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늦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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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544회 작성일 08-08-25 10:33본문
더 늦기 전에
왕하7:3~10
2008. 8/24 11:00
외면당하는 복음
많은 사람이 모여 공연을 보고 있는 어느 극장에 불이 났다. 그때 한 광대가 나와서 침착하게 이 상황을 알렸다. ‘여러분, 이 극장에 지금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질서를 지키면서 빨리 나가 주십시오.’ 그런데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기는커녕 이 말을 광대의 농담으로 여기고 손뼉을 치면서 웃었다. 다시 광대가 ‘아니 여러분, 정말 이 극장에 불이 났으니 빨리 나가셔야 합니다.’라고 심각하게 말했으나 광대의 심각한 표정과 말에 사람들은 더 크게 웃을 뿐이었다. 결국 이 광대의 말을 농담으로만 듣고 화재현장을 피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불에 타 죽었다.
이는 키엘케고르라는 철학자의 당시 교회가 직면한 현실과 교회와 신앙에 대한 그 시대 사람들의 태도를 보여주는 우화이다. 광대처럼 웃음거리로 전락한 교회의 모습, 그래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교회와 신자의 모습, 그리고 목숨과 관련된 심각한 문제들(구원, 영생, 생명, 천국, 심판 등)에 대하여 전혀 진지함이 없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 교회나 신자들, 그리고 현대인들에게서 더욱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교회와 신자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농담처럼 여기고 외면하는 생명의 복음을 외쳐야 하는가? 본문은 여기에 대한 좋은 응답이다.
네 사람의 나병환자
본문에는 특별한 네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지금으로부터 2,850여 년 전쯤에 북왕국 이스라엘에 전쟁이 일어났다. 윗 쪽에 있던 아람 나라가 쳐들어온 것이다. 이들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에워쌌다. 오래 포위되어 있다보니 성안에는 양식이 다 떨어졌다. 그리하여 심지어 사람이 자기 어린 자식을 잡아먹는 끔찍한 일이 일어나기까지 했다. 이 때 사마리아 성문어귀에 나병환자 네 사람이 있었다. 옛 이스라엘 사회에서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은 집과 동네에서 쫓겨나 따로 살아야했다(레13:45-46). 이 네 사람은 적군이 쳐들어와 성을 에워싸고 있는데도 성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문어귀에 자리 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딱한 모습이다. 국가적인 위기순간에도 이들은 동포들에게서 버림받은 것이다. 앞에는 적군이요 뒤에는 자신들을 받아주지 않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 네 사람은 그야말로 갈 데가 없었다.
마침내 이들은 서로 의논했다(3~4).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무슨 짓이라도 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성안에는 들어가기도 힘들지만, 들어가 본들 누가 우리를 상대해 주겠는가? 성한 사람들도 굶주리는 판에 우리 같이 몹쓸 병에 걸린 사람에게 누가 먹을 것을 주겠는가? 그러니 차라리 적군에게 항복해 버리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어쩌면 적들이 우리를 살려주지 않을까? 아니 우리를 죽일 테면 죽이라고 하지, 뭐. 우린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지 않은가?”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결심한 것이다. 죽더라도 무엇인가 시도나 해보고 죽자는 생각이다. 기적은 가만히 있는 사람에겐 일어나지 않는다. 기적은 결단하여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이 네 사람은 적군에게 항복하기로 뜻을 모으고 해질 무렵에 적진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적진이 텅텅 비어 있었다. 하나님이 적군들의 귀에 엄청난 군대가 다가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적군들은 이스라엘 왕이 요청한 지원부대가 온 줄로 착각하여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다 달아나 버렸다. 이 네 사람은 온 진지를 휘젓고 다니면서 적들이 남겨놓은 음식을 찾아 우선 굶주린 배를 채웠다. 다음으로 금과 은을 비롯하여 값진 옷을 보는 대로 모아 챙겼다. 한참 신나게 물건들을 챙기던 이들은 다시 의논했다(9). “우리가 이렇게 하면 안 되지, 적군이 물러간 이 날은 정말 좋은 소식이 있는 날이 아닌가? 이 소식을 우리만 알고 이 밤을 그냥 지낸다면, 우리에게 천벌이 내리겠지. 지금이라도 얼른 성에 들어가 이 좋은 소식을 알려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마음먹은 이 네 사람은 사마리아 성으로 향하게 된다.
하나님의 섭리
본문에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섭리요, 다른 하나는 복음의 성격과 우리의 사명이다. 본문은 우선 네 명의 나환자들을 통하여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불러 크게 쓰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한다. 자기 한 몸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구원의 현장을 가장 먼저 보게 하셨다. 하나님은 보잘 것 없는 사람, 약한 사람에게 먼저 구원의 은혜를 맛보는 영광을 베푸셨다. 특히 이들의 작은 결단(3~4)이 가장 먼저 이런 영광을 경험하는 통로가 되었다. 이들은 오늘날 세상이 우습게 여기는 신자와 교회의 그림자이다. 하나님은 보잘 것 없는 교회에 당신의 비밀인 생명의 복음을 맡기셨고, 우리 신자들로 하여금 그것을 먼저 경험하게 하신 것이다.
본문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의 태도이다(9~10). 복음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것을 반드시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복음의 성격과 우리의 사명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복음의 성격
1. 복음은 ‘아름다운 소식’이다.
본문에 나오는 표현인 ‘아름다운 소식’을 신약의 표현으로 바꾸면 바로 ‘복음’이 된다. ‘복음’을 뜻하는 신약성경 헬라어 낱말의 배경에는, 본문에서 ‘아름다운 소식’이라고 옮긴 구약성경 히브리어 낱말이 있다. 신약에서는 영원히 죽을 죄인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이 된다는 소식을 복음이라고 한다. 즉 예수님이 복음이다. 이와는 달리, 본문에서 말하는 ‘아름다운 소식’은 적군에 에워싸여 망하기 직전에 있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그 위기에서 벗어난 사건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복음은 영/육간의 모든 문제를 포함한다. 참 복음이신 예수님을 믿으면 영혼은 물론 육적인 구원도 경험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요한3서2절).
세상에 아름다운 소식, 좋은 소식이 많이 있다. 지난 올림픽기간 동안 우리 선수들의 선전(善戰)소식은 답답한 우리 현실에 시원한 냉수와 같은 아름다운 소식들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들은 청량음료처럼 잠시 동안의 갈증해소를 줄 뿐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기쁨, 영원한 소망, 영원한 즐거움을 주시는 참 복음이시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38)고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것은 동시에 우리 신자와 교회가 전해야 할 복음이 무엇인가를 강조한다.
2. 복음은 ‘즉시’ 전해야 한다.
9절에 시간을 뜻하는 단어가 두 개 나온다. ‘오늘’(this day)이라는 단어와 ‘이제’(now)라는 단어다. 오늘은 복음(신앙)의 현재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하루하루가 늘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오늘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한 번의 만남과 경험에 만족하지 않고 매일 새롭게 만나고 새롭게 경험해야 한다. 이것이 능력있는 신앙생활의 비결이다. 이런 만남과 경험에는 “이제(지금) 떠나 왕국에 가서 고하자.”라는 결단이 있어야한다. 복음을 경험한 사람은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야 하는데, 그것은 즉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는 복음의 즉시성을 강조한다.
지난 20일 서울 어느 성인나이트클럽의 화재로 소중한 아들이요, 아버지요, 남편이었던 3명의 소방관들이 순직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한다는 소방관의 사명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화염 속으로 뛰어들었다가 이런 참변을 당한 것이다. 복음 전도자 무디는 복음의 즉시성을 화재에 비유를 했다. 화염 속에서 있는 사람들을 구조하는데 신속함이 최선인 것처럼 복음전파도 미루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 역시 복음의 즉시성을 강조한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4:1~2).
3. 복음은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다.
9절에서,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라고 이 네 사람은 말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앞에서 말한 대로 복음의 즉시성이요, 다른 하나는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를 당할 것이라는 복음의 긴급성과 중요성에 대한 강조이다.
저는 여기 이름도 없는 이 네 사람을 통해 큰 감동을 받았다. 이들은 육체적으로는 병이 들어 험악하게 망가졌어도 마음과 신앙은 참으로 건강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이 횡재 앞에서 자신들을 성밖으로 내쳤던 사람들의 고통을 생각하고 있다. 쉽지 않는 일이다. 그동안 자신들이 당한 상처와 고통을 생각하면 되갚아주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 모든 음식물에 모래를 뿌리고 물건들은 모아서 불태워버리고 다른 나라로 도망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횡재를 분풀이로 사용하지 않고 은혜로 선용하였다. 그것은 이 횡재가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로 기억하였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로 기억할 때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자 하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법이다. 때문에 이런 고백이 가능했던 것이다. 반면 자기가 얻은 것들을 자신의 수고에 기초하면 나눌 수가 없다. ‘내가 어떻게 모은 것인데, 내가 어떻게 얻은 것인데, 내가 어떻게 이룬 것인데......’하면서 움켜쥐게 된다.
종이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 것처럼,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의 명령인 복음 전파에 대한 불순종은 하나님의 벌을 면할 수 없다는 생각은 복음전파에 헌신했던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졌던 공통점이다. 평생을 이런 마음으로 복음전파에 전력했던 사람이 있다. 사도 바울이다. 바울은 복음전파를 부득불 해야 할 일이요, 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 고백한다(고전9:16). 그래서 바울에게는 모든 곳이 복음을 전한 곳이었고, 모든 기회를 복음전파에 선용하였다. 이 기쁜 소식,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접하고도 잠잠하면 화가 있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사명감이다.
그래도 전해야 한다.
왜 우리는 교회와 신자들이 광대처럼 취급당하는 현실에서, 생명의 복음을 농담처럼 여기면서 외면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 네 명의 나환자와 같이 보잘 것 없는 우리가 먼저 복음을 경험했기 때문이고, 또한 복음에는 다른 사람과 나누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는 듣든지 아니 듣든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이 복음을 누구에게나 전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죽어가는 영혼들을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늦기 전에, 더 늦기 전에 이 복음을 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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