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을 경험하는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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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5,742회 작성일 09-01-11 17:11본문
계4:1~4,10~11
2009. 1/11 11:00
헨리 워드 비쳐(Henry W. Beecher)라는 유명한 설교자가 있다. 그가 뉴욕의 어느 큰 교회에서 주일 설교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주일 직전 갑작스럽게 아파서 못 가게 되었다. 그는 교회와 의논하여 자기 동생 토마스 비쳐(T. Beecher)를 대신 보내게 되었다. 주일 아침, 헨리 워드 비쳐가 올 것을 기대한 이 교회는 초만원을 이루었다. 예배가 시작되고 설교 순서가 되어 담임 목사가 사정을 설명하고 토마스 비쳐를 소개하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며 여러 교인들이 일어나서 나갔다. 그 때 토마스 비쳐는 이런 유명한 말로 설교를 시작했다.
“저의 형님이 갑작스런 병환으로 오늘 이 자리에 못 오게 됨을 제가 대신 사과드립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특별한 광고를 드리고 말씀을 증거하고자 합니다. 지금 예배 중간에 일어나시고 있는 분들 말고, 혹시 또 헨리 워드 비쳐를 예배하기 위하여 오신 다른 분들이 계시다면 지금 이 시간에 다 퇴장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늘 헨리 워드 비쳐가 아닌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였기 때문입니다.”
그 때 밖으로 나가려던 사람들까지 다시 자리에 앉으면서 교회 안은 숙연해졌고, 그 날 예배에 성령의 강한 기름 부으심이 일어났다. 공연장이나 강연회에 참석하는 것과 교회에 가는 것, 그리고 교회에서 예배하는 것의 차이를 분명하게 깨닫게 해주는 사건이다. 토저(A. W. Tozer)는 그의 책 「이것이 성공이다」에서 ‘크고 위대한 예배는 예배당의 크기나 거기에 모인 사람들의 수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니라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바라봄에 있다.’고 했다.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보게 될 때 그 예배 또한 크고 위대한 예배가 된다는 것이다. 저는 지금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가 비록 적은 사람들이 모였을지라도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만 바라보는 위대한 예배가 되기를 바란다.
신학자 칼 바르트(K. Barth)의 말처럼, 예배는 우리 삶 속에서 ‘가장 중대하고도 긴급하며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다. 중요한 일이 많지만 예배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고, 예배보다 더 긴급한 일이 없고, 예배처럼 영광스러운 일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토저는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실패는 예배의 영광을 경험하지 못한데서 기인한다.’고 역설했다. 계시록 4장과 5장은 하늘나라에서 진행되고 있는 예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예배의 영광을 접할 수 있다(본문은 그 일부분이다). 이 시간 본문을 중심으로 참된 예배의 정의를 통해 예배의 영광을 알아보고자 한다.
첫째,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를 고백하는 사건이다(10).
창세기에 야곱이라는 사람이 나온다. 그는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외삼촌 집으로 도망을 가던 중에 루스라고 하는 들판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그때 그는 꿈속에서 하늘에서 땅까지 닿는 사다리와 그 위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는 천사들, 그리고 그 위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게 된다(창28:11~15). 그는 잠에서 깨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붙고 이렇게 고백하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창28:17~18).
도망자 야곱은 광야에 자기 홀로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거기에도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자기가 누웠던 그 곳이 하나님의 전이고 하늘의 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서둘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것이다. 우린 여기서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고 고백하는데서 시작되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 앞에 엎드림이 예배이다.
본문은 사도 요한이 전도하다가 밧모라고 하는 섬에 유배되어 어느 주일에 하나님을 예배하다가 경험하게 된 천상예배의 모습이다. 이는 예배의 가장 중요한 표준이다. 여기서도 하나님의 보좌 앞에 엎드린 예배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10).
여기 24장로들은 신/구약시대의 모든 예배자를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예배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즉 하나님의 임재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내 자신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음을 발견하는데서 예배가 시작된다.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요,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이라(사66:1)고 했다.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 있음을 선포한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의 선언이다. 우리는 지금 이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사람을 신자라고 하고, 그 앞에 엎드리는 것을 예배라고 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임재를 고백하고 그 앞에 엎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직접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일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의 요한이 이를 확인해준다. 본문은 예배를 통해서 요한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두 번째 사건이다. 첫 번째는 1장 10절이다. 그는 유배지에서 하나님을 사모하여 주일에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그 때 성령의 감동과 큰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내가 선 그곳이 주님이 임재하신 곳임을 고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도 중요하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예배하고 있는 이곳이 거룩하신 주님이 임재하신 곳임을 고백하며, 또한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 주님의 임재를 경험해야 한다.
둘째로, 예배는 하나님의 가치를 인정하는 엎드림이다(11).
저는 예배를 이해하는 핵심(key-word)이 바로 ‘가치’라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예배를 영어로 ‘worship’이라고 한다. 그런데 가치란 뜻의 ‘worth’가 이 단어의 어근이다. 본문에서 24장로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앞에 엎드리어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11).
여기서 ‘합당하오니’라는 말이 영어로는 ‘worthy’ 즉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자요 통치자이시기 때문이다. 창조의 경외감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는 이유인 것이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과학과 예배는 동일하게 창조에 대한 놀라움으로 출발한다고 했다. 그리고 5장으로 넘어가면 창조자 하나님에게서 구속자이신 성자 예수님에게로 초점이 옮겨간다.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8).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12).
여기서도 24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렸고, 또 ‘합당하도다.’라는 단어가 나온다. 예수님 역시 우리 예배의 대상이요, 예배를 받으실 가치가 있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를 위해 죽임을 당하신 까닭이다. 우리 예배의 가장 중요한 동기가 바로 이것이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에는 하나님의 가치를 인정하고 언제나 그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셋째로, 예배는 하나님의 품성을 닮게 하는 특권이다(4).
4절을 다같이 읽어보자. 이는 24장로들의 모습에 대한 묘사이다. 그들은 흰옷을 입었고, 금 면류관을 썼다. 성경학자들은, 흰옷은 ‘거룩성’을 상징하고 금 면류관은 ‘영화로움’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거룩성’과 ‘영화로움’은 하나님의 품성, 혹은 속성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신 분이시다. 그런데 어떻게 24장로들이 이 두 가지 품성을 가진 자로 등장할까? 그 이유는 예배와 관련이 있다. 그들이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을 예배하다보니 거룩하고 영화롭게 된 것이다.
어떤 분이 예배를 ‘하나님과의 거룩한 눈 맞춤’이라고 정의했다. 신앙생활이란 일종의 ‘관점훈련’이다. 즉 바라봄의 훈련이다. 세상을 바라보고, 육적인 것을 바라보던 눈을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이 계신 천국을 바라보고, 영적인 것을 바라보게 하는 훈련이다. 그 중심에 예배가 있다. 예배는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시키는 것이다. 24장로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성품을 닮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바라봄의 법칙이라고 한다. 우리는 바라보는 대상을 닮는다. 부부가 서로 닮은 이유. 자녀가 부모를 닮는 이유. 서로 바라보며 살기 때문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이다. 구주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예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하나님을 닮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영광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누리는 특권이다.
넷째로, 예배는 하나님께 나의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것이다(10).
유명한 이중섭(1916~1956) 화백의 일화이다. 한번은 그의 절친한 친구가 병원에 입원했는데, 며칠이 지나도록 문병을 가질 않았다. 아니 갈 수가 없었다. 생활이 궁색하여 선물을 준비할 형편도 못되고, 그렇다고 빈손으로 갈 수도 없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그는 천도(天桃)복숭아 그림을 그려서 병원에 있는 친구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 그림을 내밀었다.
“내 정성일세. 실은 이걸 가지고 오느라고 늦었네. 별거 아니지만 받아주게. 천도를 그린거야. 이 복숭아를 먹으면 무병장수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니 마음으로라도 이걸 먹고 빨리 일어나게.”
여러분, 이 화백의 이 마음 정말 감동적이지 않는가? 무엇으로 이 마음을 비하겠는가? 분명 이것은 친구의 마음에 영원히 남는 최고의 선물이었을 것이다. 우리 예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점이 바로 이 ‘드림’이다.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고 정성을 드리고 몸을 드리는 것이다.
10절에 24장로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엎드리어 자기의 면류관을 그 보좌 앞에 던지는 모습이 나온다. 이는 고대 세계에서 한 나라의 왕이 다른 나라의 왕에게 정복당했을 때 완전한 항복과 복종, 그리고 헌신의 표시로 자신의 왕관을 벗어 승자의 발 앞에 던지던 관습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예배는 임재를 고백하고, 가치를 인정하며 엎드려서 잠잠히 바라봄으로만 끝나지 않고, 나아가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면류관을 벗어던지는 드림의 정신이 반영되어야 한다. 완전한 항복과 복종, 그리고 헌신의 정신이 반영되어야 참된 예배이다. 찬양을 드리고, 기도를 드리고, 사랑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시간을 드리고 마음을 드리고 정성을 드리는 것이다. 합당하신 그분께 나의 최선을 드리는 것, 그것이 바로 예배이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영국 국민들은 깊은 절망과 불안, 그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전쟁에는 승산이 없어 보였고 독일의 점령은 시간문제로 예측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영국 지도부는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영국이 독일을 대항하여 개전을 선언하면서 처칠(Winston L. S. Churchill)은 당시 성공회의 주교 윌리암 템플(W. Temple)에게 대 국민 연설을 부탁한다. 그 때 템플 주교는 이렇게 연설을 시작했다고 한다.
“국민 여러분,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입니다. 전쟁은 큰일입니다. 그러나 예배는 더 큰 일입니다. 만일 우리 국민이 이와 같은 때에 진정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면,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을 믿을 수가 있다면 전쟁은 결코 큰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능히 우리가 예배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그 이후 주일마다 영국의 모든 교회는 종을 울렸고, 교회마다 예배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리고 과연 영국은 치열한 전선에서 마침내 승리할 수가 있었다. 우리 역시 템플 주교의 이 말을 깊이 새겨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자동차에 작은 바퀴를 달면 속도는 줄지만 힘은 강해진다. 반면 큰 바퀴를 달면 속도는 빨라지지만 힘은 약해진다. 즉 바퀴의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속도가 빨라지는 반면 힘은 약해지는 것이다. 우리 인생도 역시 마찬가지다. 영혼의 중심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멀어지면 삶의 속도는 빨라질지 몰라도 영적인 힘이 약해짐을 기억하자.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많은 신자들까지 속도에만 관심이 있고 힘에는 관심이 없다. 바쁘거나 힘들 땐 가끔씩 빼먹어도 되는 것이 예배가 아니다. 바쁠수록 힘들수록 우선순위에 두어야 하는 것이 예배이다. 그래서 누구도 넘볼 수 없고 무엇에도 무너지지 않는 강력한 영적 힘을 가져야 한다. 예배의 성공이 인생의 성공임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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