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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 길들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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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405회 작성일 09-06-21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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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 길들이기

약3:1~12

2009. 6/21 11:00

한 마디 말의 힘

중국은 ‘자전거의 나라’라고 할 만큼 자전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다 보니 자전거 주차가 자주 문제로 등장한다고 한다. 빈 공간만 있으면 아무 곳이나 자전거를 세우고, 곧 그곳은 자전거 주차장으로 변하고 만다. 땅 주인이 주차를 못하게 해도 막무가내다. 자신의 집 담 벽에 주차하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갖은 방법을 사용해도 백약이 무효였다. 그런데 이 사람이 단 한마디 글을 써 붙여놓았더니 순식간에 자전거 주차문제가 해결되었다.

‘자전거를 무료로 드립니다. 한 대씩 가져가세요! 주인백.’

1825년, 러시아의 새 황제로 니콜라이(Nicholas) 1세가 즉위했다. 이 때 입헌군주제를 외치는 데카브리스트(Decabrist, 12월당)의 반란이 일어났다. 황제는 자신의 체제에 반기를 든 이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그 중 주동자로 꼽혔던 콘드라티 릴레예프에게는 사형선고를 내렸다. 사형이 집형되던 날 릴레예프는 교수대 위에 섰다. 목에 올가미가 걸리고 발밑의 뚜껑이 열리는 순간 그의 몸은 밑으로 떨어지며 줄 하나에 온 몸이 내걸리게 되었다. 출렁거리며 몸이 크게 휘청이는 순간 줄이 툭하고 끊어지며 그는 땅으로 떨어졌다. 당시에 이런 일이 생기면 신의 뜻이라고 여겨 사형을 면해 주는 관습이 있었다. 릴레예프는 땅에 떨어진 후 자신의 무사함을 알고 목에 걸린 줄을 풀어헤치며 군중을 향해 소리쳤다. 

‘보시오. 러시아에서는 무엇 하나 제대로 만드는 게 없질 않소. 이래도 내 이야기가 틀렸단 말이오?’

줄 하나도 제대로 못 만드는 러시아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퍼져나갔고, 급기야 황제에게도 보고되었다. 내용을 전해들은 황제는 사면장을 찢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려줘야겠군.’

릴레예프는 결국 다시 교수대에 섰고 두 번 다시 밧줄은 끊어지지 않았다. 말 한마디가 어려운 문제를 쉽게 해결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남의 목숨뿐 아니라 자신의 생명줄을 끊어놓을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말의 힘, 혀의 권세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잠18:21). 또한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그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하느니라.”(잠21:23)고 하였다.

 

말은 경건의 척도다.

리스(E. Liss)란 사람은 ‘말도 아름다운 꽃처럼 그 색깔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말’이란 정신의 표현이다. 그가 하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그의 영혼이 피우는 형형색색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가 있다. 특히 신자의 말은 신앙의 표현이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말이 ‘경건의 척도’라고 말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1:26). 야고보서는 신자가 추구해야 할 경건을 세 가지 측면에서 말씀하고 있다(약1:26~27). 그리고 그 첫 번째 측면이 말이다. 말이 곧 경건의 척도이며, 나아가서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라야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씀한다(3:2). 야고보서는 신자의 언어생활에 대하여 가장 많은 권면을 하고 있는 책이다. 특히 본문은 말에 대한 교훈으로 유명한 부분이다. 본문은 경건하고 온전한 삶을 위해 말을 훈련하라고 한다.

지난주일 설교에서 온유를 ‘하나님께 길들여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신앙생활이란 야생마처럼 마음대로 자행자지(自行自止)했던 삶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길들여져 가는 과정이다. 우리의 생활 중에 길들여져야 할 것이 많지만 그 중에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것이 ‘말’, 곧 ‘혀’다. 본문의 표현대로 혀는 비록 작지만 우리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지체이다(6). 혀는 마치 작은 불이 많은 나무를 불사르듯 우리의 삶에 치명적인 영향을 준다. 때문에 길들여져야 한다. 그래서 온유에 대한 두 번째 설교로 ‘혀 길들이기’에 대한 말씀을 준비했다. 이 시간은 어떻게 혀를 길들일 것인가?에 대한 것보다는 잘 길들여진 경건한 말(언어생활)을 중심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한다.

 

1. 때에 맞는 말이다.

한 수녀원에서 젊은 수녀가 앵무새를 기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 수녀원에는 잔소리가 심한 늙은 수녀가 앓아누워 있었다. 젊은 수녀는 늙은 수녀 방에만 갔다 나오면 문을 쾅~ 닫고는 작은 소리로, ‘저 늙은이 빨리 죽었음 좋겠다!’고 중얼거리곤 했다. 그런데 그녀가 기르고 있던 앵무새가 이 말을 배워서 문을 쾅 닫기만 하면 큰 소리로, ‘저 늙은이 빨리 죽었음 좋겠다!’고 외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젊은 수녀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래서 신부님을 찾아가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자초지종을 들은 신부가 자신이 기르고 있던 앵무새를 주면서 짝이 생기면 그 말을 잊을지 모르니 함께 길러보라고 했다. 그렇지만 그 얄미운 앵무새는 여전히 ‘저 늙은이 빨리 죽었음 좋겠다!’고 했고, 그러자 신부에게서 가져온 앵무새는 ‘주여,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라고 응수했다.

말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을 갖게 하는 이야기다. 개인적이고 사소한 말이라도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비롯해서 한 번 내뱉은 말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것, 아무리 좋은 말도 때에 맞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신부에게서 길러진 앵무새의 말 자체는 얼마나 훌륭하고, 경건하고, 좋은 말인가? 그런데 때에 맞지 않으니까 전혀 다른 의미가 되고 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어려운 사람에게 놓여있는 사정이나 형편은 생각하지 않고 좋은 말이라고 무조건 권한다면 그것은 독설에 불과하고, 같은 말이라도 듣는 사람의 처지와 형편이 다르면 시끄러운 소음에 불과하다(약2:15~16). 그래서 성경은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그 이웃을 축복하면 도리어 저주 같이 여기게 되리라.”(잠27:14)고 하였고, “마음이 상한 자에게 노래하는 것은 추운 날에 옷을 벗음 같고 쏘다 위에 초를 부음 같으니라.”(잠25:20)고 하였다. 아무리 좋고, 훌륭하고, 경건해도 때에 맞지 않으면 도리어 나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때에 맞는 적절한 언어생활을 권한다.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은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잠15:23).

적당한 말로 대답함은 입맞춤과 같으니라.”(잠24:26).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 사과니라.”(잠25:11).

사람은 말에 따라서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존재다. 그 입의 대답이 나를 기쁘게도 할 수 있고, 슬프게도 할 수 있다. 어떤 말은 아침보다 저녁에 하는 것이 더 좋고, 또 어떤 말은 저녁보다 아침에 하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다. 잔치 집에서 할 말이 있고, 초상집에서 할 말이 있다. 말은 때에 맞고, 경우에 합당할 때 아름답다. 은 쟁반에 담긴 금 사과를 상상해 보라. 서로 얼마나 잘 어울리는 조화인가? 이런 사람이 사랑받고 칭찬받고 성공한다. 입맞춤과 같이 듣는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확신을 준다. 이것이 잘 길들여진 말의 특징이다.

 

2. 온량한 혀이다.

중국 정치가 풍도(馮道)라는 사람이 쓴 「설시」(舌詩)가 있다. 그는 후당(後唐) 때 태어나 30년 동안 5왕조(후당, 후진, 요, 후한, 후주) 11명의 황제를 섬기며 73세까지 장수했던 사람으로, 난세를 탁월하게 살았던 그의 처세법이 담긴 시이다.

口是禍之門(구시화지문) /입은 재앙을 부르는 문이요,

舌是斬身刀(설시참신도) /혀는 몸을 베는 칼이로다.

閉口深藏舌(폐구심장설)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감추면

安身處處宇(안신처처우) /가는 곳마다 몸이 평안하리라.

폭군 연산군(燕山君)이 이 시를 인용하여 ‘신언패’(愼言牌)를 만들어 대신들로 목에 걸고 다니도록 했다. 한마디로 말을 조심하라는 내용이다. 이 시에서는 주로 말의 부정적인 면이 강조되고 있지만 말은 중립적이다. 입은 재앙을 부르는 문이지만 동시에 행운의 문이기도 하다. 사실 말이란 사람을 아프게도 하지만 동시에 사람을 치료하기도 한다. 사용 여부에 따라 화가 되기도 하고 복이 되기도 한 것이 말이다. 우리가 우리의 말을 길들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온량한 혀’가 바로 그것이다.

온량한 혀(The tongue that brings healing)는 곧 생명나무라도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잠15:4).

이 구절에 온량한 혀와 패려한 혀가 비교되고 있다. 이는 말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 ‘온량한’은 히브리어로 ‘마르페’라는 단어이다. 이는 ‘치료하다.’ 또는 ‘건강하다.’는 뜻이다. 반면에 ‘패려한(셀레프) 혀’는 ‘거짓말’, ‘왜곡된 말’을 의미한다. 루터는 이 ‘패려한 혀’를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 모든 범죄 행위’로 해석했다. 즉 비방이나 비난의 말, 비판의 말, 훼방의 말, 모욕의 말, 중상모략, 부정적인 말, 저주의 말 등이다. 이런 잘못된 말은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 여기서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는 것은 ‘영혼(생명)을 깨뜨린다(파멸시킨다).’는 뜻이다. 거짓되고 왜곡된 말은 그 말을 듣는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그 영혼을 파멸로 이끄는 것이다. 말 자체가 칼이 되고, 독이 되어 사람을 찌르고 죽이는 것이다.

그러나 ‘온량한 혀’는 치료하는 말, 건강하고 건전한 말을 뜻한다. 감사의 말, 사랑의 말, 위로와 격려의 말, 칭찬의 말, 친절하고 따뜻한 말, 은혜로운 축복의 말 등이 이에 속한다. 이런 말들은 말 그대로 우리 인생의 ‘치료약’이다. 치료하는 말들이다. 이는 상처 입은 마음을 치료해주고, 위로와 격려로 병든 마음을 건강하게 해준다. 그래서 온량한 혀를 ‘생명나무’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나무는 창세기 2장 9절에 처음 나온다. 그 열매는 사람에게 영생을 주고(창3:22), 그 잎사귀는 만국을 치료(계22:2)하는 치료제이다(겔47:12). 온량한 혀가 바로 이 생명나무와 같다는 것이다. 사람들을 치료하고 회복시켜 새로운 소망과 생명을 갖게 하는 것이다. 결국 말에는 두 종류가 있다. 상처를 주고 무너뜨리는 말과 치료하고 세워주는 말, 파괴시키고 죽이는 말과 회복하고 살리는 말이 있다. 우리는 어떤 말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까?

 

聖(성)=耳(이)+口(구)+壬(임)

성인(聖人)이란 말과 깊은 관련이 있다. 한자 거룩할 성(聖)을 풀이하면 귀로 듣고(耳), 입으로 말한 것(口)을 짊어지고(壬)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즉 듣는 것을 가려듣고, 말하는 것에 책임을 다하는 삶이 거룩한 삶이고, 성인이다. 신자는 가려듣고, 말하는 것에 책임을 다하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말을 선한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신자는 치료하는 사람, 회복시키고 살리는 사람, 하나님의 축복이 흐르게 하고, 은혜를 흐르게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런 모든 것들이 우리의 말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나의 말이 생명나무처럼 치료하고 회복시키며 생명을 주는 도구가 되고 있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영혼을 깨뜨리고 생명을 파멸시키는 도구가 되고 있는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패려한 혀는 자기도 해롭고 남에게도 해를 입히므로 피차가 다 해로운 것이다. 하지만 온량한 혀는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로워서 피차가 다 이로운 것이 된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의 입술이 다른 사람을 파멸시키고 죽이는 도구가 되지 않도록 자신의 입 앞에 파수꾼을 세워서 자신의 입술을 지켜달라고 기도했다(시141:3). 다윗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바라며, 주님의 은혜로 우리의 혀를 잘 길들여서 우리의 말이 생명의 도구로 사용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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