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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을 새롭게(06-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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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6,456회 작성일 06-03-26 17:41

본문

심령을 새롭게  
엡4:17~24  


영적 고착상태
현대 심리학 용어 중에 '고착상태'(Fixation)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과거의 어떤 습관을 계속 유지함으로써 심리적 안정을 얻으려고 하는 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고착상태에 빠진 사람은 변화를 싫어하고,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상황이나 환경에 적응을 잘 못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가능한 것입니까? 모든 것이 변하고 있습니다. 계속 변화하고 있는 속에 나만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그대로 있는 것입니까? 오히려 퇴보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거꾸로 변하는 것입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정지상태가 없습니다.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 생명의 특징입니다. 살아 있는 것은 변합니다. 그런데 과거에 매어 변화를 거부하는 것. 이것을 두고 심리학에서 ‘고착상태’라고 부른 것입니다. 심각한 심리적인 병입니다. 어리석은 이 ‘고착상태’라고 하는 병에 빠지면 스스로 퇴보하고 거꾸로 변화된 것입니다.

문명사적으로 역사를 연구했던 아놀드 토인비에 의하면 역사상 존속했던 문명들(세계 26개의 문명 중에 16개의 문명이 몰락함) 중에 몰락한 문명들의 공통적인 원인이 역사적인 도전에 적절하게 방응하지 못한 것들이라고 말합니다. 시대적 변화에 적절하게 반응하지 못해서 망했다는 것입니다. 다윈 역시 ‘종의 기원’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종은 변화에 적절하게 잘 적응한 종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변화를 싫어하는 고착상태는 스스로 퇴보하는 것이요, 자기 종말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영적 고착상태‘(Spiritual Fixation)입니다. 영적 고착상태에 떨어지면 신앙의 진보가 없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책망한 것이 바로 이 점입니다. 그들은 성령으로 시작하였으나 육체로 마치게 되었습니다. 구원받은 은총에 감격하는 신앙으로 출발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랑과 감격을 잃어버렸습니다. 가룟 유다를 보세요. 그는 제자로 출발을 하였으나 배신자로 그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 이유 역시 ‘고착상태’라고 하는 병이 문제였습니다. 이 병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변화를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고 만 것입니다. 사단은 바로 이 점을 노립니다. 그리고 이것을 이용하여 우리를 정복해 버린 것입니다. 바울이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이 이런 경우를 두고 한 것입니다.

이런 영적 고착상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날로 새롭게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날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래서 늘 변화된 심령으로 주님을 섬기고,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느 순간 변화를 멈추고 거기에 안주해 버리면, 그때부터 신앙은 끝장이 난 것입니다. 말은 신자라고 하지만 이런 사람은 벌써 영적 주도권을 육체의 욕망에 빼앗긴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좇아간다‘(빌3:13~14)고 고백한 것입니다. 영적 고착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날마다 노력하며 전진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빌2:12)고 말합니다.

주목하라! 모방하라! 반복하라!
고대 그리스의 무사들은 이런 글자를 새겨두고 훈련을 했다고 합니다. “주목하라! 모방하라! 반복하라!” 저는 이 문구를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적용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주목하라!’ 누구를 주목하고, 무엇을 주목해야 합니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주목해야 합니다. 이 땅에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도록 하신 그 사랑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믿음의 시작이요, 또한 마침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해야 합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주목해야 합니다. ‘모방하라!’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아 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섬기고, 예수님처럼 사랑하고, 예수님처럼 기도하는 삶을 닮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희생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신앙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믿음의 선배들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반복하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본받는 삶의 노력은 거듭거듭 반복해야 합니다. 신앙은 일회성이 아닙니다. 신앙은 진행형입니다. 음악 연주자나 운동선수가 그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연습을 반복하는 것처럼 신앙생활도 마찬가집니다. 반복적인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하나의 거룩한 습관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습관을 좇아 기도하셨습니다. 기도가 습관이 되도록 기도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가 습관이 되고, 말씀 묵상하는 것이 습관이 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 고착상태를 벗어나 진보가 있는 변화된 삶을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영 주도적인 인간
바울은 인간을 ‘성전’에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루살렘 성전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세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예배자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뜰이 있고, 성전 뜰 안에 성소가 있습니다. 성소는 제사 드리는 기구가 있고, 제사장들이 들어가서 사역을 하는 곳입니다. 그 다음에 성소 안에 지성소가 있습니다. 거룩한 중에 더 거룩한 곳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있습니다.

성전 안에 성소, 성소 안에 지성소.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성전이 성전되는 것은 ‘지성소’ 때문입니다. 지성소가 없다면 성소도 없고, 그 넓은 뜰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문제는 그 지성소 때문에 이 성전 전체가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성전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집니다. 사람의 몸도 ‘몸’이라는 것이 있고, ‘혼’이라는 것이 있고, 혼 안에 다시 ‘영’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이 영이 사람의 핵입니다. 사람의 가치가 몸에 있지 않습니다. 키가 크고, 잘 생기고, 젊고, 건강하다고 가치가 더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정신에도 있지 않습니다. 공부를 많이 하고, 정신 수양이 깊은 수도사라고 하여 가치가 더 있는 것도, 정신 연령이 낮은 어린이나 일종의 이런 계통의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 많은 배움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덜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의 가치가 정신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 사람의 가치는 ‘영’에 있습니다. 바로 이 영이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성전으로 말하면 지성소와 같은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영의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육체는 이성의 지배를 받아야 하고, 이성은 영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거꾸로 되면 그때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요즘 ‘심령의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정신을 통해 육체를 치료하는 치료법입니다. 사실 육체의 병은 정신에서 오는 것입니다. 정신력이 약해져서 생긴 것입니다. 여러분, 하룻밤만 고민하면서 잠을 못 자보세요. 당장 다음날 아침에 몸에 문제가 생깁니다. 내과의사의 기록에 의하면 암환자 대부분이 2~3년 전에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그 충격이 오늘에 와서 암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이 건강할 때에 육체가 건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신은 영이 건강할 때 그 정신이 건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육체가 병들면 정신으로 치료합니다. 정신이 잘못되면 영으로 치료합니다. 영이 병들면 무엇으로 치료합니까? 이것은 끝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육체가 정신을 지배하고, 그 병든 이성이 영을 지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옛 사람의 성격
이러한 상태를 오늘 본문에서는 ‘구습을 쫓는 옛사람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옛사람의 속성은 ‘영’ 주도적 인간에서 떠나 ‘육체’ 주도적 인간으로 타락된 인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옛 사람의 성격을 여섯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는 ‘허망’ 입니다. 삶의 목적을 상실하고 의미를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에겐 하는 모든 일이 허무하고 의미가 없습니다. 둘째는 ‘어두움’입니다. 이 말은 ‘지성의 결여’를 의미합니다. 본문 말씀대로 총명이 흐려진 것입니다. 판단하는 능력, 이성의 능력이 어두워진 것입니다. 셋째는 ‘무지함’입니다. 이 말은 도덕적 판단력을 잃어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분간하질 못하는 그런 상태입니다. 윤리적 감각을 상실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나쁜 일을 하고도 그것이 나쁜 일인 줄 모릅니다. 넷째는 ‘마음이 굳어지고’ 그랬습니다. 강퍅해진 것입니다. 고집과 자기 집착에 빠진 것입니다.(바로왕) 다섯째는 ‘무감각’입니다. 이건 완료형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감각능력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어떤 자극에도 반응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여섯째는 ‘방임이라’고 했습니다. 방임은 그냥 내버려두는 것, 즉 포기상태입니다. 사람으로 살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되는 대로 그냥 사는 것입니다. 자동차로 말하면 브레이크가 터져 나간 것입니다. 브레이크 터진 자동차, 얼마나 위험합니다. 전혀 통제가 되지 않는 인간입니다. 이것이 육체 주도적인 인간의 모습, 곧 옛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다. ‘심령을 새롭게 하라!' 심령을 새롭게 하라. 이는 ‘너희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라. 너희 마음 안에 있는 영, 그 핵심, 그것을 새롭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의 영이 살아나야 합니다. 그래서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 새로운 삶의 시작
그러면 어떻게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할 수가 있습니까? 본문은 말씀합니다.(24절)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만남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눅15장에 나온 탕자를 기억하시죠? 그가 아버지를 떠났을 때 그의 삶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돼지보다 못한 삶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이 언제 회복되었습니까? 아버지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만났을 때입니다. 아버지는 그를 위해 잔치를 베풀고, 그에게 새 옷과 가락지와 신을 신겨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낡은 옷은 벗어버리고 새 옷을 입으라.” 아버지는 아들에게 새 옷을 입혔습니다. 옷은 신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들의 신분을 주었습니다. 누가 뭐라해도 "너는 내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옷을 입혀준 것은 칭의(稱義)를 상징합니다. “내가 사랑으로 네 죄를 다 덮었다, 용서한다.”는 뜻입니다. 바로 여기서 탕자는 아들의 정체의식을 가지면서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아버지와 만남을 통하여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만나야 됩니다. 주님을 만나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의 심령이 새롭게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 영이 새롭게 되어야 우리 정신이 바뀌고, 우리 인생이 바뀝니다.

여러분, 물질로 사람을 바꾸지 못합니다. 환경으로 사람을 바꾸지 못합니다. 또한 제도가 사람을 바꾸지 못합니다. 구조를 바꾸고 사회제도를 바꾸어서 사람을 변화시켜 보려고 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칼 마르크스입니다. 그는 실패했습니다. 그러므로 외적인 문제로 내적인 문제를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내적인 것은 내적으로, 영적인 것은 영으로만 가능합니다. 살아있는 말씀이신 주님만이 생명의 성령을 통하여 우리 심령을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 영에 부딪치고, 성령이 우리 영에 부어질 때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님을 아주 깊이 만났던 한 사람을 소개하겠습니다.

1990년에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올랐던 엘리나라고 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녀에게는 '노인의 어머니'라는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계적으로 가장 크고 훌륭한 양로원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본래 하나님께 헌신하고 중국으로 가서 중국선교사로 일했습니다. 그런데 힘써서 중국선교사로 일 하려고 했는데 폐결핵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선교활동을 접고 선교지를 떠나야 했는데, 그 때 그녀는 “하나님이여, 왜 내게 이런 병을 주십니까?”라고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제게 지금 무엇을 원하십니까?” 겸손한 기도를 하면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고향에는 아버지가 물려준 넓은 땅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개간을 해서 농사를 했습니다. 그녀는 농사해서 얻어지는 수확을 가지고 중국선교사들의 선교비를 많이 보냈습니다. 그런데 또 추수하면서 탈곡을 하던 중에 탈곡기에 손이 끼어 들어가 손이 부러지고, 결국은 그 손을 자르게 됐습니다. 그래서 오른손을 잘랐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하나님은 지금 내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겸손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농사를 멈추고 그 땅에다가 양로원을 짓고 노인들을 위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성공적으로 확장되어서 세계적인 유명한 양로원이 되고, 그녀는 ‘노인의 어머니’라고 하는 사랑스러운 칭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결코 환경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환경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주여, 주는 내게 지금 무엇을 원하십니까?'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불행한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나갔습니다. 그 뜻에 충성을 다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주님을 만나 심령이 변화된 사람의 모습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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