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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진단법(診斷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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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078회 작성일 08-09-28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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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진단법(診斷法)

마14:22~33

2008. 9/28 11:00

지난 추석연휴에 모(某) 방송국에서 구당 김남수 선생의 침 이야기, 뜸 이야기를 특집 방영하였다. 여기서 김남수 선생이 한의학(韓醫學)의 4진법(診法)을 소개하는 것을 보았다. 4진법이란 환자의 상태를 진단하는 네 가지 방법으로 망진(望診/환자의 상태를 살펴보고 진찰하는 방법), 문진(問診/환자나 보호자에게 물어보고 병 상태를 알아보는 진찰방법), 문진(聞診/환자에게서 나는 소리를 듣고 분비물이나 배설물에서 나는 냄새를 맡아보고 진찰하는 방법), 절진(切診/환자를 만져보거나 눌러보고 병증을 알아보는 진찰방법)이 그것이다. 이는 아주 오래 전부터 한의학에서 기본으로 삼은 진단방법이라고 한다.


저는 이 특집방송의 공개홀을 가득채운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사람들이 건강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가를 실감했다. 재물을 잃은 것은 조금 잃은 것이요, 명예를 잃은 것은 많이 잃은 것이며, 건강을 잃은 것은 모두를 잃은 것이라.는 말이 있듯이 건강은 우리 생활에 있어서 귀중한 보배이다. 그래서 우리 동양에서는 건강을 오복(五福) 중 으뜸으로 생각했는데, 요즘은 웰빙(Well-being) 바람과 함께 핵심코드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은 육체적 건강뿐만 아니라 영적 건강도 따져 보아야 한다. 저는 이 방송을 보면서 영적 건강진단에 대한 중요성을 생각을 해보았다. 성경은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13:5)고 말씀한다. 항상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라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나의 영적 건강 상태는 어떠한가? 어떻게 나의 영적 건강 상태를 진단할 수 있을까?


본문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五餠二魚)로 남자 어른만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후에 일어난 사건이다. 갈릴리 호수를 건너다 풍랑을 만나 위험에 빠진 제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주님께서 물 위로 걸으신 사건이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초월성(신성)을 보여줌(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과 동시에 건강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즉 영적 건강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을 제시해 주고 있다.


1. 무엇을 보는가?(30)

어떤 왕이 신하 한 사람에게는 나라 안에 있는 모든 잡초 종류를 수집해 오라.고 명했고, 다른 신하에게는 모든 종류의 꽃을 수집해 오라.고 했다. 1년 후 돌아와서 잡초 수집을 맡은 신하는 잡초가 그렇게 많은 줄은 몰랐습니다. 우리나라는 온통 잡초로 덮여 있습니다.라고 보고하였고, 꽃 수집을 맡은 신하는 우리나라는 전체가 꽃동산입니다.라고 보고하였다. 보는 것이 그 사람의 태도를 좌우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불평거리를 찾는 사람에게는 불평거리만 보이고, 감사할 것을 찾는 사람에게는 감사할 일들만 보이게 된다. 부정적인 것만 본 사람은 부정적인 태도를 갖게 되고, 긍정적인 것만 본 사람은 긍정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그러므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을 보느냐, 어디를 보느냐, 어떻게 보느냐. 이것이 우리 인생을 좌우하고 나아가서 우리 영적 상태를 결정한다.


본문의 베드로를 보자. 그도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걷는 기적을 잠시 경험했다(29). 하지만 몇 걸음 못가서 물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그 원인을 본문은 그가 바람을 보고......”(30)라고 말씀한다. 그의 시선이 예수님에게서 바람에로, 바람에 의해 소용돌이치는 파도로 향하자 물 속으로 빠져들었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는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는데, 바람에 의해 요동치는 파도를 보는 순간 물 속으로 빠졌다. 바로 여기에 승리하는 신앙, 건강한 신앙의 비결이 있고, 나의 영적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나의 시선을 주님께 고정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주님을 바라보는 것. 즉 주님께 인생의 가치와 목적을 두는 것. 인생의 방향을 주님께 고정하고 달려가는 것. 이것이 건강하고 승리하는 신앙생활, 승리하는 인생의 비결이다.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주님처럼 물 위를 걸을 수 있다. 아무리 세상 바람이 강하고, 파도가 거칠어도 두려움 없이 그 위를 걸을 수가 있다. 어떤 고난과 위험도 극복할 수 있고, 어떤 시험과 유혹에도 무너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의 시선이 주님에게서 떠날 때, 우리가 바라보는 그것 때문에 실패하고, 그것 때문에 망하게 된다. 베드로를 보라. 그가 바람에 소용돌이치는 파도를 보자, 그 마음에 두려움이 생겼고 곧 그 파도에 휩쓸려 물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시선이 무엇을 보고, 어디를 보고 있는지 항상 점검해야만 한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競走)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한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1~2).


2. 누구에게 듣는가?(27, 29)

보는 문제만큼 중요한 것이 듣는 문제이다. 어쩌면 듣는 것이 더 중요하다. 듣는 것이 보는 것을 결정짓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작정 사물이나 사건을 보지 않는다. 일정한 틀을 가지고 보게 된다. 동일한 사건이나 사물을 놓고 사람마다 다르게 말하고 평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프레임(frame)이라 한다. 그런데 이 프레임은 듣는 작용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어떤 것에 대한 부정적인 말을 들으면 그것에 대한 부정적인 틀이 만들어지고, 긍정적인 말을 들으면 긍정적인 틀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들음을 통해 이미 만들어진 그 틀을 가지고 보게 되고, 평가하게 된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된 경위를 다룬 창세기 3장을 보면 이를 잘 알 수가 있다(1~6).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된 것은 하와가 뱀의 말을 들음에서 비롯된다. 뱀으로 위장한 사단은 하와에게 하나님을 거역하라거나 하나님을 믿지 말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하와의 마음속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령 죽으리라.”(창2:17)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만들어진 틀을, 너희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5)는 자신의 말을 집어넣어서 그 틀을 바꾸어 버린다. 하와가 바뀐 틀을 가지고 선악과를 보자 전혀 다르게 보였다. 전에는 선악과를 보는 것조차 두렵고 싫었다. 그래서 가까이 가지도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다(6). 그래서 결국 그 금단의 열매를 따 먹게 된 것이다. 이 모든 발단이 잘못 들음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의 첫 번째 조건으로, 악인의 꾀를 쫓지 않는 것(1)이라고 말씀한다. 악인의 꾀악인의 충고(말)를 뜻한다. 듣는 것을 잘 가리는 것이 복 있는 삶의 첫 번째 조건이라는 말씀이다. 악인의 말(충고)을 듣지 않는 것은 악한 자에게 귀를 빼앗기지 않는 것이다. 귀를 빼앗기면 마음도 빼앗기게 되고, 나아가서는 인생도 생명도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바울 역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10:17)고 했다. 들음의 중요성과 함께, 누구에게 무엇을 듣는 것이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무조건 듣는다고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생긴다. 아니 믿음이 주어진다. 주님은 당신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신다. 그리고 이 믿음을 가지면 불신도 의심도 사라지고, 근심과 걱정, 염려와 두려움이 사라진다. 자신을 이기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도, 심지어는 악한 마귀도 이길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믿음을 주시고, 이 믿음을 자라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주님을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복된 귀를 가져야 한다.


본문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특히 주님의 말씀을 들으므로 주어진 믿음이 얼마나 보배인가를 보여준다.


우선, 제자들은 주님의 음성을 들으므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폭풍을 만나 고생하고 있는 제자들은 자신들을 향해 물 위로 걸어오고 있는 물체를 보고 기겁했다(24,26). 폭풍에 유령까지 만났다고 생각하니 그 두려움은 극에 달한 것이다. 하지만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27)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두려움이 사라지고 평안이 찾아왔다. 세상이라고 하는 바다에는 여러 가지 풍랑이 있다. 그 곳을 향해하는 인생이라고 하는 작은 배는 항상 그 풍랑에 노출되어 있다. 게다가 때때로 유령소동까지 겹치게 된다. 이것이 인생이다. 이런 인생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다음으로, 제자들은 주님의 음성을 들으므로 현실의 장애를 극복할 수가 있었다. 두려움에 벗어난 제자들 중에 베드로가 소리쳤다.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28). 그러자 주님께서 베드로를 향하여 오라하셨고,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서 주님께로 가게 되었다(29). 이는 아주 중요한 말씀이다. 배에서 내려라는 말씀은 자기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뜻이고, 물 위로 걸어서란 말씀을 환경을 극복했다는 뜻이다. 영적 성장을 방해하는 요소가 둘 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이고, 다른 하나는 환경이다. 스스로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못한다.는 잘못된 고정관념과 환경에 대한 두려움이 자기 성장에 가장 큰 걸림돌이다. 믿음은 이런 한계를 벗어나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걷게 하는 능력이다.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자신의 한계와 환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믿음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건강한 신자는 주님께 믿음의 주파수를 맞추고, 주님의 말씀에 민감하게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다.


3. 누구에게 부르짖는가?(30)

인생을 살다보면 어떤 때는 믿음으로 당당하게 나아갈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믿음 없는 사람처럼 두려워하고 당황하며 허둥댈 때가 있다. 이것이 본문에 나온 제자들, 특히 베드로의 모습이다. 베드로는 주님의 오라는 말씀을 듣고 주님을 향해 담대하게 나아갔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몇 걸음 못가서 물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발밑에서 소용돌이치는 파도 때문에, 주님께로 향했던 시선을 놓치자 환경이 그의 믿음을 압도해 버린 것이다. 믿음이 환경을 압도하면 당당하게 걸을 수 있으나 환경이 믿음을 압도하면 초라하게 추락하고 만다. 그런데 그 순간 베드로는 주님을 찾고, 주님께 부르짖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30).


여기서 베드로는 아주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실패를 극복하는 법,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 기도이다. 즉 기도의 중요성과 기도의 능력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주님의 계획하심 속에 있다(마10:29). 지금 제자들이 밤중에 바다가운데서 폭풍을 만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마태복음이 제자도(弟子道)에 관한 책(제자들의 훈련교본)이라는 점에서, 이 사건은 훈련의 한 과정이다. 즉 주님께 대한 신뢰훈련(앞에서 말한 누구를 보느냐, 누구에게 듣느냐가 여기에 해당됨), 기도훈련의 한 과정이다. 몸으로 기도의 중요성과 기도의 능력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다. 살면서 이런 위기를 만났을 때 기도하라는 것, 기도로 승리하라는 것, 기도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다. 이 훈련에 베드로는 아주 성공적으로 통과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물 위로 걷게 해달라는 베드로의 요구를 무모하다고, 이런 무모하고 덤벙대는 성격 때문에 몇 걸음도 못가서 물 속에 빠져드는 어려움을 당한 것이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이런 무모하다고 여겨지는 도전 때문에 베드로는 물 위로 걷는 기적을 경험했고, 동시에 유일하게 물 위로 걸은 사람이 되었다. 비록 중도에 실패했지만 그 실패 때문에 실패를 극복하는 법. 기도의 중요성과 기도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었다. 물론 도전이 없으면 실패도 없다. 대신 신앙적인 체험이나 실패를 통한 값진 구원의 경험도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자(never up, never in)!


삶에서 실패를 경험하거나 어려움에 빠졌을 때, 누구를 찾느냐, 누구에게 부르짖느냐는 중요한 문제이다. 그가 어떤 사람인가, 누구인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시장 아들은 시장을 찾아가고, 경찰서장 아들은 경찰서장을 찾아가고, 한이는 저를 찾아올 것이다. 자기 아빠니까, 자녀니까! 마찬가지로 믿음의 사람은 베드로처럼 주님을 찾고, 주님께 부르짖는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주님을 찾지 않는 사람이 있다. 오히려 다른 곳(점집이나 철학관)을 기웃거리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교회는 다니고 있지만 아직 신자가 덜(?) 된 것이다. 점집 아주머니나 철학관 아저씨는 고모나 삼촌처럼 가깝게 여겨지지만 주님은 여전히 먼 마을 아저씨 정도로 멀리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깝게 느껴지는 고모나 삼촌을 찾아 점집이나 철학관을 찾은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렇게 주님을 찾는 사람에게 실패는 그냥 실패로 끝나지 않고, 더 큰 주님의 구원을 경험하는 기회가 된다. 그러므로 실패했을 때 주님을 찾고, 어려움에 빠졌을 때 주님께 부르짖는 것이 중요하다.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의 미약함을 보임이니라.”(잠24:10).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시50:15).


누구를 무엇을 보는가? 누구에게 무엇을 듣는가? 누구를 찾고, 누구에게 부르짖는가? 이는 우리의 영적 건강상태를 진단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요소들이다. 우리의 시선이 주님께 집중하고 주님의 나라와 영광에 모아지기를 바란다. 삶의 초점과 방향을 주님과 주님의 영광과 주님 나라에 맞추고 살자.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의 말씀에 민감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지 무엇이든지 주님께 묻고 주님께 부르짖기를 바란다. 이것이 건강한 신앙인의 모습임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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