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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 삶의 진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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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6,907회 작성일 08-12-21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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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 삶의 진통제

골4:10-11

2008. 12/21 11:00

실패한 목사?

일본에 나가노 마끼라는 젊은 목사가 있었다. 갓 목사안수 받고 텐트를 치고 개척을 시작했다. 교인은 아내와 자녀, 세 식구가 전부였다. 한 달, 두 달, 6개월, 1년이 지나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보낸 세월이 5년이나 되었다. 그러나 나가노 목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저녁예배 때 첫 번째 교인이 나타났다. 청년이었다. 그 순간 나가노 목사는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른다. 예배가 끝난 후 나가노 목사는 청년과 함께 집에서 저녁을 같이 먹었다. 그런데 식사도중 청년이 갑자기 하더니 입에서 핏덩이를 토해 냈다. 이 청년은 폐병환자였다. 당시에 폐병은 불치병이었고, 일반인이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던 시절이었다. 나가노 목사 역시 순간 쫒아버릴까?하고 갈등을 느꼈다. 하지만 마음을 바로잡고 이 청년을 주님이 자기에게 보내신 첫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걸레를 가져와 청년의 각혈을 치우고 다시 상을 차려 식사를 했다.


이 청년은 유명 정치인의 사생아였다. 그가 예수를 믿고 신학교에 입학했는데, 결핵이 발병되어 완치하면 복학한다는 조건으로 강제휴학처분을 당했다. 다니던 교회로부터 병이 낫기까지는 출석을 금해 달라는 요청을 들었다. 평소 어울리던 교우들도 외면했다. 그는 이런 교회, 이런 세상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가 없어 자살을 결심했다. 그런데 자살 직전 우연히 나가노 목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한 명의 신자도 없는 교회를 포기하지 않고 5년간이나 지켜오고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 큰 감동이 되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나가노 목사를 한번 만나보고, 만약 그도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자신을 대해 주지 않으면 그때 죽기로 하고 찾아갔다. 그런데 나가노 목사는 자신을 환영하였고 극진히 보살펴 주었다. 그는 이 목사를 통해 예수님을 새롭게 만났다. 결핵에서 완치가 되어 신학교에 복학을 해 후에 목사가 되었다. 그가 유명한 빈민의 아버지, 일본의 성자로 불리는 가가와 도요히코(하천풍언) 목사이다.


하천풍언(賀川風彦) 목사는 빈민목회를 하면서, 먹을 것이 없어 몇 끼씩 연달아 굶어서 변비로 고생하는 환자들을 일일이 손가락으로 후벼 주었다. 때로는 차돌같이 굳어 있는 환자의 변을 항문에 자기 입을 갖다 대고 침으로 녹여 빨아냈다(그래서 그의 신학을 일명 걸레신학. 혹은 밑 닦기 신학이라고 함.) 그러자 주위 사람들이 그에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힘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러자 그의 대답은 저는 배운 대로 합니다. 제 선생님은 제가 토해 낸 결핵 핏덩이를 닦아 주셨습니다. 그분이 제게 해주신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는 그저 흉내만 내고 있을 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위로가 필요하다.

사람은 누구나 위로가 필요하다. 위로가 필요 없을 만큼 행복한 사람, 강한 사람, 건강한 사람, 완벽한 사람, 풍족한 사람,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겉으로 강해보이고, 행복해보이고,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사람일수록 위로가 더 필요한 사람일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중에 제가 가장 많은 위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개척하면서 행복하고 감사한 일들을 많이 겪었고 늘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때때로 조급증 때문에, 혹은 괜한 비교의식 때문에 힘들 때가 있다. 정말 이 상황을 피하고 싶을 때도 있다. 이런 제게 이 나가노 목사의 이야기가 큰 위로가 되었다. 교인 수, 헌금액수, 교회평수 등. 무엇이든 수치로 평가하는 세상의 평가로 보면 나가노 목사는 분명히 실패한 목사이고, 그의 목회는 실패한 목회이다. 하지만 목회의 대상은 사람이고, 사람은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천하보다 소중하고 귀한 존재다. 나가노 목사는 폐병에 걸린 한 사람의 영혼도 이렇게 귀하여 여겼고, 그 한 사람에게 자신의 목회를 집중했다. 그 결과 하천풍언이라는 주님 앞에 큰 인물을 탄생시켰다. 바로 이것이 주님이 기뻐하시고,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깨닫고 큰 위로와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바울의 동역자들, 삶의 진통제.

지금까지 대강(림)절 4주간 동안 소망이란 주제로 말씀을 증거하고 있다. 첫째 주일에는 소망의 중요성에 대하여, 둘째는 소망의 자양분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셋째 주일은 소망의 대상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다. 마지막으로 오늘은 소망의 삶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고자 한다.


바울은 오늘 본문 앞뒤에 여러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있는 사역자들이다. 바울은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기억하며 골로새교회 신자들에게 소개를 하고 있다. 특히 11절에서 이들이 바울 자신에게 위로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그런데 여기 이 위로라는 헬라어 단어(παρηγορία)는 신약성경에서 이곳에만 단 한번 나온다. 주로 당시 의사들이 사용했던 의학전문용어로 그 뜻이 매우 흥미롭고 특별하다. 즉 진통제란 뜻이다. 참으로 멋지고 탁월한 표현이라 생각한다. 진통제가 무엇인가? 진통제란 고통을 크게 완화시켜주는 치료제이다. 위로가 이와 같은 것이다. 외로움의 고통으로 잠을 못 이룬 사람에게 누군가가 다가가서 위로의 말 한 마디만 건네도 그 고통을 이겨낼 수가 있다. 바울이 위로를 진통제로 표현한 것은 이 사람들이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를 보여주고, 동시에 위로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진통제는 영국 에딘버러 대학 제임스 심프슨(J. Simpson) 교수에 의해 발견되었다. 당시 의학계에서 대발견이라는 찬사를 받았고, 향후 의학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특히 외과수술의 신기원을 이루었다. 의학계에서 진통제가 차지한 비중만큼 우리 인생에서 위로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고 중요하다. 바울은 선교사역과정에서 매우 극심한 어려움들을 겪었다(고후11:23~27). 그리고 지금은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의 몸이다. 이런 그에게 주 안에서 형제요, 동역자인 이들의 존재가 위로가 되었다는 고백이다.


여기서 소위 형통복음(신학)의 허상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을 믿으면 만사가 형통한다? 바울의 경우는 예수님을 믿은 까닭에 수많은 시련과 환란을 경험했다. 그렇다면 바울의 믿음에 문제가 있었단 말인가? 아니다. 바울과 같은 모범적인 신자는 없다. 믿음의 본질은 문제없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태도, 해석에 있는 것이다. 어떤 어려움에도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않는 태도, 그 문제를 믿음 안에서 새롭게 보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믿음이 확고해도 고난이 겹치고 막중하게 되면 흔들릴 수가 있다. 그래서 훌륭한 믿음의 사람에게도 위로가 필요하고, 주님께서 위로의 사람들을 붙여 주신 것이다. 독일어 위로라는 단어를 보면 이를 잘 알 수가 있다. 독일어로 위로를 트로스트(trost)라고 한다. 이 단어는 신실, 충실, 확고함의 뜻을 가진 트로이어(treue)에서 왔다. 막심한 고통을 겪으면 자기 평형을 상실하기가 쉽다. 서두에서 소개한 하천풍언처럼 신앙인으로 품어서는 안될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누군가의 위로를 통해 다시 마음을 다잡아 확고히 서게 되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말했듯이 사람은 누구나 위로가 필요하다. 사도 바울도 예외일 수가 없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는 아픔을 주는 사람, 상처를 주고, 고통에 더 큰 고통을 더하는 고슴도치와 같은 사람이 있다. 반면 고통을 완화시켜 치료해주는 진통제처럼 위로를 주는 사람이 있다. 주님을 소망하고, 주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신자가 추구해야 할 삶은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사람의 고통을 완화시켜 치료해주는 진통제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위로의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나의 존재가 다른 사람에게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고, 기쁨이 되어야 한다.


정호승 시인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시가 있다.


..........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현실은 외로움과 아픔이다. 그래서 인생을 고해
(苦海)라고 한다. 그러기에 시인의 말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 눈물을 흘릴 줄 알고, 또한 눈물을 닦아주는 진정으로 위로하는 삶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고 아름다운 삶이다. 때문에 주님은 우리가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붙들어 주고 위로하며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다(사40:1~2, 살전4:18).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위로의 복을 받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의 아픔을 덜어주시는 진정한 진통제시고,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은 우리의 영원한 위로와 힘과 소망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위로해야 하며 다른 사람의 아픔을 덜어주는 진통제가 되어야 한다.


위로의 힘.

실제로 어떤 사람을 만나면 불안했던 마음도 안정되고, 마음에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된다. 의학적으로도 기쁨과 위안이 되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심지어 높았던 혈압까지도 내려간다고 했다.


미국 테네시 주에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한 소년이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친구들에게 놀림의 대상이 되어 늘 좌절과 낙심 속에 살았다. 그는 12살이 되던 해에 처음으로 교회를 가게 되었는데, 그때 목사님이 그를 보면서 네가 누구 아들이더라!하더니, 환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 네가 누구 아들인지 알겠다. 너는 너의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에 내가 금방 알아볼 수 있어.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그러니 하나님의 아들답게 훌륭하게 살아라. 결국 그 위로의 말에 그 소년은 큰 감동을 받게 되었다. 그가 훗날 미국 테네시 주의 유명한 주지사 벤 후퍼(B. Hooper)이다. 그는 그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고백하였다. 그때 목사님을 만나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던 그 날이 바로 테네시 주의 주지사가 태어난 날입니다.


그렇다.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위로는 한 사람의 인생을 영원토록 아름답게 바꾸는 놀라운 힘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족과 지체들, 그리고 이웃들에게 주님의 사랑으로 위로를 전하신다면 그들의 영혼과 삶 전체는 놀랍게 회복되고 치유될 것이다.


위로의 방법.

특히 11절 중반에서 바울은 동역자들이 그에게 위로가 되었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이들을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사람들이라고 소개한다. 이들은 함께 주님을 섬기며, 함께 사역을 하고, 함께 고난을 당하고, 그리고 기쁨도 함께 나누었던 사람들이다. 지금도 여전히 그의 곁을 지키고 있다. 세상인심이란 내가 잘되고 잘 나갈 때는 주변에 함께 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내가 어렵고 힘들게 되면 마치 썰물처럼 다 떠나고 만다. 바울 자신이 이런 어려운 처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함께 해준 동역자들이 고맙고 위로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자신에게 더욱 위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라틴어로 위로하다는 단어가 콘솔라리’(consolari)이다. 여기서 영어 컨솔(console)이란 단어가 나왔다. 이 ‘consolari’의 본 뜻은 혼자인 사람과 함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위로는 혼자서 괴로워하는 사람, 힘들어하고, 아파하는 사람, 고통받고 있는 사람과 함께 있어주는 것이다. 정말 힘들 때는 아무런 말없이 그저 가만히 곁에 있어준 것만으로 위로가 되고 힘이 된다. 주님께서도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심히 고민하고 괴로워하시며 제자들에게 나와 함께 깨어있으라.고 요청하셨다(마26:38). 이는 주님께서 제자들의 위로를 받아야 할 만큼 나약해지셨기 때문이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함의 중요성을 깨우치시기 위함이다. 복음성가에도 있듯이 주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다. 특히 우리의 고난 가운데, 고통 가운데, 슬픔과 아픔 가운데 함께 하셔서 우리를 위로하신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평안히 길을 갈 땐 보이지 않아도

지치고 곤하여 넘어질 때면 다가와 손 내미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우리 역시 주님처럼 이런 위로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가만히 다가가서 함께 힘들어하고 함께 눈물을 삼키며 아파해줄 수 있는 위로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외람되게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주님은 나 한 사람을 위해서도 이 땅에 오셨고, 또한 십자가를 지실 수 있었을까? 그랬을 것이다. 한 생명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신 분이 주님이시니까! 나로 인하여 단 사람이라도 웃을 수만 있다면, 단 한 사람이라도 용기를 얻어 인생을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면, 단 한 사람이라도 상처받은 사람이 치유될 수 있다면 나의 삶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삶의 진통제요, 세상의 진통제이다. 오늘도 혼자인 사람을 찾아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이 사랑이고 돌봄이고 섬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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