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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은 '사랑'의 승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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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057회 작성일 09-04-12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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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은 ‘사랑’의 승리이다.
마28:1~10

2009. 4/12(부활주일) 11:00

구기자 인생, 피자 인생.
어느 가정 이야기이다. 남편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무엇으로도 그 구겨진 남편의 얼굴이 펴지지 않았다. 아내는 걱정이 되어 원인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최근에 남편에게 달여 먹인 한약이 문제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 한약 이름이 무엇이었을까? ‘구기자’다. 구기자를 달여 먹였더니 그만 남편의 얼굴이 구겨져 버린 것이다. 이제 아내는 어떻게 남편의 얼굴을 펼까 고민하였다. 드디어 묘안(妙案)이 떠올랐다. 아내는 남편에게 선물을 하나 주었다. 그랬더니 남편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아내가 남편에게 준 선물은 무엇이었을까? ‘피자’다. 아내는 구자기로 구겨진 남편의 얼굴을 피자로 활짝 펴 주었다.

인간사가 항상 그렇지만 요즈음 국/내외적으로 계속해서 불행한 사건들이 겹쳐 사람들의 얼굴이 펴질 날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서로 힘을 모으고 있지만 쉽게 그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염려만 더 깊어가고 있는 것 같다. 방법은 예수님 앞으로 나오는 것이다. 예수님은 구겨진 인생, 구겨진 삶을 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특히 주님의 부활은 ‘구기자’ 인생을 ‘피자’ 인생으로 변화시키는 중요한 사건이다. 우리 모두 주님의 부활을 통하여 구기자 인생에서 피자 인생으로 변할 수 있기를 바란다.


부활은 승리이다.

다같이 본문 2절을 읽어보자!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러 내고 그 위에 않았는데

이는 첫 부활절 새벽에 일어난 상황묘사다. ①예수님의 부활이 사람들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신적 사건임과, 또한 ②부활의 승리를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는 말씀이다. 세상은 권력을 이용하여 주님을 죽였고, 또한 무덤에 묻었다(마27:60). 돌로 그 무덤 문을 막고 그 위에 인봉(印封)하고, 또한 병사들로 지키게 했다(마27:66).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천사를 통하여 그 돌을 굴러 내시고, 대신 천사로 하여금 굴러낸 돌 위에 앉아 빈 무덤을 증거하게 하셨다. 즉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게 하셨다. 여기서 ‘돌’은 세상 권세의 상징이고, 그 ‘돌을 굴러 냈다’는 것은 그 어떤 세력도 주님을 무덤 속에 가두어 둘 수가 없음을 의미한다. 모든 권세에 대한 주님의 완벽한 승리를 보여준다. 주님의 부활은 모든 어둠(Darkness)의 세력에 대한 빛(Light)의 승리, 죽음(Death)의 세력에 대한 생명(Life)의 승리, 미움(Dislike)의 세력에 대한 사랑(Love)의 승리이다(3D에 대한 3L의 승리).

당시 십자가는 저주와 형벌의 상징, 죽음과 멸망의 상징이었고, 치욕과 실패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부활을 통해 십자가의 의미가 완전히 바뀌었다. 저주와 형벌의 상징이 축복의 상징으로, 죽음과 멸망의 상징이 생명의 상징으로, 치욕과 실패의 상징이 영광의 상징, 영원한 승리의 상징으로 바뀌었다. 이제 십자가는 더 이상 죄수의 형틀이 아닌 승리의 상징이 되고, 승리의 깃발이 되어 온 세상을 덮고 있다. 이것이 부활의 능력이고 부활의 신앙이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M. Luther)는 ‘아무리 험한 시험과 역경이 몰아친다 할지라도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새로운 소망과 용기가 넘친다.’고 했다. 예수님의 부활을 생각하면 낙심과 절망은 떠나가고 어떤 고난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새로운 소망과 용기가 넘친다는 말이다.


미움이 주님을 죽였다.

또한 이 ‘돌’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들을 상징한다(막16:3). 우리가 이 돌을 굴러내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가 있고, 부활 신앙을 경험할 수가 있다. 부활 신앙을 경험하기 위하여 우리가 굴러내야 할 돌들이 많이 있지만 저는 가장 시급한 돌을 ‘미움’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 미움을 단순한 마음의 감정 중 하나로 여기면서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미워하면서도 순간적인 감정 정도로 치부하고 회개해야 할 심각한 죄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성경은 미움을 마음의 살인으로 규정하고 있다(1요3:15). 그리고 미움으로 빗어진 참극이 자주 소개되고 있다(가인과 아벨 이야기, 요셉 이야기 등).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의 미움 때문이었다. 날로 더해가는 예수님의 인기에 비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자신들의 입지에 불안을 느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시기하게 되었고, 이런 시기와 질투는 미움과 증오를 낳았다. 이런 미움과 증오는 예수님의 말씀이나 하신 일들을 모두 왜곡시켰고, 죽일 궁리만 일삼게 만들었다. 그래서 급기야는 십자가라는 당대 최고의 극형으로 예수님을 죽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미움의 심각성과 파괴성을 일깨워 주는 사건이다.


미움은 죽음의 독이다.

최문자 시인의 「미움」이란 시가 있다.

 그는 온 몸이 칼이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칼이 된다.
 그를 품는 자도 칼이 된다.
 세상은 물처럼 돌아가도
 그는 얼어서 흐르지 않는 물이 된다.

 그가 있어서
 세상은 늘 얼룩지고
 그가 있어서
 비명은 물소리처럼 가깝다.

 그는 불면증이라 잠들 수 없다.
 저 홀로 누워
 함부로 눈뜨고
 깊은 병 앓다가
 흐를 피의 깊이를 지니고 있는
 사시사철 영롱한 칼이다.

시인은 미움을 자신을 찌르고 다른 사람을 찌르는 ‘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세상을 얼어붙게 하고 세상을 얼룩지게 하고 세상을 비명의 소용돌이로 만드는 칼이라고 한다. 미움에 대한 간단하면서 명쾌한 정의다. 미움이 얼마나 파괴적이고 치명적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미움은 단순한 마음의 감정이 아니다. 미움은 칼이다. 밤낮없이 자신과 다른 사람을 찌르고, 피를 흘리고, 죽이는 칼이다. 황석영의 「손님」이란 소설이 있다. 황해도 신천에서 있었던 양민학살사건을 배경으로 한 것인데, 기독교 신자들인 우익과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좌익 사이의 갈등으로 45일 간 45,000명의 양민이 학살되었다. 여기서 작가는 묻고 있다. ‘선한 것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던 것이 어떻게 악독한 열정으로 변질되었는가?’ 사실 기독교와 공산주의 하나의 뿌리고, 둘 다 선한 것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말이다. 그것은 ‘미움과 증오’ 때문이다. 미움과 증오에 사로잡히면 선한 것에 대한 믿음도 악독한 열정으로 변질된다. 아무리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영광, 사랑, 인민을 위한 행복한 세상을 부르짖어도 그것은 한낱 구호일 뿐 결국 서로에게 찌르는 칼이 된다.

미움은 죽음의 독이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자신과 그 사람을 끝없이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지난 2008년 11월에 미국 애리조나에서 8살 소년이 아버지를 총으로 살해사건이 발생했다.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증오가 이런 끔찍한 결과를 초래했다. 이 아버지는 아이에게 자주 폭력을 행사했고, 아이는 그 때마다 아버지에게 맞은 매의 수를 일기장에다 적었다고 한다. 그리고 천 대가 되면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자기 아버지를 살해한 날 저녁에 숙제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매를 다섯 대를 때렸고, 그 다섯 대의 매를 합하니 모두 천 대가 되었다. 그래서 이 아이는 곧 바로 아버지를 총으로 살해했다. 미움 때문에 아버지를 죽인 순간 이 아이의 인생도 죽은 것이다. 이것이 미움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미움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최대의 장애물이다. 부활의 영광을 차단하고, 주님의 은혜와 축복을 가로막는 방해물이다. 우리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파괴하는 독소이고, 아름다운 인간관계의 원수이다. 찡그림이 얼굴의 독이라면 미움은 마음의 독이다. 얼굴의 독을 제거하는데 특효약은 웃음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마음의 독을 제거하는 특효약은 무엇일까?


사랑이 치료제이다.

그것은 사랑이다. 용서이고, 이해하는 마음이다. 사랑처럼 우리의 마음을 윤택하게 하고, 빛나게 하는 것이 없다. 사람들과의 관계, 사람 사는 세상을 아름답게 행복하게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사랑이다. 미움은 복수의 악순환을 낳는다. 그러나 사랑은 복수의 고리를 끊고 새로운 삶을 열어준다. 원수까지도 품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원수일지라도 주리면 먹여주고, 헐벗고 있으면 입혀주고, 상처를 입었으면 치료해 준다. 또한 오른 뺨을 치면 왼편도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려고 하면 겉옷까지 주고,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 동행해(마5:39~40) 준다. 이런 사랑 앞에 미움은 고개를 들 수가 없는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는 이와 같은 삶을 몸으로 보여주신 사건이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극한 고통의 순간에도 자신을 죽음으로 내몬 사람들, 자신에게 모욕을 주고, 찌르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셨고, 또한 용서하셨다. 원수까지 사랑해야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을 몸소 실천해 보이신 것이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진정한 승자는 미움이 아니라 사랑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사랑의 삶이 승리의 삶인 것을 증명하신 것이다. 우리 역시 부활의 믿음, 부활의 능력을 가질 때 미움을 극복하고 사랑으로 승리할 수가 있다. 부활의 신앙으로 충만할 때 미움이나 증오와 같은 돌들이 사라지고, 사랑과 용서가 가득 한 삶을 살 수가 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질 때 미움으로 구겨진 우리 인생이 사랑으로 활짝 펴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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