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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좋은 날(日日是好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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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501회 작성일 08-10-05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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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좋은 날(日日是好日)

벧전3:8~12

2008. 10/5 11:00

한 겨레 신문(9월 18일) 〔천천히 읽는 만화〕코너 〈해뜨고 달뜨고〉편에 이런 내용이 실렸다. 주변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승승장구하는 사람이 있었다. 몸이 약간 불편해서 병원을 찾았는데, 담당의사에게 아주 절망적인 말을 들었다. 앞으로 3개월 밖에 살수 없다고 했다. 그는 분노와 좌절의 시간을 보내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하여 한 단어로 정리해 보려고 했다. 성공, 출세, 도전, 성취, 만족, 행복, 자신감...... 마지막 날을 앞둔 날까지 망설이던 그는 최후 순간 이 단어를 적었다. 후회!


성공하고 출세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돈이 있고 권세 있으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막상 마지막 순간에 남은 것은 후회뿐이라. 어쩌면 이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마지막 모습이 아닌지 모르겠다. 최소한 우리는 이런 마지막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예수님처럼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인생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한자어에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란 말이 있다. 오늘 설교 제목과 같이 날마다 좋은 날이란 뜻이다. 이렇게 우리의 삶이 날마다 좋은 날, 달마다 좋은 달(月月是好月), 해마다 좋은 해(年年是好年)가 된다면 우리 일생을 후회라는 단어 대신에 행복, 감사, 보람 등과 같은 단어로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 사도를 통해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好日) 보기를 원하는 자”(10)에게 주신 말씀한다. 여기서 생명이란 단순히 이 세상의 삶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영생을 의미하고, 좋은 날은 이 세상의 아름답고 즐거운 날뿐만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가져다 줄 날을 의미한다. 본문은 영생을 소망하고 사랑하며 다가올 세계를 기다리는 자들이 가져야 할 마음, 행동에 대한 말씀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가 우리로 후회가 없는 날마다 좋은 날이 되게 하는 비결이다.


사랑하는 마음’(8).

8절 말씀을 다같이 읽어보자. 이 말씀을 요약하면 사랑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이 사랑하는 마음은 다음과 같이 4가지로 정의할 수가 있다.


첫째는 같이 하는 마음이다.

어떤 영어성경은 조화로운 마음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의견일치나 획일적인 통일을 뜻하지 않는다. 다양한 의견을 가지면서 한 마음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이 다르고 의견은 달라도 얼마든지 한 마음이 될 수 있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주면서도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성숙함의 특징이다. 서로 다른 생각과 의견을 가지면서도 서로의 인격은 존중하고, 본질이 같기에(추구하는 목적이나 방향) 비본질적인 면에 있어 다소 차이를 보일지라도 이해하고 관용하며 하나됨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사랑하는 마음이다. 사랑의 본질적인 특성은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에 있다. 그래서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딘다(고전13:7). 다윗은 그의 시에서 형제가 연합(together in unity)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가?”(시133:1)라고 말했다. 서로 다른 사람이 더불어 산다는 것은 사랑의 극치다. 그러니 얼마나 아름답고 선한 일이겠는가?


어느 기자가 정신이상자들이 수용되어 있는 곳을 방문했다. 그런데 그곳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뿐이었다. 혼자서 이곳을 지키는 것이 두렵지 않는가?고 기자가 그 관리인에게 물었다. 전혀 그렇지 않다.고 관리인이 답했다. 환자들이 하나가 되어 당신을 공격하고 이곳을 탈출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했더니, 그건 불가능하다. 이 사람들은 결코 하나가 되지 못한다.고 태연하게 말했다.


우리는 살면서 하나가 되지 못하게 하는 무수한 상황과 논리를 만나게 된다. 그래도 우리는 내 생각과 주장과 논리를 양보하고, 말도 부드럽게 하고, 상대방을 이해하며 하나가 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서로 하나가 되고자 하고, 협력을 도모하며 사는 것이 건강하고 성숙한 삶의 모습이다. 여기에 화평과 화목이 있고, 행복이 있다. 이런 사람의 삶은 날마다 좋은 날이 된다.


둘째는 체휼(體恤)하는 마음이다.

체휼을 영어로는 공감(共感), 혹은 동정(同情)의 뜻을 지닌 Sympathy인데, 이는 헬라어 쉼(sym)과 파도스(pathos)가 합해진 단어로서 함께 고통을 당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함께 고통을 당한 자로서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하여(共感) 가엽게 여기(同情)는 마음이 곧 체휼인 것이다. 인간은 이 체휼하는 마음(Sympathy)을 통해서 연대(連帶)할 수 있다. 체휼은 함께 느끼는 마음, 함께 느끼는 정서이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로마사회는 엄격한 계급사회였다. 노예들의 노동과 희생으로 유지되었다. 이런 사회에서는 체휼하는 마음이 철저히 차단되었다. 여기서 동정이나 공감은 저급한 정서이고 천박한 정서로 취급되었다. 반면 그 반대인 ‘apathy’(무감각, 무감정, 무관심)를 찬양하고 최고의 가치를 지닌 정서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신도 ‘apathy’한 신, 즉 무격정, 무감각한 신을 최고의 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의 신은 어떤 분이신가? 가장 잘 표현해 주는 단어가 ‘Sympathy’라 생각한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4:16)라고 말씀한다. 예수님은 우리 각 사람의 연약함을 깊이 체휼(Sympathy)하신 분이시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사시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처지를 깊이 이해하고 가엽게 여기셨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2장 5-8절에서 우리에게 이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라고 간절히 권하였다. 이 마음은 우리를 체휼하신 예수님의 마음이다.


그렇다. 체휼하는 마음을 품고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단지 이론이나 지식으로선 불가능한 일이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내가 직접 그들과 같은 자리로 내려가 같은 아픔을 경험하고, 같은 연약함과 같은 유혹과 같은 상처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랬을 때, 진정한 체휼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얻어진 체휼의 마음이 능력을 발휘하여, 상처입고 아픈 다른 사람의 마음을 쓰다듬어서 그 사람을 건지고 살리게 된다. 바로 여기에 회복이 있고,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고, 삶의 보람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삶이 날마다 좋은 삶이 되는 것이다.


셋째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한 하버드대 학생이 아프리카에 있던 슈바이처 박사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자 했다. 그런데 환영은커녕 만날 수도, 만나주지도 않았다. 몹시 실망해 귀국을 준비하고 있을 때 큰 비가와 마을이 물에 잠기게 되었다. 그때 문둥병을 앓는 한 아이가 물에 빠진 것을 보고 뛰어들어 구해주었다. 그제야 박사가 그를 불러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며칠 자네를 지켜보니 전혀 나를 만날 준비도, 만날 가치도 없었네. 그런데 아이를 구해주는 것을 보고 자네에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는 것을 보았네.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의사나 약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일세.라고 말했다. 세상을 치유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긍휼이나 자비, 동정과 같은 뜻인데, 깊이 체휼하는 마음. 즉 상대방의 입장과 처지를 깊이 이해하고 가엽게 여기는 마음을 통해서 밖으로 드러난다. 맹자(孟子)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惻隱之心)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이라 하였고, 이를 인간이 타고난 마음이라 했다. 아무리 처음 본 사람이라도 그가 깊은 웅덩이에 빠져있으면 구해주고자 한다. 그것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 때문이다. 요즘 중국산 분유의 멜라민 문제로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세계가 큰 충격에 빠졌다. 결국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데서 비롯된 것이다. 신앙인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의 입장을 깊이 이해하고 가엽게 여기는 마음이 없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얼마든지 정죄하는 자리에 빠지게 된다.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한 편 손이 마른 사람을 고쳐주셨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었다 하여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세웠다(막3:1~6). 종교의 본질이 생명을 구하고 살리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인들이 죽일 궁리를 한다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이것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종교인의 특징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요3:16), 오셔서 비참한 생애를 보내시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롬5:8)가 바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 때문이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예수님의 사역의 동기와 방법이었다(참조, 마14:13~21). 조현삼 목사(광염교회 담임, 일명 감자탕교회)는 기적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시작된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주셨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통해 기적을 일으키기로 계획하셨다는 신호이다. 정말 하나님의 기적을 보기 원한다면 우리 마음속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키워가야 한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사역의 동기이며, 또한 자세이다. 그리고 세상을 아름답게,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비결이다.


넷째는 친절한 마음이다.

우리 성경에는 겸손하며라고 번역되어 있으나, 이를 친절하며라고 번역하고 있는 성경도 있다(후자가 문맥에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본인은 이를 취함). 톨스토이는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모든 비난을 해결하고, 얽힌 것을 풀어 헤치며, 어려운 일을 수월하게 만들고, 암담한 것을 즐거움으로 바꾸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친절이다.고 했다. 친절에 대한 훌륭한 정의라고 생각한다. 친절한 사람은 아름답고 행복하다. 친절은 정신적으로 여유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훌륭한 미덕이다. 그래서 친절한 마음은 그 자체가 아름답다. 옷을 잘 차려 입었다고 신사가 아니다. 행동이 예의바르고 친절해야 진정한 신사이다.


바울은 무례히 행하지 않는 것(고전13:5)을 사랑의 특성이라고 했다. 친절한 마음이 사랑의 특성 중 하나라는 뜻이다. 친절은 다른 사람의 행복에 대한 관심이다. 타인에 대해 관심과 배려를 보이는 마음이다. 친절은 많은 사람을 끄는 마음의 매력이다. 친절한 마음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곁을 주지 않고 자기에게만 집착하여 고립되고 만다. 그러므로 친절을 통해 우리는 홀로가 아니라 더불어 산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의 마음도 명랑해지고 이 세상이 살만한 곳으로 느껴지게 된다. 친절은 사랑하는 마음에서 흘러나온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흘러넘쳐서 친절한 신자, 친절한 교회를 만들자.


거울 뉴런(mirror neuron).

이는 보거나 소리만 듣고도 자신이 직접 겪은 것처럼 신경세포들이 활성화 되는 것을 말한다. 일종의 관심의 척도인데 관심이 있는 사람의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따라하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이것은 인간의 자아형성과 사회화에 필수적이다. 신자와 교회는 이 사회와 사람들에게 거울 뉴런(거울 신경세포)이 되어야 한다. 우리를 통해 사랑하는 마음을 배우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가 먼저 사랑하는 마음, 즉 같이 하는 마음, 체휼하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 친절한 마음을 가져야 하고, 이런 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의 삶이 날마다 좋은 날, 날마다 행복한 삶이어야 한다. 거울 뉴런을 정서의 바이러스라고도 한다. 신자는 행복의 바이러스, 축복의 바이러스, 기쁨의 바이러스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신자들이 무시를 당하고 교회가 웃음거리가 되고 복음이 조롱당하고 있는 이 세상을 향하여 진정한 행복의 길, 축복의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수 있고, 주님의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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