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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신앙의 특징(06-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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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6,090회 작성일 06-04-23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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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신앙의 특징
요21:5~20

그리스도여, 당신은 오늘
나의 마음속에서 다시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당신은 오늘
나의 관을 깨뜨리고
나의 속에서 다시 생명을 얻으셨습니다.
무덤 속에 가득 찬 광명과 향기
그것은 오늘 나의 영혼에 차는 소망의 기쁨
내일의 광영이외다.
-최효섭 목사의 명상록에 실린 시 ‘부활1’ 중에서

기독교 신앙에는 많은 중요한 교리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 주님의 부활은 바울이 고전15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부활의 사실성과 확실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되고, 믿는 믿음도 헛되고, 거짓 증인으로 낙인(烙印)되고, 여전히 죄 가운데 있게 되며,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 만큼 우리 신앙에 있어서 부활이 중요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성육신 사건이 무한한 존재가 유한한 존재로 된 사건이라면 부활사건은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존재로 되는 존재의 변화사건입니다. 신적 존재였던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기에 지금까지는 시간적 공간적 제한을 받으셨습니다. 그렇지만 부활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은 다시 신적 존재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지셨으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신령한 몸을 입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처럼 말하고, 우리처럼 느끼고, 우리처럼 먹고 마시고, 우리처럼 뼈와 살이 있는 몸을 가지셨으나 어디든 제한을 받지 않고 출입이 가능한 몸, 동시에 여러 곳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주님의 부활은 장차 우리 부활의 모범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여 주님처럼 신령한 존재로 변화되는 것. 이것이 우리 기독교의 신앙이고, 소망입니다. 이와 같이 신비하고 놀라운 사실을 믿는 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저는 이 시간 여러분과 함께 이 부활신앙의 특징들을 가지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부활은 단절을 ‘이음표’로 바꾼 사건이었습니다.
죄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죽음은 곧 단절을 의미합니다. 모든 아름다운 것과의 관계 단절이 죽음입니다. 하나님과 단절, 동료 인간과의 단절,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의 단절. 이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아담의 범죄 이후 하나님에 대하여, 인간에 대하여, 주변 환경에 대한 죽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 관계의 단절은 쓰라린 슬픔이요, 비극 자체였습니다. 이 단절 앞에 모든 인생은 가슴을 찢는 아픔을 갖습니다. 땅이 꺼지는 것 같은 절망감을 경험합니다. 고뇌와 불안과 소외와 고독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이 범죄한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이와 같은 모든 단절된 것을 이어놓는 이음표였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단절의 주범인 죄와 죄의 권세를 멸하시고, 끊어진 모든 관계들을 이어놓으셨습니다.

영원한 존재이신 주님이 유한한 존재로 이 땅에 오신 것, 이 땅에서 비참한 생을 보내신 것, 십자가에서 흉악범처럼 돌아가신 것은 인간의 단절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은 몸소 쓰라린 단절의 고통을 다 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심지어는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단절의 고통까지 경험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고 십자가 위에서 절규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부활은 이음표였습니다. 모든 단절을 참 생명으로, 그 모든 고뇌와 절망을 환희와 희망으로 이어놓은 이음표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단절이 아닌 이음표의 인생을 사는 자들입니다. 아니 이음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의 증인된 삶입니다.

라틴어로 제사장을 폰티펙스(pontifex)라고 합니다. 다리를 놓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다리를 놓는 중개자란 뜻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 신자들의 신분과 사명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니라.”(벧전2:9) 여기서 베드로는 신자들의 변화된 신분 중에 하나가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장이 구별되어 있었습니다. 레위 지파 중에서도 아론의 자손들만이 제사장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철저하게 혈통에 의해 주어진 직분입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모든 신자가 제사장이 된 것입니다(만인 제사장). 즉 모든 사람이 다리를 놓는 사람, 혹은 이음표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부활로 새로운 생명을 얻은 우리는 이음표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성 프란시스의 ‘평화의 도구’란 시처럼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믿음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잇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를 구하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를 구하기보다는 이해하고
사랑을 구하기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잊음으로써 찾고
용서함으로 용서받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둘째, 부활은 마침표를 ‘쉼표’로 바꾼 사건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마침표를 찍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때로는ꡒ죽으면 그만이야ꡓ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죽음을 생의 마침표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흩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님을 증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은 마침표를 쉼표로, 끝을 시작으로 바꾸어 놓은 사건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죽음을 잔다고 표현합니다. 혹은 쉰(안식한다)다고 표현합니다. 잔다고 하는 것은 다시 깨어나게 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깨어나기 위해 잠시 쉬고 있는 것이 죽음인 것입니다. 그러니 죽음은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인 것입니다.

쉬는 것은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새롭게 준비하는 것입니다. 주변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쉰다는 것에 대하여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쉬는 것을 노는 것으로 생각하여, 쉼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거나 방종과 방탕의 시간으로 잘못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휴일 후유증이라고 하는 기이한 사회적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일하는 제자들(이-랜드 사보)에 따르면 건강한 쉼을 ‘4R’(Retreat/퇴각, 물러섬, Refresh/재충전, Reflect/ 반성, 돌아봄, Recreate/재창조)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건강한 쉼은 일단 하던 일에서 물러서기는 하지만 지금까지의 일을 반성하면서 재창조를 위한 재충전의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쉬는 것은 멈추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준비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부활은 죽음으로 치닫는 역사의 흐름을 완전히 생명의 물길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인간의 무능을 가능의 현장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역사가 있는 곳엔 절망이란 단어는 사라지게 되고, 생명의 역사 살리는 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처럼 주님은 이루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닫고 봉하나 주님은 여십니다. 닫고 봉한 무덤을, 우리 인생의 막힌 장벽을 여시고 영광된 미래를 열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접었으나 주님은 우리의 날개를 펼쳐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길이 막혔어도, 우리가 실패했어도, 우리 앞이 막막해도,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오른편 강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절망의 순간에 부르짖었더니 새로운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실패한 베드로도 마찬가집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욕하면서 부인하는 씻을 수 없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회개함으로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실패의 현장은 시작의 현장이었습니다.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였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고 있는 한 우리 역시 마찬가집니다. 우리의 삶에 마침표는 없습니다. 그저 쉼표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증인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이웃을 볼 때에도 이런 시작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 사람의 현재적 삶에 마침표를 찍지 않고, 항상 쉼표를 찍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께서 그의 삶을 통하여 이루시게 될 가능을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우리 기뻐하는 교회나 저를 볼 때 마침표를 찍지 마시고 쉼표를 찍어 주십시오! 그리고 기대하면서 기도로 후원하여 주십시오. 지체들 상호간에도 마찬가집니다.

셋째, 부활은 흩어짐(分散)을 ‘묶음표’로 바꾼 사건이었습니다.
주님이 잡히시자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옛 생활, 옛 고향, 옛 직업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다들 자기 길로 가버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 중에 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을 찾아가셨습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갈릴리 호숫가로 가셨습니다. 흩어진 제자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곳은 지난날 주님께서 그들을 불러 “나를 따르라”고 하셨던 곳입니다. 그때 그들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심지어는 부모형제까지 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다시 이곳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주님을 따르는 일에 실패했다는 말입니다. 또한 그들은 그날 밤 고기 잡는 일에도 실패했습니다. 주님이 없는 인생, 주님을 떠난 인생이 어떠함을 잘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들이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처럼 주님은 그들을 부르시고, 그들의 실패를 풍요로 바꾸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밤새 수고한 그들을 위해 사랑의 식탁을 마련해 놓으시고, 주님 앞에 모이도록 하셨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그 아침의 식탁입니다. 하나는 주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은혜의 생선으로, 하나는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잡은 기적의 생선으로 마련된 식탁입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님과 실의에 젖어 있다가 다시 은혜를 입은 제자들과의 은혜로운 식탁입니다. 또 주님께서 떡과 생선을 저희에게 직접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모습은 며칠 전, 마가의 다락방에서 가졌던 최후의 만찬 때의 감격을 회상하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몬을 향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면서 그의 사랑을 확인하셨습니다.

우리도 지난 주일에 성찬식을 가졌는데, 성찬이 갖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위해 살을 찢고 피를 흘려서라도 구원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행에 빠지고 비극에 빠지도록 내버려두거나 포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것이 성찬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은 묶음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생명, 주님과 함께하는 삶, 절대로 주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관계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나와 네가 남남이 아닌 한 공동체요, 한 묶음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 성찬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이후 제자들의 삶을 통해 주님의 부활이 묶음표임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이후 제자들은 결코 흩어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한 마음으로 모여 기도하였습니다. 그 결과 오순절의 성령강림 역사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한 마음으로 모여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 중에 또 가이샤라의 오순절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들은 모여서 주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고, 전도하고, 서로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에서도 모이고, 각 가정을 돌아다니면서도 모였습니다. 이렇게 우리 기독교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당시 교회를 보면 서로 한 덩어리로 묶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상호간에 이질적인 요소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가 된 것은 부활신앙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그들을 한 덩어리로 만든 것입니다. 부활은 묶음표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성도의 삶은 공동체성과 일체성을 지향해야 합니다. 어떤 환경에 놓여 산다고 해도 부활의 생명과 연합된 존재임을 분명히 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곧 능력의 삶이요, 풍요로운 삶이며, 승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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