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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삶을 살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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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5,546회 작성일 09-05-24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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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삶을 살아가기                                                                                                                                                  

마5:14~16

2009. 5/24 11:00

세 아들

늦게 주님을 믿게 된 아버지가 다른 지방에 사는 세 아들을 불러 주일마다 교회에 나갈 것을 당부했다. 아들들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주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한 달이 지난 후 아버지는 세 아들을 다시 불러서 교회 나간 후 달라진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큰 아들은 자신의 삶이 보다 경건해졌고 사업도 잘된다고 말했다. 둘째는 덕분에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나서 더 이상 외롭지 않다고 했다. 그런데 셋째는 오지도 않고 대신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에는 요즘 마을의 장애우들과 노인들을 돌보느라고 도저히 갈 수가 없다며 죄송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 세 아들 중 누가 믿음 안에서 변화된 참된 신앙인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세 명 모두 의미 있는 변화를 경험하고 있긴 하지만 가장 아름답고 참되게 변한 사람은 셋째다. 야고보서의 기준에 의하면 셋째 만 믿음 안에서 변화된 참된 신앙인이라 할 수 있다(1:27). 사실 믿는다는 것은 ‘주인이 바뀐 것’을 의미한다. 자기가 주인(실제는 사단이 주인이고 자기는 그 하수인)인 삶에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삶을 뜻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삶의 중심이 바뀐 것이다. 자기중심에서 주님중심으로 삶의 중심이 이동한 것을 믿음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삶의 주인이 바뀌고 중심이 바뀌면 삶도 바뀌게 된다. 그러므로 믿음의 삶에는 반드시 변화가 있기 마련이고, 그것은 셋째 아들처럼 행동의 변화로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2:26).

 

양선(良善)에 대하여

이 시간은 성령의 여섯 번째 열매 ‘양선’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한다. 양선은 자비와 의미상 별 차이가 없다. 둘 다 ‘행동하는 사랑’인데, 양선이 자비보다 더 구체적이고 행동적이다. 그래서 자비는 ‘선한 마음의 표현’이라 하고, 양선은 ‘선한 행동의 표현’이라고 한다. 양선을 헬라어로 ‘아가도쉬네’라고 한다. 영어는 이를 ‘goodness’(선행)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번역성경 중에 표준새번역은 ‘선함’으로, 공동번역은 ‘선행’으로 각각 번역하고 있다. 그러므로 문자적으로 양선은 ‘선을 베푸는 것’이다. 즉 선한 삶을 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참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비결이고, 신자와 교회가 실천해야 할 중요한 덕목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왜 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1. 신자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다.

본문은 신자를 빛에 비유하고 있다(14). 이는 이 세상에서 신자의 존재가치를 확인시켜 주는 말씀이다. 빛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들의 생존을 위해 중요한 필수품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가장 먼저 빛을 창조하신 것을 통해 그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빛이 있기 전 이 세상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창1:2). 무질서와 무의미, 어둠으로 가득 찼다는 뜻이다. 즉 의미도 존재도 확인할 수 없는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빛이 있음으로 질서가 생겨나고, 공허한 곳에 의미로 채워지고, 어둠이 사라지면서 그 존재가 드러나게 되었다. 요한은 예수님이 바로 ‘그 빛’(the light)이라고 하였고, 예수님은 신자 역시 ‘빛’(light)이라고 하셨다. 이렇게 소중한 것에 신자를 비유한 것은 이 세상에서 신자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강조하고, 동시 신자의 사명(존재의 이유와 목적)을 보여준다.

울리지 않는 종은 종이 아니다. 울려야 종의 가치가 드러나고, 이것이 종의 존재 이유이고 목적이다. 비추지 않는 빛은 빛이 아니다. 빛은 빛을 발하여 세상을 밝히기 위해 존재한 것이다. 이것이 빛의 존재 이유이고 목적이다. 사실 무엇이든 그 목적대로 쓰임을 받을 때 그 가치 또한 더욱 드러나게 된다. 신자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주님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선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16).

이는 주님이 우리를 소중한 존재로 부르신 이유이고 목적이다. 여기서 빛은 선한 행실이고, 그 빛을 비추는 것은 선한 삶을 사는 것이다. ‘세상의 빛’(14), 곧 세상을 위한 빛으로서 어두운 세상을 밝히고, 병든 세상을 치유하는 빛의 사명을 다하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이 빛 된 신자의 삶을 보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것이다. 즉 신자의 선한 행실을 보고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구원을 받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신자와 교회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다. 사실 행복이란 자신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발견하는 것이고, 그것을 성취한 것을 성공이라고 한다. 신자의 행복과 성공도 마찬가지다. 빛 된 사명을 감당하여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최고 행복이고 최대 성공인 것이다.

 

2. 악을 이기는 방법이다.

*왕따 소년 앤드류 동영상 보기

로마서 12장에서 바울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21)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방법까지 제시하고 있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17)는 것이다. 여기서 선을 도모한다는 것은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는 것’(:20)이다. 즉 선을 베푸는 것이다. 선을 베푸는 것이 악을 이기는 비결이라는 말씀이다. 어거스틴(St. A. Augustinus)은 악을 ‘선의 부재’(不在)라고 정의하였다. 선이 있는 곳에 악이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사라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래서 본문에서 주님은 빛을 드러내 비추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장자(莊子)도 비슷한 말을 했다. ‘一日不念善(일일불염선)이면 諸惡(제악)이 皆自起(개자기)니라.’ 하루라도 선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모든 악한 것이 다 저절로 일어난다는 뜻이다.

프랑스의 정치가요, 작가인 빅톨 위고(V. Hugo)는 인간에게는 세 가지 싸움이 있다고 했다. ‘첫째는 자연과 인간의 싸움이고, 둘째는 인간과 인간의 싸움, 셋째는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했다. 그리고 인간의 자기와의 싸움을 그린 작품이 그 유명한 「레미제라불」이다. 작가는 여기서 인생의 적(敵)은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도 있다는 것과, 그것은 바로 선과 악의 싸움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싸움에서 승리하는 비결을 제시하고 있다.

주인공 쟝발장은 빵 한 조각을 훔쳐 먹고, 그 죄 값으로 무려 19년을 감옥살이를 했다. 감옥을 나왔는데 마땅히 갈 데가 없어서 알프스 산록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편안한 잠자리와 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나 아침에 떠나면서 은그릇을 훔쳐서 나왔다. 그렇지만 그는 경찰에게 붙잡혀 교회로 끌려왔다. 그의 범죄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들은 신부에게서 의외의 답을 듣게 된다. ‘그 은그릇은 내가 준 것입니다. 그리고 은촛대도 가져가라 했는데, 왜 안 가져갔소!’하면서 은촛대까지 건네주었다. 결국 신부의 이 한마디 말에 의해 악의 화신이었던 쟝발장의 인생이 변하게 된다. 작가는 여기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 후 쟝발장이 어려운 이웃들을 섬기고, 용서하고, 사랑을 베푸는 삶을 사는 것을 통해 내부의 적, 곧 악을 이기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원수에게 선을 베푸는 것을 가리켜, ‘숯을 그 머리에 쌓아 놓은 것’(20)이라고 했다. 이는 사랑과 선행이 마침내 원수에게 자책과 심적 고통을 일으켜 회개하게 하는 결과를 이룬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양선은 악을 억제하고, 악으로부터 승리하는 비결이다. 그런데 우리가 선을 행함에 있어 꼭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낙심하지 않고 계속해서 베푸는 것이다(갈6:9).

 

3. 성숙함(너그러움)의 증거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포도원 주인 이야기’(마20:1~16)가 있다. 어느 포도원 주인이 이른 아침부터 오후 5시까지 장터에 나가서 일꾼들을 불러다가 자기 포도원에서 일을 하도록 했다. 하루 일과가 끝났을 때, 주인은 늦게 온 사람부터 시작하여 품삯을 주었는데, 이른 아침에 온 사람이나 오후 늦게 온 사람이나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주었다. 그러자 이른 아침에 온 사람들이 ‘어떻게 하루 종일 일한 우리를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는 사람들과 같이 대우할 수 있느냐’고 불평하였다. 그러자 주인이 그들에게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고 오히려 책망하였다.

나중 온 사람에게도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준 것은 주인의 ‘선함’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서 ‘선함’은 관대함을 나타낸다. 상대방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그것을 동정하며, 그것을 도우려는 너그러움이 바로 ‘선함’이다. 선함은 자기만을 생각하는 사람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다. 어려움을 당하는 이웃을 생각하고 그들을 위하여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선행을 베풀 수 있다. 또한 선함은 성숙과 통하고, 마음의 풍성함과도 통한다. 왜냐하면 성숙하지 않고, 마음이 부요하지 않고는 선을 베풀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잠언22:9에, “선한 눈을 가진 사람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서 ‘선한 눈’은 다른 사람을 너그럽게 보는 눈을 뜻한다. 영어 성경은 이를 ‘bountiful eye’라고 하였다. ‘아낌없이 주는 눈’이란 뜻이다. 자기 것 귀하고, 아까운 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특히 힘들게 모아본 사람은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귀한 것을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이 있다. 선한 눈을 가졌기 때문이다. 선한 눈을 가진 사람은 주변의 힘들고 어려운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반드시 손을 펴서 선을 베풀게 된다. 하나님 역시 이런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 명심보감에도 비슷한 말이 나온다. ‘萬事從寬(만사종관)이면 其福自厚(기복자후)니라.’ 모든 일에 너그러움을 좇으면 그 복이 저절로 두터워진다는 뜻이다. 신자는 누구든지 너그럽게 받아주고, 너그럽게 이해하고, 너그럽게 용서하고, 너그럽게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신자가 베풀어야 할 선한 삶이다.

 

보이지 않는 황금

눈에 보이는 황금이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황금이 있다. 많은 실패자들의 공통점은 눈에 보이는 황금을 챙기려고만 애를 쓰고, 눈에 보이지 않는 황금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결과라고 한다. 무의탁노인공동체에서 생활하는 100여 명의 노인들을 조사해 본 결과 보이지 않는 황금을 하찮게 여겨왔던 것이 공통점으로 나왔다. 그래서 그들은 나이 들고 병이 들어도 갈 곳이 없어 위탁시설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황금은 무엇인가? 바로 선을 행하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 ‘양선’이 바로 보이지 않는 황금이다. 성경은 이것을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는 것”(딤전6:19)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나의 미래를 결정짓는 소중한 보배라는 뜻이다. 그래서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는(딤전6:18) 삶을 살라고 권하고 있다. 이것은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도 잘 되는 비결이다. 참으로 풍성한 삶,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의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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