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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균형을 맞추는 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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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1건 조회 13,320회 작성일 09-06-30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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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균형을 맞추는 저울

빌4:10~13

2009. 6/28 11:00 

문제는 자기관리(self-control)다.

토마스 커스틴(T. Custin)이라는 역사물을 저술하는 작가가 벨기에 왕가의 흥망성쇠를 다룬 책을 썼다. 그 중 ‘3명의 에드워드’라는 글이 있는데, 이 글의 주인공은 레이놀드라는 왕자다. 이 왕자에게는 ‘크라수스’라는 별명이 있었다. 이는 ‘뚱뚱한 것보다 더 뚱뚱하다’는 뜻이다. 그는 다음 왕이 될 사람인데, 부왕이 갑자기 죽자 동생 에드워드에게 왕권을 빼앗기고 유커크 성에 갇히게 되었다. 하지만 그곳은 감옥이 아니라 매우 안락한 공간이었다. 단지 출입문이 없으나 대신 보통 사람이면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창문이 하나 있었는데, 빗장도 자물쇠도 없었다. 그리고 매 끼마다 진수성찬의 식사와 원하는 대로 간식도 제공이 되었다. 동생은 형에게 이 방에서 나오면 왕권을 이양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레이몬드는 감옥에서 나왔을까? 못 나왔을까? 10년 후에 동생 에드워드가 전쟁터에서 전사했을 때 자유인이 되었다. 그러나 비만으로 인한 병으로 곧 죽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왕위를 찬탈 당하고 감옥에 들어간 한 인물의 비극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관리에 실패하여 탐식의 감옥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자기 관리다. 우린 그 예를 주변에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자기 관리가 뛰어난 사람은 자신의 기분이나 감정, 그리고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누구도, 무엇도 탓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길을 간다(마26:47~56).

 

절제란 무엇인가?

드리어 성령의 마지막 열매 ‘절제’에까지 왔다. 절제는 헬라어로 ‘엥크라테이아’인데, 이는 ‘자기 자신이나 다른 것에 대한 주도권’을 의미한다. 영어로는 자기통제(self-control)라고 한다. 이는 고대로부터 가장 지고(至高)한 덕(德)으로 평가되어 왔다. 특히 피타고라스 같은 사람은 ‘자기를 제어할 수 없는 사람은 자유인이라 할 수 없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사람은 감정의 노예고, 분노를 다스리지 못한 사람은 분노의 노예다. 욕심을 다스리지 못한 사람은 욕심의 노예다. 왜냐하면 이것들에게 자신의 주도권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잠언25:28,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것은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고 했다. 절제하지 못한 사람의 모습이다. 그것은 폐허가 되어 방치된 성읍과 같다는 뜻이다. 동시에 절제란 파괴적인 악의 세력에 대항하여 그 주변에 방어벽을 설치하는 ‘내적인 요새화’임을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절제는 ‘힘의 축적’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단이 우리를 무너뜨리고자 할 때 먼저 자기 주도력을 상실케 만든다(창3:1~6). 이는 마치 자동차의 제동장치를 망가뜨린 것과 같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곰 사냥 법을 보면 이 사실이 더욱 분명해진다. 곰은 힘도 세고 날렵하고 영리한 동물이다. 그런데 그들이 곰을 사냥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우선 커다란 돌덩이에 꿀을 바른 다음 큰 나뭇가지에 튼튼한 밧줄을 이용하여 매달아 놓는다. 꿀 냄새를 맡은 곰이 그것을 발견하고 꿀을 먹기 위해 앞발로 돌덩이를 잡으려한다. 그러면 돌덩이가 곰의 앞발에 차여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앞으로 밀려갔던 돌덩이가 뒤로 돌아오면서 곰의 머리를 때린다. 얻어맞은 곰은 화가 나서 더 세게 돌덩이를 치게 되고, 곰이 돌덩이를 세게 칠수록 돌덩이는 더 큰 반동으로 곰을 후려친다. 그래서 결국 곰은 쓰러지고 만다. 한마디로 곰의 자제력을 잃게 하여 곰을 잡는 방법이다. 사단도 같은 방법으로 우리를 무너뜨리고, 이런 방법은 우리 생활 속에 깊이 침투되어 있다. 그래서 이런 방법으로 사람들을 이용하기도 하고 이용당한 경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절제의 삶을 살면 사단의 공격을 무력화시킬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삶의 유익을 경험하게 된다.

 

1. 지족(知足)의 삶을 가능하게 한다.

본문은 바울의 간증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족(自足)하는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의 삶에 대한 고백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11~12).

지금 바울은 로마감옥에 갇혀 있다. 그를 돌보아줄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의 생활을 책임지는 후원자가 있는 것도 아니다. 자비량 선교사로 홀몸이었다. 그런데 감옥에 갇혀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얼마나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들고 어렵겠는가? 그런데도 바울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자족하기를 배웠기” 때문이다. 자신은 모든 상황에 대하여 만족하기에 몸이 매여 있든 자유롭든, 물질이 있든 없든, 환경이 힘들든 평안하든 그 무엇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크게 기뻐한다.”(10)고 말하고 있다.

사실 중요한 것은 환경이나 소유가 아니다. 마음이다. 마음이 기쁘고 즐거우면 만사형통이다. 그런데 이 마음에 욕심이 들어오면 불행이 시작된다. 그래서 야고보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1:15)고 하였다. 바울 역시 “부(富)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6:9)고 욕심을 경고했다. 이 욕심에서 자신을 해치고 다른 사람을 상하게 하는 불행과 범죄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욕심을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고, 이 욕심을 다스리는 그것이 바로 ‘지족’이다. 족함을 아는 것이다. ‘지족상족(知足常足)이면 종신불욕(終身不辱)이라.’는 말이 있다. 족함을 알고 항상 만족하고 살면 평생 욕된 일을 당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6:7~8)고 권하고 있다. 먹을 것과 입을 것, 즉 최소한의 것만 있어도 거기에 만족하며 살라는 것이다. 이런 지족의 삶은 자기 자신이나 다른 것에 대하여 주도권을 가질 때 가능해 진다. 11,12절은 절제의 극치를 보여준다. 자기 자신이나 다른 것에 대한 주도권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이고, 누릴 수 있는 삶이다.

 

2. 지분(知分)의 삶을 가능하게 한다.

결혼하여 60평생을 아름답게 산 늙은 부부가 있다. 이를 귀하게 여긴 천사가 이들 결혼기념일에 찾아와서 각각 소원을 하나씩 말하라고 했다. 아내가 먼저 아들이 살고 있는 미국으로 여행을 가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미국왕복 비행기 표 두 장이 주어졌다. 이제는 남편이 소원을 말할 차례였다. 표를 본 남편은 기왕이면 젊은 여자와 여행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기보다 서른 살 적은 여자와 함께 여행을 가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천사가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이 남편을 구십 먹은 할아버지로 만들어주었다.

자기 분수를 모른 사람의 비참한 모습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천사가 이 부부에게 소원을 말하라 한 것은 행복하고 아름답게 산 삶에 대한 보상이지 자기보다 젊은 여자와 여행하라는 것이 아니다. 욕심과 함께 우리를 불행의 나락으로 끌고 가는 것이 또 하나 있다. 교만이다. 그래서 성경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고 하였다. 바로 이 교만을 그치게 하는 것이 지분(知分)이다. 분수를 아는 것이다. 즉 자기 한계를 아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가? 어떤 존재인가를 기억하는 것이다.

다윗이 주님 앞에서 큰 인물로 쓰임받은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기고 있던 시절이다.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어 어느 동굴로 숨어들었는데, 사울왕도 쉬기 위해 그 동굴로 들어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울과 그 군대의 눈과 귀를 가려서 다윗을 보호해 주셨다. 그 때 다윗의 동료들이 사울을 죽이자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다윗을 설득했다. 그렇지만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운 왕을 자기 손으로 죽일 수 없다며 거절했다(삼상24:1~7). 이는 아주 귀한 믿음의 태도이고 결단이다. 다윗은 아무리 자신이 다음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고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왕을 세우고 폐하는 것,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자기 분수, 자기 한계를 지킨 것이다. 이것이 다윗이 하나님께 사랑받고 인정받은 비결이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비결이다. 사실 이 사건은 ‘다윗이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며 자기 분수를 지키는 사람인가?’를 알아보기 위한 하나님의 시험이었다. 이렇게 자기 분수를 아는 것이 절제다. 자기 자신이나 다른 것에 대하여 주도권을 가지고 있기에 자기 분수를 넘어서지 않는다. 허나 주도권을 잃어버리면 자기감정이나 주변 환경에 휘둘려 자기 분수를 넘어 패망으로 달리게 되는 것이다. 분수에 맞게 사는 것이 아름다움이고 행복이다. 지나침은 고통이고 불행이고 파멸이다. 이 조절 장치가 절제다.

 

3. 지지(知止)의 삶을 가능하게 한다.

승자효과(winner's effect)라는 것이 있다. 승리를 거두면 테스토스테론이라는 남성호르몬의 분비가 상승하여 승승장구할 수 있는 긍정 에너지를 얻게 된다는 이론이다. 그런데 이 호르몬도 과도하게 분비되면 오히려 합리적인 판단이 흐려져 어이없는 실수를 하게 된다. 그래서 때때로 멈춤이 필요한 것이다. 삶에는 나아가는 일만 있는 것이 아니다. 멈추는 것(止)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나아가는 일 못지않게 멈춤도 중요하다. 사실 이 지(止)와 부지(不止) 사이가 성공과 실패의 분수령이다. 우리는 23전 23승의 불패의 신화를 이룬 이순신 장군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데, 이는 나폴레옹과 비교하면 절반도 안된다. 나폴레옹은 60전 58승을 거두었다. 그런데 마지막 단 두 번의 패배로 그는 몰락하였다. 그가 많은 승리에도 불구하고 실패로 인생을 마감한 것은 그침을 몰랐기 때문이다.

음악에서 쉼표도 악보다. 쉼표가 없는 노래는 없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인생에서 멈춤이란 단순한 시간낭비가 아니다. 멈춤은 쉼이고, 또한 자신을 돌아보는 반성의 시간이다. 새로운 나아감을 위한 준비와 재충전의 시간이다. 창조적인 시간이다. 하나님께서도 안식일을 거룩한 날(성일)이라 하셨다. 멈춤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뿐만 아니라 집 안에 있는 동물, 심지어 경작하는 땅까지 쉬도록 하셨다.

인생의 비극은 멈춤을 무시한데 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두셨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창2:17)는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멈춤 신호였다. 그런데 그 신호를 무시한 것(창3:6)이 타락이고, 불행의 시작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환경이나 사건을 통해, 혹은 사람을 통해 잘못된 곳을 향해 가고 있는 우리에게 멈춤의 신호를 보내고 계신다. 욕심을 멈추고, 쾌락을 멈추고, 불순종을 멈추고, 불신앙을 멈추고, 불의한 삶을 멈추라고 신호를 보내고 계신다. 여기에 순종하면 복이지만 무시하면 고통이고 불행이다. 인생이 피곤하고 힘든 이유도 멈춤을 모르는데 있다. 나폴레옹처럼 잘나가던 인생이 하루아침에 허망하게 무너짐도 이 때문이다. 한자 걸음 ‘보’(步)자를 보면, 그칠 ‘지’(止)와 젊을 ‘소’(少)자로 되어 있다. 걸음 속에는 멈춤이 전제 되어 있고, 나아감과 멈춤이 조화를 이루어야 건강하고 젊은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지지불태’(知止不殆)라는 말이 있다. 멈춤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뜻이다. 멈춤을 알아야 분수를 알고, 분수를 알아야 만족을 안다(知止하면 知分하고, 知分하면 知足한다). 절제란 이 멈춤의 미학이다. 멈출 때 멈추고 가야할 때 가는 것, 이것이 자기 자신이나 다른 것에 대한 주도권을 가진 사람의 모습이다.

 

어떻게 절제의 삶을 살 수 있을까?

세상 사람들도 우리와 똑같이 절제를 소중한 미덕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저들은 수양이나 훈련과 같은 극기(克己)를 통해 가능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성경은 절제를 성령의 열매(갈5:22~23)로 말씀하고 있다. 이것이 절제에 대한 세상과 우리의 차이다. 바울은 본문에서 자족의 삶과 관련하여 ‘배웠다’는 표현을 두 번이나 사용하고 있다(11,12). 이는 자기 스스로 터득하거나 훈련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우리의 진정한 스승이신 성령을 통해 배웠다는 것이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through him who gives me strength)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3)고 고백한다. 나를 강하게 하신 주님을 통해! 오직 주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는 뜻이다. 절제의 삶도 마찬가지다.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의 능력으로 절제의 삶이 가능하다(이는 절제뿐만 아니라 모든 성령의 열매가 그렇다.). 주님 안에서 주님이 주신 능력으로 절제의 삶을 이루어 지족, 지분, 지지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


댓글목록

정성규.님의 댓글

정성규. 작성일

절제가 소중한 미덕이라하지만 저에게는 왜이렇게 어려운거죠?


예전보다 많이 좋아진건 사실이지만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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