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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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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561회 작성일 09-05-31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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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것

마25:14~30

2009. 5/29 11:00

삶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

매일 맹수들에게 쫓기는 산토끼들이 신세를 한탄하며 연못에 빠져 죽기로 결심했다. 토끼들이 연못에 도착했을 때, 물가의 개구리들이 놀라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토끼들은 ‘우리보다 약한 놈도 있구나. 개구리에 비해 우리는 얼마나 강한가?’라고 이야기하며, 산 속으로 되돌아갔다. 사람에게는 삶의 본능만 있는 게 아니다. 고된 삶을 마감해 영원히 안정을 취하려는 죽음의 본능도 있다. 요즈음 고단한 현실과 생활로 인하여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안타까운 죽음들을 볼 때 마음이 많이 아프다. 우리나라 대학생의 40%가 자살충동을 느끼고 있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정신분석학자 칼 메닝거(K. Menninger)는 죽음의 본능을 세 가지로 구분하였다. 첫 번째는 ‘죽기와 죽이기’ 본능이 있다. 나를 향해 적용된 죽음의 본능이 죽기이고, 타인을 향해 적용된 죽음의 본능이 죽이기이다. 둘째는 ‘죽임을 당하고자 하는 욕구’이다. 스스로 자기 목숨을 버릴 순 없지만 누군가에 의해, 혹은 불의 사건이나 사고에 의해 죽었으면 좋겠다는 욕구이다. 세 번째는 ‘무의식적 자살행위’다. 고의적이고 계획적으로 죽음을 시도하지는 않으나 무의식에 깔려있는 죽음 본능이 폭발해서 자살한다는 것이다.

 

분명한 죽음의 동기

신자는 분명한 삶의 동기를 가지고 살아야 하지만 동시에 분명한 죽음의 동기도 가지고 살아야한다. 하지만 돈이 없어서, 힘이 들어서, 인생이 의미도 재미도 없어서 죽고 싶다거나, 하는 일들이 잘 풀리지 않아 답답한 마음 때문에 죽음을 결심하는 사람은 신자가 아니다. 신자는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것 때문에 죽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 가치를 위해서, 즉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신령하고 영적인 것들을 위해 죽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행20:24, 21:13). 이와 같은 삶의 태도를 가지고 사는 사람을 사명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사명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을 ‘충성’이라고 한다.

 

사실 모든 의미있는 일들은 이런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지고, 이런 사람들로 인하여 교회도, 사회도, 회사도 유지가 되고 부흥하게 된다. 충신을 곁에 둔 군주는 흥(興)하였고 간신에게 둘러싸였던 군주는 망(亡)한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이 시간은 성령의 일곱 번째 열매 ‘충성’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충성이란 헬라어로 ‘피스토스’인데, ‘이랬다 저랬다 변덕을 부리지 않는 한결같음’이라는 뜻이다. 한자 충성 충(忠)도 같은 의미다. 이 글자는 가운데 중(中)과 마음 심(心)의 합성어로, 흔들리지 않는 한결같은 참 마음을 뜻한다. 충성은 ‘믿음’이라는 말과 어원이 같다. 그래서 영어로 믿음은 ‘Faith’이고, 충성은 ‘Faithful’이다. 그러므로 충성이란 믿음이 가득하고 흔들리지 않는 한결같은 참 마음이다. 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신뢰하고 의지하게 되며, 하나님 역시 이런 사람을 기뻐하시고 사랑하신다. 특히 이 충성은 하나님을 섬기는 신자의 자세와 깊은 관련이 있는 덕목이다. 다음과 같은 이유로 성경은 충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첫째, 충성된 사람은 양약(良藥)과 같다.

“악한 사자는 재앙에 빠져도 충성된 사신은 양약이 되느니라.”(잠13:17). 양약이란 몸에 좋은 보약을 뜻한다. 충성된 사람은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보약과 같이 소중한 존재, 꼭 필요한 존재다. 직장에서는 직장을 잘되게 하는 보배이고, 사회에서는 사회를 잘되게 하는 보배이고, 교회에서는 교회를 잘되게 하는 보배가 충성스러운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충신은 나라의 자랑으로, 효자는 부모의 자랑으로, 열녀는 가문의 자랑으로 여겼다. 본문에서 충성하지 않은 종에 대한 주인의 평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인은 이 종을 ①악하고, ②게으르다(26)고 했다. 그리고 ③무익하다(30)고 말한다. 여기서 악하다는 것은 그의 성품에 관한 것이고, 게으르다는 것은 삶의 태도와 관련이 있다. 충성스럽지 못한 사람은 성품과 삶의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며, 이런 사람은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주지 못하는 무익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익한 것은 유해한 것이다. 충성스러운 사람이 양약처럼 유익한 존재라면 충성스럽지 못한 사람은 독약처럼 무익한 존재, 나아가서는 유해한 존재다. 그래서 주인은 “그를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30)고 한 것이다.

 

둘째, 충성된 사람은 주님의 기쁨이다.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잠25:13). 무더운 여름에 얼음냉수가 얼마나 시원한지 잘 안다. 추수 때는 이스라엘 지역에서는 가장 무덥고 바쁜 때다. 무더위 속에서 바쁘게 일을 하다가 막간에 마시는 냉수의 시원함은 형언할 수가 없을 것이다. 충성된 사람이 이와 같다는 것이다(21/주인의 기쁨이 느껴진다). 특히 충성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 우리는 예배 때마다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라는 찬양을 부른다. 바로 그 비결이 충성된 삶에 있다.

 

셋째, 주님은 충성된 사람을 찾으시고, 또한 쓰신다.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로다.”(시101:6).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충성된 사람이고, 이런 사람이 주님과 함께 거하며 곁에서 주님을 섬긴다는 뜻이다. 충성된 사람은 주님이 찾으시는 인생, 주님이 함께 있기를 원하는 인생, 주님께 쓰임 받는 인생이다(23). 이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직장에서 사람을 뽑을 때 유능함보다 충성심을 더 중요하게 보는 것이다. 바울도 고전4:1~2에서,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하였다.

 

충성된 삶을 위하여

마태복음 25장에는 세 개의 비유가 나온다. 이 비유들은 말세를 살아가는 신자의 삶과 관계가 깊다. 말세의 가장 큰 특징은 불신풍조가 팽배하여 신앙이 조롱거리가 되고, 사람들에게 사랑이 식어지고, 신자들조차 불신풍조에 휘둘려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지게 된다. 오늘 본문 앞에 나온 열 처녀 비유는 영적으로 잠들지 않고 깨어있는 삶에 대한 교훈이고, 본문 뒤에 나온 양과 염소 비유는 사랑이 식어버린 세상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라는 교훈이고, 그리고 본문의 달란트 비유는 신자로서 분명한 자의식을 가지고 충성된 삶을 살라는 교훈이다. 특히 본문은 최소한 세 가지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 모든 신자는 자신의 재능에 따라 주님의 일을 맡은 일꾼(15)이라는 사실, 맡기신 것에 대한 회계할 날(19)이 있다는 사실, 그러므로 신자는 주님이 맡기신 것에 충성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충성된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주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

좋은 일꾼은 주인의 뜻을 잘 헤아려서 섬긴다. 충성된 일꾼이란 바로 이런 사람이다. 본문의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이 여기 속한다. 그들은 주인으로부터 달란트를 받은 즉시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16,17)하였다. 반면에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그것을 땅 속에 묻어 두었다(18). 같은 주인을 섬기고 있는 종들인데 이와 같은 차이가 난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주인의 뜻을 아는데 있다. 물론 주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의 달란트를 종들에게 그저 맡기기만 했다. 하지만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밭은 종들은 주인이 자기에게 그 달란트를 맡기신 뜻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곧 바로 나가서 장사를 하였고, 그리고 그 이익을 남겼다. 이것이 바로 충성된 삶을 사는 비결이다.

 

둘째,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충성이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다. 사랑을 히브리어로 ‘헤쎄드’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 한글성경을 포함한 번역 성경들은 이 단어를 두 가지로 번역하고 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인자나 자비와 같은 단어로 번역하였고,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은 ‘충성’(Loyalty)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께 충성된 삶을 살게 된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의 말씀에 충성하게 되고, 사랑하기에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충성하게 되며, 사랑하기에 주님이 맡기신 그 일에 충성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물질은 물론 몸과 마음, 정성, 심지어는 목숨까지 바쳐서 충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대상을 위해선 충성할 수가 없다.

 

본문의 한 달란트 받은 종에게서 이를 확인할 수가 있다. 그에게 주인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이었다(25). 이는 그가 주인을 사랑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때문에 주인의 뜻을 알지 못했고, 오히려 주인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24절에 의하면 주인은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수고한 결과를 착취하는 완고한 수전노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본문에 나온 주인은 이 종이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야비하고 고약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그는 종들의 개인적인 역량까지 파악하고 있는 배려가 깊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달란트를 “각각 그 재능대로”(15) 맡겼다. 그리고 종들에게 수익금은 물론 원금까지 몽땅 주는 매우 후한 사람(21,23,28)이었다. 또한 그는 결과 지상주의자가 아니었다(21,23).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이런 주인을 잘못 알고 있었다. 이것은 주인을 사랑하지 않는 왜곡된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랑하면 상대방이 보인다. 그 마음이 보이고, 그 진심이 보인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충성하게 된다.

 

충성하는 자에게 내려진 선물

옛날 중국의 순(舜) 임금이 신하들을 모아 놓고 항아리에 물을 부으라고 명령을 했다. 그런데 그것은 밑 빠진 항아리였다. 신하들은 마지못해서 얼마 동안 물을 길어 붓는 척하다가 손을 놓고 불평을 했지만, 한 신하만은 묵묵히 물을 길어 밑 빠진 독에 부었다. 물을 들이붓자마자 땅에 다 새는데도 그 신하는 묵묵히 그 일을 계속했다. 계속 물을 긷고 있는데 두레박에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것을 꺼내서 보니 금덩어리였다. 그 신하는 그 금덩어리를 임금에게 가져갔다. 그랬더니 임금은 신하들의 충성을 실험하기 자신이 그것을 우물 속에 넣어둔 상이라며 충성스러운 그 신하에게 그것을 주었다고 한다. 우리는 의미 없어 보이는 일을 접하게 되면 불평불만을 토해낸다. 아무 소득도 없고, 뻔히 결과가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에도 충성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임하게 된다. 충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오늘 본문에서 보았듯이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남겼느냐, 우리가 이룬 업적과 같은 결과물로 우리를 평가하시지 않고 얼마나 충성하고, 어떻게 충성하였느냐에 따라 보상해 주신다. 주님은 어느 날 우리에게 다시 오실 것이다. 주님 오실 때 우리 모두 충성된 종으로 주님 앞에 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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