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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좋은 날(日日是好日)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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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414회 작성일 08-10-12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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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좋은 날(日日是好日)Ⅱ

벧전3:8~12

2008. 10/5 11:00

흔히 그 사람의 말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은 말을 만들고, 말은 인간을 만드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그 사람의 말을 보면 그 사람의 미래를 알 수 있다. 일본 만화 데스노트를 본뜬 소위 저주 노트라는 빨간 일기장이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다고 한다. 문구점에서 한 권에 3,000원 정도에 팔린다는 이 노트의 선전문구는 이 일기장에 이름이 오른 사람은 무시무시한 주문에 걸리게 된다.라는 식의 표현을 아무렇지 않은 듯 사용하고 있다. 한마디로 어른들의 얄팍한 상술이 아이들의 부정적 심리를 이용하여 빚어낸 끔찍한 상업전략이 아닐 수 없다. 어려서부터 이렇게 남을 저주하는 일에 길들여진 아이들의 일생과 이들을 통해 이루어질 세상을 생각하면 끔찍하다.


「나를 바꾼 그때 그 한마디」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유명 인사들의 인생 항로를 바꾼 한 마디 말에 대한 이야기이다. 귀하는 말 한 마디로 인생이 뒤바뀐 순간이 있었습니까?라는 질문에 100여 명에 달하는 유명인사들이 해 준 답변을 담은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 내용 중에, 내가 너처럼 매일 고깃국만 먹을 수 있었다면 나는 절대로 너에게 지지 않았을 거야. 친구와 다툼 끝에 들은 이 한 마디. 이 한 마디에 슈바이처의 인생이 박애를 실천하는 아프리카의 의사로 급선회했다고 한다.


우리는 말이 얼마나 중요하고, 그 영향력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요즘 실감하고 있다. 무심코 던진 한 마디의 말이 일파만파로 번져 결국은 부모에게는 소중한 딸이요, 자녀들에게는 생명같은 엄마인 한 사람의 귀한 목숨을 앗아가는 지경까지 초래했다. 우리의 미래는 말의 선택에 달려 있다. 미움의 말, 저주의 말, 부정적인 말을 자주 쓰는 사람의 미래는 어둡기 마련이다. 반면에 사랑의 말, 축복의 말, 긍정의 말을 습관화한 사람의 미래는 밝을 수밖에 없다. 이는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본문에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고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라(10)고 말한다. 대신 복을 빌라(9)고 말한다. 그래야 우리가 복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다(9)는 것이다. 그러므로 날마다 좋은 날을 위해선 사랑하는 마음에 이어 복된 이 중요하다.


복된

축복이라는 말은 어원적으로 좋게 말하는 것이다. 축복을 영어로 베니딕션(benediction)이라 하는데, 이는 라틴어 베네딕테레(benedictere)에서 왔다. 베네(bene)좋다는 뜻이고. 딕테레(dictere)말하다는 뜻이다. 헬라어 역시 마찬가지다(축복/유로기아=유/good+로기아/words).


좋게 말하는 것이 축복이다. 나쁘게 말하는 것은 저주와 같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장점과 단 점이 있다. 그런데 좋은 점을 보고 좋게 말해주는 것이 축복이다. 그리고 항상 상대방의 좋은 점을 보고 좋게 말하는 것은 능력이다. 좋은 마음에서 나오는 내적인 능력이다. 주님은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낸다(마12:35)고 말씀하셨다. 또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한다(마12:34)고 말씀하셨다. 이는 내가 하는 말은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드러낸다는 뜻이다. 말은 생각의 표현이고 언어는 사상의 표현이다. 잠언은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좋게 말하는 것은 그 마음이 좋은 것 행복한 것 아름다운 것으로 충만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말은 미래의 나를 만든다. 말은 감정을 만들어낼 뿐 아니라 행동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행동이 삶의 결과로 이어진다. 복된 말을 자주면 복된 생각을 품게 되고, 그것이 복된 행동으로, 그 행동이 복된 삶으로 이어지게 된다. 


하나님은 사람을 축복하실 때 말부터 바꾸신다. 믿음의 말, 소망의 말, 긍정의 말로 우리의 말이 바뀔 때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막9:23~24).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입술의 고백을 기뻐하시고 또한 우리의 말대로 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민14:20, 28). 말은 나의 환경의 씨가 된다. 하는 말의 영성이 지옥이면 환경이 지옥이 되고, 하는 말의 영성이 천국이면 환경이 천국이 된다. 날마다 좋은 날, 날마다 행복한 날 역시 우리의 말에 달렸다. 복된 말을 해야 복을 유업(遺業)으로 받을 수 있고, 복을 받아야 복된 하루, 복된 일생을 살 수가 있는 것이다.


1. 복된 말은 살리는 말이다.

말에는 살리는 말이 있고, 죽이는 말이 있다. 창조적인 말이 있고, 파괴적인 말이 있다. 유익하고 은혜로운 말이 있고, 무익하고 부끄러운 말이 있다.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말이 있고, 심령을 상하게 하고 아프게 하는 말이 있다. 본문은 입술을 금하여 악하고 궤휼의 말을 하지 말라(10)고 말씀한다. 이는 파괴적이고 죽이는 말, 악의적인 말, 무익하고 부끄러운 말들이다. 우리 신자가 피해야 할 말들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말들이 여기에 속한다.


"잘 해봐라."는 비꼬는 말.

"난 모르겠다."는 무책임한 말.

"그건 해도 안 된다."는 소극적인 말.

"네가 뭘 아느냐."는 무시하는 말.

"바빠서 못한다."는 핑계의 말.

"잘 되어가고 있는데 뭐 하려고 바꾸느냐."는 안일한 말.

"이 정도면 괜찮다."는 타협의 말.

"다음에 하라."는 미루는 말

"해보나마나 똑같다."는 포기하는 말.

"이제 그만 두자."는 의지를 꺾는 말.

      이 외에도 이웃에 대하여 험담하는 말, 자신이 하나님인양 판단하는 말, 불확실한 소문, 좋지 않은 농담, 거짓말, 그리고 그저 입에 붙은 피상적인 말(God talk) 등이 있다.


우리의 언어생활 속에 이와 같은 부분이 있다면 철저히 수술해야 한다. 우리의 말이 이런 파괴적이고 죽이는 말, 악의적인 말, 무익하고 부끄러운 말들로 너무 심하게 오염되어 있다. 말씀의 칼, 성령의 불로 수술하여 복된 말을 할 수 있는 입술로 거듭나야 한다. 그리하여 살리는 말, 창조적인 말, 유익하고 은혜로운 말,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복된 말을 하는 입술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잘되고 주변도 잘되게 하는 비결이다. 이런 말들은 전신의 활력소(活力素), 생활의 강장제(强壯劑), 기쁨의 촉진제(促進劑)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건강한 삶, 건강한 관계를 위해 일일삼찬(一日三讚)해야 한다고 말한다.


영국에는 신체장애를 극복한 자랑스러운 영국인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상이 있다고 한다. 프랑크 상이 바로 그것이다. 엘리자베스 바를로라는 여성이 이 상의 주인공이다. 그녀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비올라연주자이다. 그녀는 열여섯 살 때 청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위대한 음악가의 꿈을 키워가던 바를로에겐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꿈과 희망을 모두 잃고 깊은 절망에 빠져버렸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향한 희망의 빛을 놓지 않았다.

"네가 비록 청력은 잃었지만 아직 시력은 남아 있단다. 사람들의 입술을 보고 말의 뜻을 파악하는 독순술(讀脣術)을 익히도록 해라. 그러면 계속 음악을 할 수 있단다."

어머니의 격려에 힘을 얻은 바를로는 독순술을 배워 사람들과의 대화는 물론 비올라연주도 계속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최고의 비올라연주자로 우뚝 설 수 있게 되었다. 어머니의 격려의 말 한마디가 그녀의 인생을 바꾸어버린 것이다.


말은 식물이나 미생물까지도 영향력을 주고 있음이 실험을 통해 확인되었다. 심지어는 밀가루 반죽도 좋은 음악을 틀어주면 반죽이 부드럽게 잘되고, 그 반죽으로 빵을 만들었더니 훨씬 부드럽고 맛이 고소하다는 실험의 결과도 있다. 그렇다면 영적 존재인 사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서로에게 복된 말, 살리는 말을 해야 할 이유 여기에 있다.


2. 복된 말은 경우에 합당한 말이다.

다음 말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목사님에게, 당신은 살아 있는 부처님입니다.

직구밖에 못 던져 좌절하고 있는 투수에게, 당신은 정직한 분이군요.

대머리에게, 참석해 주셔서 자리가 빛났습니다.

매일 구타당하는 아내에게, 남편께서 나날이 힘이 좋아지시기를 기원합니다.

화상을 입은 환자에게, 당신의 화끈함이 마음에 듭니다.

간수가 석방이 되어 교도소를 나서는 사람에게, 당신이 그리워질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꼭 들러 주세요.


그렇다. 좋은 단어만 나열한다고 하여 좋은 말이 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 할지라도 그 놓여있는 형편과 처지에 맞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욕이 될 수도 있다. 병에 걸려 누워있는 사람에게 그 병에 걸리지 않게 예방하는 말을 한다면, 배고픈 사람 앞에서 어떻게 하면 돈을 잘 벌어서 잘사는가를 말 한다면, 사고로 힘들어하고 있는 사람에게 기도의 중요성을 말한다면, 그 말들은 위로보다는 오히려 핀잔과 마찬가지이다. 놓여있는 사정이나 형편은 생각하지 않고 좋은 말이라고 무조건 권한다면 그것은 독설에 불과하다. 듣는 사람의 상황에 적합해야 좋은 말, 유익한 말, 복된 말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말에도 코디’coordination)가 필요하다. 잠언은,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그 이웃을 축복하면 도리어 저주같이 여기게 되리라.”(27:14)고 했다. 반면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잠25:11),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잠15:23).


아르헨티나와 칠레는 양국의 우호를 다지기 위해 국경에 예수님의 동상을 세웠다. 그런데 이 동상으로 인하여 오히려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뻔했다. 그 이유는 그 동상이 완성 단계에 이르렀을 때 칠레의 어떤 사람이 예수님 동상이 칠레에 등을 돌리고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등을 돌리고 있는 예수님의 동상이 칠레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했던 것이다. 칠레 사람들은 이 사실을 더욱 크게 보도했고, 국민들의 감정은 점차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이 분위기를 바로잡지 않으면 두 나라 사이에 큰일이 터질 것을 누구나 예감했다. 이 때 칠레의 한 기자가 신문에 이런 기사를 냈다. 예수님의 얼굴이 아르헨티나를 향하여 서 계시는 이유는 아르헨티나가 칠레보다 더 예수님의 보살핌이 필요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 기사는 칠레인의 고조된 감정을 가라앉힐 만큼 큰 감동을 주었다. 물론 이 기사로 인하여 양국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도 사라졌다. 한 사람의 재치 있는 글이 두 나라 사이의 엄청난 비극을 막았던 것이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라는 말씀을 실감하게 해주는 사건이다. 이것이 바로 복된 말이다. 이렇게 경우에 합당한 말을 위해선 지혜훈련이 필요하다. 또한 상대방에 대한 깊은 관심이 요구된다.


라인홀드 니이버(R. Niebuhr)는 「도덕적 인간과 부도덕한 사회」에서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있는 가능성’(possibility for good)을 가지고 있으나 악에로의 경향성’(inclination to evil)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선은 가능성(possibility)이지만 악한 쪽으로 치우쳐(inclination)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의도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결코 선을 행할 수 없다는 말이다. 말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얼마든지 복된 말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악하고 궤휼한 말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그러므로 부지런한 연습과 훈련이 요구된다. 우리 모두 복된 말을 통해 복을 유업(遺業)으로 받고, 복을 받아 복된 하루, 복된 일생이 되자. 사랑하는 마음과 함께 복된 말을 통해 날마다 좋은 날(日日是好日)이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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