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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로 진 십자가 (06-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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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23,117회 작성일 06-04-13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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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로 진 십자가
막15:21~25

한 미국인 부부가 독일의 오페라하우스에서 유명한 수난절 연극을 관람했습니다. 공연 후에 그들은 예수님 역을 한 배우를 만나려고 무대 뒤로 갔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남편은 배우가 극중에서 지고 갔던 십자가를 발견했습니다. 사업가인 남편은 부인에게 카메라를 건네주며 말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내 모습을 찍어 줘요." 그는 등을 구부리고 커다란 십자가를 어깨에 짊어지려 했으나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배우를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속이 빈 것인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무겁지요?" 배우는 대답했습니다. "내가 무거움을 느끼지 않았다면 나는 예수님 역을 해내지 못했을 겁니다."

힘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십자가 중에 내가 짊어진 십자가는 왜 이리도 무겁단 말인가" 그때 옆에 있던 사람이 말했습니다. "그토록 무거우면 그 십자가를 버리시오. 그리고 가장 가볍다고 생각되는 십자가를 골라 가져가시오"라고 위로의 말을 전해주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그 사람은 너무도 반가워서 자기 십자가를 멀리 보이지 않게 던져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아주 작은 십자가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찾다가 평생 지고 갈 수 있을 만한 십자가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가 조금 전에 무겁다고 버렸던 바로 그 십자가였습니다. 이는 사람마다 그에게 적합한 십자가가 있는데, 사람들은 자기의 십자가를 항상 무겁게 느끼면서 불평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모두에게 불편하고, 꺼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피하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고난, 슬픔, 고통, 나아가서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나는 너를 위해 십자가를 졌고 지금도 지고 가노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질 수 있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기치 않게 십자가를 진 사람이 나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구레네는 북아프리카 지역 지금의 리비아 한 시골, 시몬은 그 지역에 거하고 있는 디아스포라 중에 한 사람으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다가 예수님의 처형을 목격하게 됨.)입니다. 밤새 불법 재판을 받으시고, 로마 병사들에게 시달리신 주님은 100㎏ 가량의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지 못하고 지쳐 쓰러지고 맙니다. 무정한 로마 병사가 사정없이 예수님을 채찍질합니다. 예수님은 겨우 일어나보지만 또 쓰러집니다. 그때 로마 병사가 구경꾼들 가운데서 예수님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고 갈 사람으로 구레네 시몬을 지목했습니다. 그는 살벌한 분위기와, 로마 병사가의 기세 앞에 항의 한번 못하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구레네 시몬에게는 억지로 진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나 원치 않는 십자가를 지게 되었지만 나중에 이 일로 시몬과 그의 가족들에게는 큰 변화와 축복이 일어난 사실을 보게 됩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이 같은 주님의 물음에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첫째로 내게 주어진 십자가라면 억지로라도 지고 가야 합니다.
살다 보면 원치 않는 일들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뜻하지 않는 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무서운 질병에 걸리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사람은 졸지에 경제적인 고통을 당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핍박을 받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것들은 누구도 원치 않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우리에게 찾아올 수 있습니다. 퀴블러(E. Kubler)와 로스(Ross)라고 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이런 일을 당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임종환자들)은 다음과 같은 5단계의 심리적 반응을 보인다고 말하였습니다. 첫째는 부정의 단계입니다. 자기에게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날 수 없다고, 무언가 잘못된 된 것 아니냐며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정하는 단계입니다. 둘째는 분노의 단계입니다. 왜 하필이면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 분노를 폭발시키는 단계입니다. 셋째는 타협의 단계입니다. 하라는 대로 다하고, 달라는 대로 다 줄것이니 살려만 달라고 매달립니다. 혹은 신을 찾기도 합니다.(이 때가 우리 신자들의 입장에서 전도하기에 가장 좋은 때입니다. 이 때 전도하면 아주 잘 받아들이게 됩니다.) 넷째는 우울의 단계입니다. 자신의 이런 수고가 무의미하다는 것, 자신이 이렇게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살았던 세월들에 대한 후회 등이 겹치면서 우울증에 떨어집니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째가 수용의 단계입니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자신이 직면한 현실을 수용하는 단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구레네 시몬에게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시몬이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된 것은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그저 구경꾼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그에게 이런 고난이 닥친 것입니다. 그래서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시몬은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고 묵묵히 지고 갔습니다. 참고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갔습니다. 그랬더니 그것이 훗날 그에게 복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주님은 냉수 한 그릇에 대한 상도 잊지 않는다 하셨는데, 당신을 위해 수고한 종의 수고를 잊겠습니까?

사실 위대한 일들을 보면 사명감 때문에 억지로라도 순종하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전도자 바울의 생애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바울은 복음 전도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넘어 ‘부득불 해야 할 일’이라고, 억지로라도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의 이와 같은 순종을 통하여 작은 나라 유대에서 시작한 기독교 복음이 삽시간에 소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대륙으로까지 확산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우리 부모님들을 생각해 봅시다. 그 분들이 우리를 키우는 동안 좋은 일만 있었겠습니까? 정말 부모 됨을 포기하고 싶은 때가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돌보고 키우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억지로라도 그 십자가를 감당하셨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을 만들고, 지키는 일도 마찬가집니다. 가정의 십자가, 기족의 십자가를 벗어던지고 도망치고 싶지만 참고 참으면서 억지로 감당한 결과 오늘의 행복한 가정을 꽃피우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십자가 지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억지로 진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세 번이나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물리쳐 주십시오.“ 그런데 십자가를 지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확고한 뜻임을 깨닫고는 ”내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자신은 원치 않는 일이었지만 하나님이 원하신 일이었기에 즐겨 순종한 것입니다. 그 결과 위대한 구원의 역사, 사랑의 역사를 이룬 것입니다.

병들었을 때 밥맛이 없으면 "억지로라도 먹으라”는 말을 합니다. 살려면 먹어야 하기에 그렇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가 살려면 억지로라도 주께서 주신 사명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기쁘게 하면 더욱 좋겠지만, 억지로라도 져야 합니다. 결국 억지로 진 십자가가 나중에는 나를 이끌고 가는 십자가로 바뀌게 될 줄로 믿습니다.

둘째로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미국 앨라바마 주는 세계적인 땅콩 생산지입니다. 이 주의 엔터프라이즈라는 도시 법원 앞에 이상한 돌비가 서 있는데, 이 돌에 이런 비문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목화를 갉아먹었던 벌레에게 심심한 감사를 표한다. 이 벌레는 우리에게 번영의 계기를 주었고, 하면 된다는 신념을 주었다. 목화벌레들이여, 다시 한번 그대들의 노고에 감사를 바친다." 본래 이곳은 목화가 주요산업이었습니다. 그런데 1895년에 목화벌레 떼가 유난히 들끓기 시작하여 1/3밖에 수확을 못하는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실직자가 생기고 파산자들이 생겨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굶고, 병들고, 그 곳을 떠났습니다. 그 때 주 정부와 남은 농민들은 실망치 않고, 목화를 뽑아내고 대신 땅콩, 감자, 옥수수를 재배하였습니다. 그 후 앨라바마 주는 세계적인 땅콩산지로 변했습니다. 부정적인 목화벌레로 인하여 긍정적인 결실을 얻었기에 주민들은 목화벌레의 공적비를 세운 것입니다.

오늘 내게 주어진 십자가도 마찬가집니다. 힘들어도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주어진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게 주어진 십자가가 비록 억지로 지워진 것이라 할지라도 인내하며 지고 나가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십자가가 될 줄로 믿습니다. 인간 편에서는 우연일지도 모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벌써 구레네 시몬을 예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신앙 세계에서는 우연이란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모두가 필연이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억지로 십자가를 지는 순간에 소망이 끊어지는 것 같은 절망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으면 길이 있습니다. 아무리 억지로 진 십자가라도 감당할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십자가를 주실 때 그 십자가를 감당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올 만날 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로 알고 주님을 더욱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억지로 지는 십자가가 무겁고 힘들어도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과 계획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십자가가는 그것이 무엇이든 믿음으로 받으면 은총이고, 축복입니다.

셋째로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축복을 믿어야 합니다.
어느 병원 재활센터의 벽에 붙여 있는 시입니다.

"큰 일을 이루기 위해 힘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겸손을 배우라고 연약함을 주셨다.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건강을 구했는데,
보다 가치 있는 일을 하라고 병을 주셨다.
행복해지고 싶어 부유함을 구했더니,
지혜로워지라고 가난을 주셨다.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자 성공을 구했더니,
뽐내지 말라고 실패를 주셨다.
구한 것 하나도 주시지 않았지만,
내 소원 모두 들어주셨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삶이었지만,
내 마음속에 진작에 표현 못하던 기도는 모두 들어주셨다.
나는 가장 많은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이 시의 요지가 무엇입니까? 연약함, 질병, 가난함, 실패라고 하는 십자가를 통하여 내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축복이었다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십자가의 구원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십자가를 통해서만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의 부활도 우리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죽을 때, 또한 그와 함께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본문 21절을 보면 "알렐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 했습니다. 단순히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 하지 않고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본문이 기록될 당시 시몬의 아들인 알렉산드와 루포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인물이었음을 반증합니다. 즉 알렉산더와 루포가 로마교회 내에서 유명한 인물이었음을 의미합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롬16:13에서 '주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구레네 시몬의 아들인 루포는 로마에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루포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라고 할 만큼 시몬의 아내는 바울을 잘 도와 준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결국 구레네 시몬이 억지로 지게된 십자가였지만 그 결과 그의 가정이 경건한 신앙의 가정이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의 자녀들은 초대교회에서 유력한 사람들이 되었고, 그의 부인은 전도자들을 잘 섬기는 존경받는 믿음의 어머니가 된 것입니다.

미국 뉴욕 리버사이드 교회에 커다란 종탑이 세워져 있다고 합니다. 평소에는 종탑이 높아서 그런지 아무도 쳐다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당 종탑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궁금하여 묻습니다.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저 십자가를 보십시오." 그래서 십자가를 바라보았더니 십자가 종탑을 수리하는 사람이 십자가에 매달려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대단히 역설적이지만 교회와 신자가 세상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비결은 이와 같이 십자가를 질 때입니다. 십자가를 질 때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백합화가 찔리고 찍힐수록 진한 향기를 발한 것처럼 교회와 신자도 마찬가집니다. 반면에 교회와 신자들이 사회로부터,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한 이유는 십자가를 회피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가운데, 이 사회 속에서 교회와 신자가 감당해야 할 십자가가 있는데, 그것을 회피하니까 세상도, 사람들도 교회를, 신자를 회피하는 것입니다. 주목하지 앟는 것입니다. 도리어 무시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리는 사람이 있어야 사람들이 쳐다보고, 따릅니다. 교회 안에 누군가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있을 때 신앙 공동체가 거룩해 지고, 잠자는 영혼이 깨어나고, 모두가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공동체 안에서 십자가를 지는 주인공이 바로 우리 자신이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주님께서 물으실 때에 ‘죽기까지 따르겠습니다.’고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힘들어도, 억지로라도 십자가 지고 가면 하나님은 십자가 지는 동안 감당할 수 있는 은혜와 믿음도 주시고, 또한 축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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