그리심산에서 예배드림), 사용하는 성경도(사마리아인은 모세 5경만 사용) 다르게 되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가시면서 이 사마리아를 통행하셨다(3,4). 성경은 예수님의 이와 같은 행동이 단순히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분명한 이유가 있는 의도적인 행위임을 강조한다(4/영어성경에선 당위성을 뜻하는 must라는 조동사를 사용). 그렇다면 주님께서 지역적인 편견, 민족적인 차별을 넘어 이와 같은 행동을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구원받아야 할 한 영혼 때문이다. 바로 그 영혼을 찾아 자기 민족이 금한 지역, 금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비난을 무릅쓰고 가신 것이다.


2. 사회적 관행의 장벽(남녀차별)을 넘어선 예수님.

사마리아에 도착하신 예수님이 만나신 사람은 아주 뜻밖의 사람이었다. 본문에 나온 대로 그 사람은 사마리아여인이었다(7). 당시엔 유대인끼리도 남녀가 유별했다(성전구조 참조). 엄격한 유대인은 남들이 보는 앞에서 자기 아내와 이야기하는 것도 주저할 만큼 여성에 대한 경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주님은 그곳에서 여인을 만난 것이다. 그것도 그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7/“물을 좀 달라.”는 헬라어로 슁크라오마이인데, ‘그릇을 함께 사용한다.’는 뜻이다. 이는 상호간에 만나 교제를 나눈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이렇게 주님이 먼저 교제를 청했던 이 여인은 사마리아 지역에서 소문난 사람이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는데, 그들과 헤어지고 지금은 혼인신고도 하지 않는 남자와 살고 있었다(17). 이런 자신의 행실 때문에 마을 사람들과 만나기를 꺼려해서 사람들이 낮잠을 즐기는 낮 시간(12시)에 물을 길러온 한심한 여인이었다(6~7).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 지역적인 장벽을 넘어 하루하고 반나절을 걸어서 이곳으로 온 것이다. 영혼의 가치는 그것이 유대인이 경멸하는 사마리아인의 영혼이든 남성들이 무시하는 여성들의 영혼이든 똑같은 가치를 가진 소중한 것이고, 그 영혼을 구하는 일에는 그 어떤 것도 장애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3. 상식의 장벽(환경)을 넘어선 예수님

이스라엘의 기후는 비가 적고 고온 건조하고, 낮과 밤의 일교차가 심하다. 특히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은 근처의 사해와 아라바 광야의 영향으로 더욱 심하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한낮에는 활동을 하지 않고 주로 낮잠을 잔다. 활동을 하다가 더위 때문에 자칫 사고를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더위(환경의 장벽)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행을 하셨다. 이는 목숨을 건 아주 위험한 여행이었다. 본문에 지치고 피곤한 주님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6). 이 여행이 얼마나 힘들었는가를 엿 볼 수가 있다. 이를 통해 주님은 우리에게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목숨을 걸만큼 소중한 일임을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목숨을 건 무리한 여행을 하시고, 민족적으로 금하고 있는 지역을 통과하면서 금하고 있는 사람을 만났을까? 즉 이렇게 주님으로 하여금 지역의 장벽, 사회관행의 장벽, 상식의 장벽을 넘어서게 한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잃은 영혼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고, 관심이고, 마음이며, 실천해야 할 하나님의 뜻이다. 앞에서도 인용했지만 주님은 이 영혼구원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마저도 소멸시키는 나의 강렬한 욕망(34)이라고 하셨다.


빌 하이벨스(미, 윌로우크릭교회 담임목사)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나는 예배와 교육, 선교와 친교, 봉사가 균형 잡힌 교회가 건강한 교회인 줄 알았다. 그런데 성경에서 잃은 영혼들 때문에 균형감각을 잃어버리시는 하나님을 발견하였다. 99마리의 울안에 있는 양보다 울 밖에 있는 한 마리 양 때문에 균형감각을 잃어버리시는 하나님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나는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임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 잃어버린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 철난 신자(건강한 신자), 철든 교회(건강한 교회) 모습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이고 뜻이다. 


우리 모두 우리 주님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뜻을 받들어 섬기는 철든 신자가 되기를 간절한 바란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나도 좋아하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나도 싫어하며,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나도 사랑하고,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것을 나도 바라보고,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내 마음을 두는 신자가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소원하시고 주님께서 민족의 장벽, 관행의 장벽, 상식의 장벽을 넘어 찾아다니셨던 잃어버린 영혼에 뜨거운 관심과 마음을 갖자.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철든 신자, 교회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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