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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 선택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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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995회 작성일 09-03-22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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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을 선택하기
갈5:22~23, 빌1:12~18

2009. 3/22 11:00

선택한 기쁨
타겟(A. W. Target)이라는 사람이 쓴 「창」이라는 단편 소설에 나온 이야기이다. 어느 작은 병실에 두 남자가 입원해 있었는데, 한 사람은 폐암말기 선고를 받은 환자였고 또 한 사람은 디스크 환자였다. 디스크 환자는 수술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했지만 폐암 환자는 가끔 자리에 일어나서 창밖을 내다보곤 했다. 병세로 보자면 폐암말기 환자의 상황은 매우 절망적이었으나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있고,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했다. 하루는 디스크 환자가 창밖을 보고 있는 폐암 환자에게 도대체 밖에 무엇이 보이냐고 물었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이렇게 말했다.

“아름다운 호수에 보트와 백조가 한가로이 떠 있고, 호숫가를 산책하는 연인들과 잔디밭에서 놀고 있는 어린아이의 얼굴이 보이네요.”

이 말을 듣고 있던 디스크 환자의 얼굴은 갑자기 분노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는 폐암 환자에게 기쁨이 있는 까닭이 그의 침대가 창문 곁에 있기 때문이고, 자기는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빨리 폐암 환자가 죽어서 나가면 창가의 침대를 차지해야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폐암 환자가 심하게 기침을 하면서 신음하기 시작했다. 디스크 환자는 비상벨을 눌러서 의사를 부를까 하다가 침대를 차지하겠다는 생각에 그대로 두었다. 아침이 밝아올 무렵 갑자기 옆 침대가 조용해졌고, 폐암 환자는 그의 기대대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병원의 허락을 받아 드디어 창문 곁 침대로 옮기게 되었고, 옮기자마자 있는 힘을 다해 침대에서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창밖에는 회색의 콘크리트 담벼락뿐이었다. 그는 그제야 폐암 환자의 기쁨이 환경 때문에 생긴 기쁨이 아니라 그가 선택한 기쁨이었음을 깨달았다.

기쁨은 선택의 문제이다.
우리의 삶은 매순간 주어진 상황 중 하나를 선택해서 이루어진다. 스스로 선택한 것이든 외부적인 강요에 의한 것이든 매순간 선택에 의하여 삶이 결정되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심리학자들은 사람은 매일 150가지의 선택을 하면서 산다고 한다. 현재의 나도 과거의 선택에 의한 것이고, 미래의 나 역시 선택의 결과에 의한 것이다. 그 선택 중에서 잘했다고 기뻐하는 것도 있을 수 있고, 잘못된 것이라고 후회하는 것도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일생은 선택에 의해서 달라질 수 있다. 위 이야기에 나온 폐암 환자처럼 기쁨 역시 마찬가지다. 기쁨을 선택하면 자신이 처한 환경이나 상황에 관계없이 기뻐하게 될 것이다.

빌립보서 본문에 나타난 바울의 모습에서 이를 확인할 수가 있다. 여기서 바울은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and will rejoice.”(1:18)고 하였다. 이는 자신이 처한 환경에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기뻐하는 삶을 선택하며 살겠다는 강한 의지(will)를 표명한 것이다. 지금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혔고, 동역자들과 그가 세운 교회들은 크게 위축이 되어 있는 상황이다. 결코 기뻐할만한 상황이나 환경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는 이런 속에서도 기쁨을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기뻐하고 있고, 앞으로도 기뻐할 것이라고 말한다. 아울러 그는 빌립보교회 신자들에게 기쁨을 선택하여 살 것을 권하였다.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빌3:1).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여기에 나온 ‘기뻐하라’는 말씀의 문법적 시제가 모두 ‘현재 능동태 명령형’으로 되어 있다. 현재형은 계속의 의미가 있고, 능동태 명령형에는 선택과 당위성의 의미가 있다. 어떤 경우에든지 기쁨을 선택하여 기뻐하면서 살라는 의미이다. 링컨은 ‘모든 사람은 자신이 선택한 만큼 행복하다’고 했다. 행복하기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니라 웃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다. 그러므로 기뻐하는 삶은 우리의 선택에 따라 결정된다. 우리가 기쁨을 선택할 때 우리의 삶은 긍정의 에너지로 충만하여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있고, 주변에도 행복을 퍼뜨리는 행복 바이러스가 된다. 그리하여 내 자신과 주변을 천국이 되게 한다.

기쁨은 관점의 문제이다.
어느 대학생이 자기 부모에게 편지를 썼다. 그의 편지는 우리의 관점이 우리의 반응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잘 보여준다.

사랑하는 어머니 아버지께,

오랫동안 편지를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데모 참가자들이 우리 기숙사에 불을 질러, 기숙사가 타던 밤에 제가 가지고 있던 물품들도 다 타버렸어요. 저는 지금 병원에서 퇴원을 했고, 의사들은 언젠가는 시력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말했어요. 불 속에서 저를 구해준 빌이라는 고마운 친구가 기숙사가 다시 지어질 때까지 자기 아파트에서 같이 지내자고 했어요. 빌은 좋은 가정에서 자랐고, 제가 빌과 결혼하게 될 거라고 말씀을 드려도 그리 놀라지는 않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사실 엄마 아빠도 늘 손자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셨잖아요? 그러니까 다음 달에 손자를 보시게 될 거라고 말씀드리면 거뻐하리라 생각합니다.

추신, 지금까지 쓴 것은 작문 연습이었어요.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불은 나지 않았고, 병원에 입원한 적도 없어요. 임신한 것도 아니고 자주 만나는 남자 친구도 없어요. 그런데 불어는 D학점을 받았고, 화학은 F학점을 받았어요. 전 그냥 엄마 아빠가 긍정적인 관점으로 이 소식을 받아들이실 거라 믿고 싶어요.

이 편지를 받아들고 읽고 있는 이 학생의 부모를 생각해 보라. 놀라움, 실망, 분노의 모습에서 안도, 기쁨, 웃음으로 변했을 것이다. 관점이 이런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자신의 내적인 문제를 비롯하여 가정, 직장, 교회 등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우리의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결국 관점의 차이가 인생의 차이를 만든다. 즉 같은 사건이나 사물을 보는 관점의 차이가 삶의 방향, 질, 그리고 태도를 결정한다. 흔히 재능과 배경을 성공의 요소라고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관점이다.

빌립보서 본문은 바울의 관점을 잘 보여준다. 바울의 투옥은 그의 동역자들과 교회들에게 큰 걱정거리였다. 심지어는 이를 복음의 실패로 여기며 낙심한 사람들도 있었다. 게다가 평소 바울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여 감옥에 갇힌 바울에게 심리적인 고통을 주려고 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의 이 투옥 사실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해석한다. 지금까지 주님을 위해, 복음을 위해 일한 자신이 감옥에 갇힌 것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하고 있다. 자신의 매임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는 12절 말씀은 그의 관점을 잘 보여준다. 그 이유는, ①그가 갇혀 있는 로마시위대 안에 복음이 전파되게 되었고(13), ②다른 형제들에게 복음전파에 대한 강한 동기부여가 되었으며(14), ③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나쁜 동기에서 복음을 전했지만 결국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라(18)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은 기쁘고, 앞으로도 기뻐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관점으로 인생을 사는 사람에게는 죽음도 문제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21).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5:3)라고 고백한 것이다. 이 말은 환난을 즐긴다(a masochist)는 말이 아니다. 어떤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도 긍정적이 된다는 뜻이다. 이 본문에서 보여준 바울의 태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내적인 기쁨을 잃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위로와 격려를 받아야 할 자리에 있는 그가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있다.

그렇다. 앞에서 행복하기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니라 웃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라고 했다. 우리 인생,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마음을 툭 터놓고 웃을 만큼 기뻐할 일들이 별로 없다. 기쁜 일 뒤에 슬프고 우울한 일이 따르고, 행복한 일에 이어 불행한 일들이 터진다. 그래서 인간만사(人間萬事)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한 것이다. 기쁨이란 문제가 없고, 고통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고통이 있고, 문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 비결이 바울처럼 올바른 삶의 관점을 갖는 것이다.

기쁨은 신앙의 문제이다.
우리는 수많은 사건과 사고 속에서, 파도처럼 밀려오는 염려와 걱정거리 속에서 살고 있다. 이런 삶 속에서 기쁨을 선택하고, 그 가운데서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관점을 갖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여기엔 중요한 전제가 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이다. 바울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 즉 어떤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도 긍정적이 된다고 고백했는데, 이것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롬8:28)에 대한 신앙에 기초한 것이다(롬5:3,4). 환난이라고 하는 현상 너머에 있는 엄청난 하나님의 복을 보는 눈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눈을 갖게 하는 것이 신앙이다. 바로 이 신앙이 우리로 하여금 기쁨을 선택하게 하고, 기뻐할 수 있는 관점을 갖게 한다. 그래서 웨더헤드(Weatherhead)는 ‘기쁨의 반대는 슬픔이 아니라 불신앙이다’라고 했다.

‘죠이(JOY)선교단’이라는 선교단체가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신을 JOY라는 단어 알파벳으로 표현한다. ‘J=Jesus first, O=Others second, Y=You third.’ 참된 기쁨은 ‘Jesus first’ 예수님을 우리 삶의 첫 번째가 되게 함에 있다. 영어에는 이런 표현이 있다. ‘Know Jesus, Know Joy. No Jesus, No Joy’(예수님을 알면 기쁨을 알고, 예수님이 없으면 기쁨도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참된 기쁨의 원천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성령의 열매인 기쁨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시고, 또한 우리의 기쁨을 충만케 하시는 분이시다(요15:11).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 있을 때 기쁨을 알고, 기쁨을 선택하고, 기뻐할 수 있는 관점을 가질 수가 있다.

2000년에 개봉된 짐 캐리(Jim Carey) 주연의 「어떻게 그린치가 성탄절을 훔쳤는가?」란 영화가 있다. 그린치는 털이 많은 초록 심술쟁이 괴물이다. 어느 날, 그린치는 높은 산에서 후빌(Whoville) 시내를 내려다본다. 후빌 사람들은 성탄절을 매우 사랑했다. 그들이 성탄절 준비에 바쁜 것을 보고, 그린치는 성탄절의 기쁨을 빼앗으려고 성탄절 나무를 비롯해서 모든 선물을 훔친다. 그렇게 훔친 후에 그린치는 후빌 사람들이 슬퍼하며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려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고 기쁨이 가득한 모습뿐이었다. 그린치는 너무 화가 나서 이렇게 외친다. ‘어떻게 성탄절 나무와 선물을 훔쳐도 사람들이 기쁨을 잃지 않는가?’ 그래서 성탄절의 기쁨을 막으려고 여러 다른 방법을 동원했으나 막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그린치는 고백한다. ‘성탄절의 기쁨은 선물이나 다른 어떤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구나! 아마 성탄절은 보다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해!’

초록 괴물도 그 나쁜 머리를 가지고 환경과 기쁨은 관련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였다. 그런데 아직도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참 많다. 초록 괴물 그린치처럼 세상은 우리에게서 기쁨을 빼앗으려고 안달이다. 그래서 기쁨이 없는 신앙생활, 예배생활, 목장모임, 성경공부, 섬김, 가정생활, 직장생활, 사회생활을 하도록 한다. 여기에 휘둘려서는 안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결박하여 추방시켜야한다. 그리고 믿음 안에서 날마다 순간마다 기쁨을 선택하고 기뻐하는 관점을 가져야한다. 그래서 환경이나 상황에 관계없이 항상 기뻐하는 모습을 갖자. 이것이 성령의 두 번째 열매 ‘희락’(기쁨)이 주는 메시지이다.


※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1. 당신의 선택들 중에서 가장 좋은 선택(혹은 후회가 되는 선택)은 무엇입니까?
2.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기뻐하는 바울의 모습에서 당신이 배워야 할 점은 무엇입니까?
3. 삶 속에서 ‘기쁨 선택하기’를 위한 당신의 구체적인 결단을 이야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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