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 위해 받은 '사랑'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165회 작성일 09-03-15 16:17본문
주기 위해 받은 ‘사랑’
갈5:22~23
09. 03/15. 11:00
치료약이 없는 ‘병’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새로운 치료약들이 쏟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치료약이 없는 질병’이 많다. 이 병도 그 중에 하나이다. 무슨 질병인지 맞춰보기 바란다.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 벌레를 보면 때와 장소를 구분하지 않고 평소보다 오버하면서 비명을 지르고, 밖에 나가면 사람들의 시선이 온 통 자기에게만 집중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경복궁에 가면 자기 집에 온 것처럼 편하게 생각하고, 만 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세종대왕을 보고 아버지처럼 느낀다. 그리고 밤11시 59분만 되면 괜히 안절부절 못하면서 재수 없는 행동을 한다. 무슨 질병일까? 공주병, 혹은 왕자병이다. 이 병의 문제는 ‘모든 것의 중심이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일종의 자기(아)중심적인 병이다. 누군가를 배려하고, 생각하기보다는 자기가 주목 받아야하고, 중심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것이 인간의 깊은 죄성이고, 모든 불행의 출발점이다.
‘사랑’이 유일한 치료약
이런 질병은 어떤 약물이나 사상, 학문으로도 치료가 불가능하다. 오히려 병을 더욱 강화시킬 뿐이다. 오직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만이 유일한 치료제(治療劑)이다. 예수님의 삶은 자기중심이 아닌 타인중심이었고,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삶이었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눈길과 발길, 손길이 머문 곳을 보라! 그곳은 한결같이 ‘받는 자리가 아니라, 베풀고 주는 자리’였다. 이것이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의 특징이다(눅4:18-19 참조). 이것을 한 단어로 ‘사랑’이라고 표현한다.
지난주일 성령의 열매인 ‘사랑’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면서, 사랑의 삶을 위한 5가지 실천원리를 소개하였다. 그 첫 번째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라. 즉 ‘경험된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말씀이었다. 이것은 우리가 사랑의 삶을 실천하는 중요한 원리이면서 동시에 우리 기독교 사랑의 특징이다. 그것은 ‘주기 위해서 받은 사랑’이다. 물론 먼저 받아서 경험을 해야 남에게 베풀 수 있지만 주는 것을 전제로 받은 것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요12:24)처럼 이 사랑은 주고 나누고 베풀수록 커지고 풍성해 진다. 그렇다면 이 사랑을 어떻게 나누고 베풀까?
1. 가까운 사람부터 사랑하라.
본서 6장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10)고 말한다. 여기서 바울은 사랑 나눔의 중요한 원칙을 이야기하고 있다. ①기회 있는 대로 하라(항상 베풀면서 살라). ②모든 이에게 하라(사람 가리지 말고 누구에게나 베풀어라). ③먼저 믿음의 가정들에게 하라(우선순위에 따라서 하라). 연못에 돌을 던지면 돌이 떨어진 곳에서부터 물결이 일어나 온 연못으로 퍼지는 것처럼 사랑도 그렇게 베풀라는 것이다. 내 자신을 사랑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가족, 친척, 목원, 교회지체 등. 이렇게 나와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게, 또한 가까운 곳에서부터 사랑을 베풀라는 것이다. 이것이 순리고 상식이다. 그래서 바울은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5:8)고 하였고, 사도 요한도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1요4:20)고 하였다.
오래 전에 방영되었던 ‘모래시계’라는 드라마의 감동적인 한 장면을 기억하고 있다. 강우석 검사의 결혼식 때, 주례를 맡은 부장검사가 주례사에서 한 말이다. 살아보니 상식적으로 사는 것이 쉽지 않더라며 가정이나 직장이나 어디서든지 상식적인 사람이 되라고 한 말이다. 평범한 내용이지만 무척 공감이 되고 감동적이었다. 가까운 사람부터 사랑하라! 이는 누구든지 잘 아는 상식이다. 하지만 실제로 실천하기는 어렵다. 때때로 ‘차라리 남이라면, 모르는 사람이라면 사랑할 수 있겠다.’고 여겨지는 경우가 있다. 도저히 마음이 열리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남들에게는 친절하고 기쁨을 주면서 정작 가정에서 가족에게는 딱딱하고 재미가 없는 사람. 밖에서는 저런 남자(여자)와 사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부러움의 대상이지만 아내(남편)의 입에선 ‘한 번 살아봐라 그런 말이 나오나’ 이런 말을 듣는 경우가 있다. 가까운 사람이기에 더 안 되는 경우가 있다.
지난 주 나누는 중에 어떤 집사님도 이것이 자신의 ‘아킬레스 건’(치명적인 약점)이라고 고백하는 것을 들었다. 이는 이 집사님의 문제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말씀을 드리고 있는 제 자신을 포함해서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특히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나의 사랑이 필요해서 하나님이 내게 보내주신 사람들이다. 나의 사랑을 통해 삶을 아름답게 꽃 피우게 될 것이다. 우리가 섬기는 목장, 교회가 행복하고 아름다운 곳이 되게 하는 비결은 서로 사랑하는데 있다. 우리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기에 가까이하다보면 실망스럽고 부족한 점들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이것 때문에 주님이 나를 이 사람 곁에 두셨구나 하고 생각하며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2. 갚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베풀어라.
사람은 가치를 추구하는 동물이다. 자신이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것에 시간, 열정, 물질 등을 투자한다. 심지어는 사랑도 투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랑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정의인 ‘사랑은 주고받는 것’(give and take)이라는 말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래서 기왕이면 내게 유익이 되는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고, 관계를 맺고자 한다. 하지만 이것이 처세는 될지언정 믿음은 아니고, 세속적인 지혜는 될지언정 참 사랑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상반된다.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을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게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눅14:12~14).
이런 말씀을 보면 가치관의 혁명적인 전환이 없이는 주님을 올바로 따를 수가 없음을 알 수가 있다. 이는 세속적인 가치관을 완전히 뒤엎는 말씀이다. 세상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끼리끼리 사귀고, 나누고, 베풀면서 산다. 위에서 주님이 초청하라고 한 사람들은 우리의 품위와 잔치의 격을 떨어뜨린다고 하여 우리가 의도적으로 피한 사람들이다. 교제까지도 꺼리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초청하여 섬기는 것이 ‘복’이라고 말씀하신다. 참으로 역설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너무도 지당한 말씀이다. 부자는 맛있고 비싼 것을 대접해도 크게 감사하지 않는다. 그는 평소 그 이상의 음식을 먹고, 다음 기회에 갚으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다르다. 평생 처음 받아 본 호의라 감사하고, 먹어보지 못한 음식을 먹게 되어 감사하고, 갚을 능력이 없는데 이런 은혜를 받으니 더욱 감사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자연히 이런 기도가 나오지 않겠는가? ‘주님, 갚을 것 없는 나에게 이런 사랑을 베풀어 준 이 사람에게 복을 주세요. 주님이 기억하셔서 대신 갚아주세요.’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성경은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이라’(마6:20)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신앙을 떠나 투자 면에서 이 보다 더 현명하고 가치있는 투자가 없다. 유한한 물질로 영원에 투자하니 말이다(딤전6:19). 이런 의미에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늘나라에서는 물론 이 땅에서도 잘 살고 잘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야고보 사도는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는 것이 경건(믿음)”이라(1:27)고 했고, 잠언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19:17)고 했다.
어떤 목사님이 교인 가정에 심방을 갔는데 여자 아이가 많은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목사님이 ‘너 인형을 좋아하는구나?’하고 말을 붙였더니, 아이가 ‘목사님도 인형을 좋아하세요?’ ‘어떤 인형을 좋아하세요?’라고 물었다. 목사님이 많은 인형 중에서 어떤 것을 고를까 생각하고 있는 동안 아이가 또 말했다. ‘나는요, 저 인형이 제일 좋아요.’ 그 인형은 팔 다리가 없는 찢기고 상한 인형이었다. 목사님이 왜 찢겨진 인형이 좋은지 물었더니, 아이가 이렇게 대답했다. ‘저 인형은 아무도 사랑해 주지 않으니까요.’ 그 때 목사님은 이 아이를 끌어안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이 아이가 평생 이 같은 아름다운 마음으로 살아가게 해 주십시오. 내게도 이 아이와 같은 이런 아름다운 마음을 주십시오.'
아무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저를 사랑한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소외당하고 갚을 것이 없는 가난한 이웃들을 사랑해야 할 중요한 이유이다. 이것이 또한 주님의 마음이고, 주님이 생명을 바쳐 우리를 사랑하신 이유이다. 나보다 나은 사람을 만나고 싶고, 내 마음에 맞는 좋은 사람 훌륭한 사람과 사귀고 싶고, 내게 조금이라도 유익이 되는 사람에게 베풀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갚을 것이 없는 사람, 사랑받지 못하고, 환영받지 못하는 소외받은 사람에게 베풀고 나누고 챙기는 것이 믿음이고, 사랑이다. 참 사랑은 눈 먼 사랑(blind love), 맹목적인 사랑, 기대하지 않고 베푸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있는 곳에 주님이 계신다.
제 2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은 폐허가 되었다. 나라마다 도시마다 전쟁고아들로 넘쳐났다. 어느 추운 겨울날 아침, 한 미군병사가 런던의 군 기지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길모퉁이를 막 돌아서는데, 한 어린 소년이 빵 가게 앞에서 코를 창에다 대고 있었다. 안에서는 요리사가 빵을 굽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병사는 차를 세우고 소년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소년을 데리고 가게로 들어가 빵을 사서 주었다. 돌아가려는데 소년이 병사의 옷을 잡아당겼다. 병사는 소년을 돌아보았고 소년이 작은 소리로 말하였다.
‘아저씨, 아저씨가 하나님이신가요?’
그렇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 때보다 더 하나님과 비슷해질 때는 없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삶은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주는 것이다. 도종환 시인의 「눈물을 흘려 본 사람은 남의 눈물을 닦아 줄 줄 안다」라는 수필에 나온 말이다. ‘남을 도울 줄 아는 사람은 인생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다. 남에게 베풀 줄 아는 사람은 고생을 알고, 가난을 알고, 삶의 고통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다. 자기의 아픔 때문에 눈물을 흘려 본 사람은 남이 흘린 눈물을 닦아 줄 줄도 안다. 많이 알고 많이 가진 사람이 큰 사람이 아니다. 내가 겪었던 고통으로 남이 겪는 고통을 아는 사람, 내가 아파보았기 때문에 남의 아픔을 나누어 가지려는 사람이 큰 사람이다.’ 신자는 주기 위해 받은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 사랑을 나누고 퍼뜨리는 사람들이 신자이고 교회이다.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해야겠지만 먼저 가까운 곳, 가까운 사람들부터 사랑하고, 갚을 것이 없고, 사랑받지 못하고, 환영받지 못하는 소외받은 사람들을 사랑하자! 이런 사람이 주님 앞에서 큰 사람이고, 이런 교회가 큰 교회이다. 무엇보다도 이런 모습에서 세상은 주님을 보게 되고, 우리가 주님의 제자인 줄을 알게 된다. 목장에서 교회에서 이 사랑을 실천하자!
※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2. 불실기친(不失其親)이란 말이 있습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잃지 말라’는 뜻으로, 즉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잘 하라는 말입니다.
살면서 가까이 있는 사람 때문에 어려움을 당한 경험이 있다면 이야기해 봅시다.
3. 받은 사랑을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지, 혹은 앞으로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에 대하여 이야기해 봅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