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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이루어 내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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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266회 작성일 09-04-19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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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이루어 내는 삶
갈5:22~23, 롬12:14~21

2009. 4/19 11:00

나 지금 아파요.
존 맥스웰(J. Maxwell) 목사의 「신뢰의 법칙」이란 책에, 상대방의 고통을 이해하고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선 먼저 다음 네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상처를 받고 있다.
◈ 상처받은 사람은 남에게 상처를 잘 준다.
◈ 상처받은 사람은 남에게 쉽게 상처를 받는다.
◈ 상처받은 사람은 자신에게도 상처를 입힌다.

건강하고 올바른 관계를 위해선 먼저 상대방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기중심적인 일방성은 관계의 독(毒)이다. 상대방의 형편이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일방적인 것은 자기만족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상대방에겐 불편하고 불쾌할 수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맥스웰 목사의 제안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 성령의 열매 화평에 대한 첫 설교에서 화평의 종류를 세 가지로 소개하였다. 첫째는 영적인 평안(하나님과의 화목), 둘째는 정서적인 평안(마음의 평화), 세 번째는 관계적인 평안이 그것이다. 하나님과 화목을 이룬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정서적인 평안을 선물로 받았고, 아울러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해야 할 사명을 받았다. 이는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고, 그들과 올바른 관계를 만들어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것이다. 이 시간 우리 신자의 사명인 관계적인 평안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우리 평화를 위하여.
로마서 12장은 ‘성도의 자세’라는 주제로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①하나님께 대한 자세(1~2), ②교회생활에 대한 자세(3~13), 그리고 ③사회생활에 대한 자세(24~21)이다. 본문은 사회생활에 대한 성도의 자세로,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18)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팔복을 말씀하실 때 일곱 번째 복으로 이를 말씀하셨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마5:9).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됨을 나타내는 비결이 평화를 위해 일하는 것,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목하게 사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어떻게 평화를 이루어 낼까?


1. 긍정적인 말을 하라.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1개월 동안 한 마디의 말도 안한다면 세상은 편안해질 것이라는 칼럼이 미국신문에 게재되었다. 하지만 그 칼럼이 신문에 나가자 미국 전역에서 언어학자와 심리학자들이 모르는 소리 그만하라고 윽박질렀다. 만약 인간이 말을 안하고 지낸다면 의사불통으로 인한 오해와 분쟁은 또 하나의 세계대전을 불러올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그렇다. 말은 모든 관계의 끈이고 수단이다. 말 때문에 관계가 친밀해지기도 하고, 말 때문에 깨지기도 한다. 말 때문에 격려를 받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한다. 사람들 사이의 평화 역시 사소한 말 한마디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본문은 이웃과의 평화로운 관계를 위해 먼저 말의 올바른 사용을 말씀하고 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14).

살다보면 우리에게 우호적인 사람만 있지 않다. 때로는 우리에게 적대적인 사람도 있다. 본문은 비록 우리에게 적대적이고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긍정의 말을 하라’는 것이다. 어느 경우에서도, 누구에게라도 축복하는 긍정의 말을 해야 한다. 우리의 악한 말, 독한 말, 나쁜 말, 부정적인 말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다. 긍정의 말은 말하는 자신을 위해서도, 그 말을 듣는 사람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축복의 말, 긍정의 말을 하면 생각과 관점이 그렇게 변하게 된다.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사람도 그렇게 변하게 된다.

상사 때문에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직장인 이야기다. 그의 상사는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아주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상사 때문에 회사를 그만 둘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친구로부터 좋은 조언을 받았다. 야단을 맞을 때마다 그 상사를 축복해 주는 기도를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실천하였다. 어느 날 그는 사소한 일로 상사에게 야단을 맞게 되었고, 그는 속으로 상사를 위해서 기도해 주었다. 물론 상사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계속해서 상사를 축복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상사가 아니라 자신에게 먼저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꾸중을 들어도 상사가 밉질 않았다. 오히려 상사를 이해하게 되고,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상사를 대할 때도 언제나 밝고 상냥한 모습으로 대할 수가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본 그의 상사도 그를 대할 때 친절한 모습으로 대하게 되었다. 내가 변해야 한다. 내가 변하면 환경도 사람도 문제가 되질 않는다. 그리고 내가 변하면 상대도 변한다. 관계는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평화로운 관계는 우리의 말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고 아름다운 관계를 맺으며 살기 위해선 상대방을 인정해주고 세워주는 긍정의 말을 하며 살아야 한다. 긍정의 말 중에 최고가 ‘축복’이고 ‘기도’이다. 이것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하는 길이다. 서로 옆 사람에게 긍정의 말을 해보자.

◉ 당신을 주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사랑합니다.
◉ 당신이 있어서 행복합니다.
◉ 당신 때문에 기쁘고 살맛이 납니다.
◉ 걱정하지 마세요. 다 잘 될 것입니다.
◉ 항상 좋은 일만 있기를 기도합니다.


2. 긍정적인 일에 솔선하라.

어떤 심리가 작용해서인지는 모르지만, 어린 시절 지나가는 버스에 돌을 던지거나 차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손짓으로 야유를 보낸 기억이 난다. 때론 이런 장난이 지나쳐서 학교까지 붙들려 와서 선생님에게 야단을 맞은 친구들도 있었다. 선생님에게 야단을 맞고 주의를 받아도 이런 장난질은 그치지 않았다. 철길과 멀지 않은 어느 학교에서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자 선생님 중 한 분이 좋은 생각을 해 냈다. 그는 아이들을 데리고 철길로 나아갔다. 그리고는 기차가 지나갈 때 이렇게 아이들에게 외쳤다. ‘얘들아, 저 기차를 향해서 손을 흔들어 주자!’ 그래서 선생님과 더불어 아이들이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기차에 있던 승객들도 덩달아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때부터 아이들은 손을 흔들어 주는 것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고, 그래서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그러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돌멩이를 던지는 장난질도 없어지게 되었다.

단순히 ‘돌멩이를 던지지 마라.’ ‘욕을 하지 마라.’는 소극적인 태도로는 장난질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손을 흔들어 사랑을 표현하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모습으로 바뀔 때, 자연스럽게 돌멩이를 던지는 장난질이 없어지게 된 것이다. ‘하지 말라’는 소극적(부정적)인 것보다는 ‘하라’는 적극적(긍정적)인 것이 더 효과적이다. 그래서 본문도 긍정적인 말과 함께 긍정적인 일에 솔선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17).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20).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21).

특히 17절의 ‘도모하다’의 헬라어 ‘프로노에오’(본문에서는 분사형 ‘프로노우메노이’로 쓰여 명령을 나타냄)는 ‘미리 생각하다’, ‘간구하다’, ‘몰두하다’의 뜻을 갖는다. 따라서 어떤 일에 반응하여 선을 행하라는 소극적인 명령이 아니고, 미리 솔선수범하여 선을 행하라는 적극적인 명령이다. 이는 ‘선한 일’은 남보다 앞서 생각하며 경쟁적으로라도 이를 행해야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도 적극적으로 선한 일을 행해 보이라는 것이다. 그 예가 20절 말씀이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원수일지라도 솔선해서 사랑을 베풀고 은혜를 베풀라는 것이다. 여기서 ‘주릴 때’와 ‘목마를 때’는 그와 화해할 수 있는 기회이다. 그 기회를 적극적으로 선용하라는 말씀이다. 이것이 서로 평화하는 길(18)이요, 또한 선으로 악을 이기기는 길(21)이다.

구약과 신약은 내용상 차이는 없으나 실천적인 면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십계명을 보면, 4,5계명을 제외 한 모든 계명이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명령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을 모두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명령으로 바꾸셨다(마22:37~39참조). 상대방을 향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와 행동이 자연스럽게 평화를 이루어내는 삶을 살 수 있게 만든다. 상대방이 손을 내밀며 화해를 청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보다 내가 먼저 찾아가서 용서해 주는 것, 비록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솔선해서 도움을 베푸는 것이 더불어 평화하는 길이다. 최용덕의 「오늘 나는」이란 찬양이 있다. 후배와의 불편한 관계를 먼저 해결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하는 마음을 고백한 찬양이라고 한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먼저 손내밀지 못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내가 먼저 웃음주지 못하고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네.그가 먼저 손내밀기 원했고
그가 먼저 용서하길 원했고그가 먼저 웃음주길 원했네.
나는 어찌된 사람인가?
오, 간교한 나의 입술이여!
오, 옹졸한 나의 마음이여!
.
.
.

그러므로 더불어 평화하기 위하여 내가 먼저 웃어주고, 내가 먼저 다가가고, 내가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고, 내가 먼저 용서를 구하고, 내가 먼저 베풀 수 있기를 바란다. 바로 이것이 우리와 화해를 바라셨던 주님의 마음이고, 삶이셨다.

현장부재증명(alibi).
‘현장부재증명’, 이는 수사용어다. 피의자나 피고인이 범죄가 발생한 그 시각에 범죄현장 이외의 장소에 있었음을 증명함으로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또한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보는 방법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없을 때 존재감이 크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 그는 중요한 사람이다. 그가 없으므로 오히려 분위기가 밝아지면서 사람들의 관계가 더욱 화기애애하다. 그 사람은 분명 그곳의 평화를 깨는 사람(peace-breaker)이다. 반면에 그가 없으니 분위가 어둡고 사람들이 따분해하고 그곳을 뜨려고 한다. 그 사람은 그곳의 평화를 만드는 사람(peace-maker)이다. 신자는 누구를 만나든 어느 곳에 있든, 그곳을 즐겁고 행복한 곳, 평안한 곳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행복을 주고 평안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축복의 말, 사랑의 말, 칭찬과 위로의 말, 격려의 말과 같은 긍정의 말을 하고, 긍정적인 일에 솔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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