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꺾이지 않는 부드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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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918회 작성일 09-06-14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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꺾이지 않는 부드러움

시37:11

2009. 6/14 11:00

부드러운 것이 오래간다.

추천도서 「여자는 왜 아픈 데가 많은가?」를 쓴 박세록 박사가 남성들의 요구로 「남자는 왜 아픈 데가 더 많은가?」라는 책을 썼다. 저자는 이 책에서 남성이 여성보다 아픈 데가 더 많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남성들은 남성 호르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남성 호르몬이 남자를 남자답게 합니다. 진취적이고 적극적이며 공격적입니다. 이 결과로 남자는 같은 환경 속에서도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러니 남자는 아픈 데가 더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소위 남성다움의 상징인 ‘강함’이 문제라는 말이다. 사실 남성은 생리적으로도 그렇지만 사회적으로도 강함을 강요당하고 있다. ‘남자니까 참아야 하고, 남자니까 씩씩하고 강해야 하고, 남자니까 울어선 안되고, 남자니까.......’ 그래서 남성이 만병의 원인인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아픈 데가 더 많고, 빨리 죽는다. 우리나라 평균수명이 79세인데, 남성은 76세이고, 여성은 82세이다. 무려 8살 차이가 난다. 이렇게 연약한 여성이 강한 남성보다 오래 산 것은 강함보다 약함이, 딱딱한 것보다 부드러운 것이 더 오래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노자(老子)의 일화(齒亡舌存)다. 임종을 앞 둔 노자의 스승 상용(商容)이 그를 불렀다. 그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였다. 상종이 자신의 입을 벌려 노자에게 보여주며 물었다.

‘내 혀는 아직 그대로 있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빨은 있느냐?’

‘없습니다.’

‘이게 무슨 까닭인지 너는 알고 있느냐?’

‘혀가 아직 그대로인 것은 그것이 부드럽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빨이 빠지고 없는 것은 그것이 너무 단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세상의 모든 일이 바로 이와 같으니라.’

이 세상에서 이빨처럼 강하고 단단하고 날카로워서 입술과 혀를 물어서 피를 내는 것은 부러지고 깨지고 빠져나가고 없어진다. 하지만 혀처럼 바보스럽게 물리고 피가 나는 것은 남아있게 된다. 즉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결국은 승리한다는 뜻이다. 이 시간은 성령의 여덟 번째 열매 ‘온유’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온유에 대한 오해

사실 이 온유는 신앙이 깊은 사람이 아니고는 수용하기가 힘든 덕목이다. 힘을 정의로, 굽히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세상에서 온유는 약자의 변명 정도로 보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생존경쟁이라는 엄연한 현실 때문에 그렇게 교육을 받고 훈련을 받아왔다. 그래서 독일 철학자 니체(F. W. Nietzsche)는 성경의 이런 덕목들을 ‘노예의 도덕’이라고 하였고, 이런 덕목을 강조하는 기독교를 ‘노예의 종교’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그는 ‘권력에의 의지’(Wille zur Macht)와 ‘초인사상’(Übermensch)을 강조했다. 그에게 있어서 ‘선’은 강하고 힘이 넘치는 것이고, 나약하고 미약한 것은 ‘악’이다(니체의 이 철학을 정치현실에 적용한 사람이 히틀러). 이것은 큰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전적인 의미로 온유(溫柔)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품’을 뜻한다. 이것만 놓고 보면 온유를 강함의 반대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온유는 이보다 훨씬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온유는 헬라어로 ‘프라우테스’(plautes)인데, 원래 이 단어는 야생동물을 훈련시켜서 길들인다는 뜻이다. 즉 ‘통제된 힘’을 의미한다. 그래서 영어로는 이것을 ‘트레인드’(trained/훈련받은, 숙달된)로 번역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야생마를 훈련시켜서 그 엄청난 힘을 잘 조절하여 유익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프라우테스’다. 이것이 온유다. 이것을 사람에게 적용하면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고 다스릴 수 있도록 훈련된 사람을 뜻한다. 그래서 성경은 온유한 사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16:32). 자기 마음과 감정을 잘 조절하고 다스리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고, 용맹이나 화려한 성공보다 온유함을 간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온유한 사람은 전혀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온유한 사람도 화를 낼 수 있다. 그런데 정당한 이유로, 적절한 시기에, 올바른 목적을 위하여, 올바른 방법으로 화를 낸다.

 

온유의 의미

그런데 이런 온유의 진정한 의미는 길들임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 길들여진 것’이 온유이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께 잘 길들여진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자기감정대로 행동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살지 않는다. 해바라기처럼 주님께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행8:4~8, 26). 그러므로 온유란 강함의 반대, 혹은 약함의 반대가 아니라, 하나님께 길들여진 성품이다. 그래서 내게 상대방을 제압할 힘이 넉넉히 있지만 그것을 사용하지 않고 차라리 져주는 것, 내가 상대방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줄 정도로 지식이 풍부하지만 그걸 드러내지 않고 도리어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여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것, 내게 보복할 능력이 충분히 있지만 나에게 해를 입힌 상대방을 긍휼히 여기고 친절히 대하며 복까지 빌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나에게 다른 이들로부터 대접을 받고 높임을 받을 자격과 이유가 있지만 도리어 그 사람들을 겸손히 섬기고 대접하는 태도이다. 그러므로 온유한 사람은 신자를 세워주고 교회 부흥과 평안에 앞장서는 사람(soul-winner)이고, 원수까지도 친구로 만드는 사람(friend-maker)이며, 다툼과 미움, 분열이 있는 곳에 화해와 평화를 만드는 사람(peace-maker)이다. 이것이 바로 온유의 모델이신 예수님의 삶이었다.

 

온유의 삶은 내려놓음에서 비롯된다.

운동의 기본은 힘을 빼는 것이다. 수영이나 배구, 테니스, 탁구, 배드민턴, 골프 모두 힘을 빼야한다. 초보와 프로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골프 초보자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망치로 치는데 공이 나가질 않는다고 한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서 그렇다고 한다. 그런데 그 힘을 빼는데 보통 약 3년이 걸린다고 한다. 비로소 힘이 빠져서 공을 치면 멀리 나간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힘을 주어야 잘될 것 같지만 멀리 갈 수가 없다. 성공할 수가 없다. 왜 가정에서 롱런이 안 나올까? 왜 행복의 롱런이 안 나올까? 인생의 롱런이 왜 안 나올까? 힘주니까. 힘을 빼야한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에 나온 이유는 힘주려고 나오는 것이 아니다. 힘 빼러 나오는 것이다. 교만한 마음의 힘, 정욕의 힘과 같은 모든 악한 힘, 나도 모르게 내 어깨에 힘이 들어가게 하는 모든 자랑의 힘을 빼러 나온 것이다. 나의 모든 힘이 빠져나간 그 자리에 주님의 힘이 머물게 되는 것이다(고후12:9). 이렇게 힘을 빼는 과정이 하나님께 길들여지는 과정이다. 이것을 경험하고 인정하는 사람이 신자이다. 비로소 롱런하는 인생이 되는 것이다.

이용규 선교사(「내려놓음」의 저자)는 ‘내려놓음은 한마디로 온유를 이루는 삶’이라고 하였다. 내려놓음은 나를 비우고 하나님께 맡기는 삶의 결단이다. 나의 힘, 능력, 지혜, 경험 등 모든 것이 비워지고,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삶이 온유다. 이렇게 우리가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의 뜻이 나를 주관할 때, 우리 삶의 영역 가운데 하나님의 영이 부어지고,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게 된다. 물은 항상 낮은 곳으로 흐르고, 비어있는 곳에 채워지고, 부드러운 곳에 스며든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온유함은 하나님의 복을 받는 비결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이다. 반면 하나님이 미워하고 것은 ‘강퍅한 마음’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온다(히3:8).

 

 기도가 온유한 삶을 가능케 한다.

언제가 훈련을 받은 코끼리들이 거리로 나와서 주변의 상점을 부수고 사람들을 해치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훈련받은 맹수들이 조련사를 공격하거나 관람객을 공격한 기사도 보았다. 이는 훈련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 사건들이다. 동물도 그런데 하물며 사람이겠는가? 사람의 마음은 사람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도는 내 마음을 다스려 달라고 주님께 내어드리는 것이다. 내 자신에 대한 포기와 항복의 선언이 기도이다. 기도는 자신을 비우는 행위요, 내려놓는 작업이다. 자기부족을 발견하는데서 기도가 시작되지만 동시에 기도를 통해 자기부족을 깨닫게 되고, 나아가서 내게 있는 것들의 무익함을 알게 된다. 때문에 하나님의 채워주심을 간절히 사모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비움과 채움’이 이루어진다.

성경에서 온유한 사람의 본보기는 예수님이시다(마11:29). 그리고 구약에서는 예수님의 모습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었던 모세이다(민12:3). 그런데 온유의 모델인 예수님과 모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것이 ‘기도’다. 두 분의 공통점이 ‘기도의 사람’이다. 기도를 통해 자기의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다(마26:42). 그리고 자기감정에 따라 행동하지 안했다(마26:52~53, 민12:1~2). 기도가 하나님께 철저하게 길들여진 온유한 삶을 가능케 한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면 내 안에 있는 모든 세속적인 힘들이 다 빠져나게 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주님의 힘이 임하게 된다. 그래서 모세처럼 주님처럼 온유한 삶을 살게 된다.

 

온유한 자가 누리게 될 복

본문은 온유한 자의 복을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다. 첫째는 “땅을 차지하며.”라고 하였다. 여기서 ‘땅’이란 물질적 정신적인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차지한다.’는 말은 ‘다스린다.’ 혹은 ‘정복한다.’는 왕적(통치적)인 의미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 자신과 환경을 잘 다스리는 사람, 즉 자신과 주변에 대하여 주도적이면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서아프리카 모레족은 온유한 사람을 ‘그늘진 마음의 소유자’라고 한다. 맹렬한 햇볕에서 서늘한 그늘을 제공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이 세상에서 온유한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를 잘 보여주는 말이다. 이런 삶이 가능한 것은 그가 자기 힘, 능력, 지혜, 경험으로 살지 않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의 힘, 능력, 지혜, 권세로 살기 때문이다.

둘째는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고 하였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평화롭게 누린다는 뜻이다. 즐겁게 행복하게 평화롭게 삶을 누린다는 것이다. 주변에는 많이 가졌지만 그것을 즐겁게 누리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오히려 더 많이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며 불평 속에 사는 사람도 있다. 그것은 소유를 온전히 내려놓지 못하고 거기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소유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그것을 즐겁게 누릴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온유한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과 상황을 즐거워하며 풍성하게 누린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의 공급에 의존하여 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소유가 사라져도 흔들리지 않는다(합3:17~18). 주님의 공급하심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많이 있으면서도 누리지 못하고 궁색하게 사는 것 자체가 저주이고, 없는 중에서 풍성하게 누리며 행복하게 사는 것이 축복이다.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의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얼핏 보면 세속원리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여전히 영적 원리, 하나님의 원리가 세상을 다스리고 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주인이시고 주관자이시기 때문이다. 흔히 사람들은 세상을 정글에 비유하고, 정글의 법칙에 의해 세상이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다윈의 양육강식, 적자생존의 법칙이다. 이에 따르면 세상은 강한 자만이 살아남아야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바다 속에는 작은 물고기들이 훨씬 많고, 짐승의 세계에서도 맹수들보다 연약하고 작은 짐승들이 훨씬 많다. 온갖 산해진미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던 우리나라 왕들의 평균수명이 43세였다. 이는 못 먹고 못 입고 아무런 힘도 없었던 평민들보다 그 수명이 짧았다. 이 모두가 이 세상이 하나님의 법칙, 곧 온유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형통한 삶,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은 이 원리에 순종하는 것이다. 세속적인 강함을 버리고 성령의 열매 온유함을 사모하며 살자! 이것이 자신과 세상에 대하여 주도적이면서 진정으로 영향력 있는 삶, 풍성하고 화평을 누리는 삶을 사는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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