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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신앙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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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5,375회 작성일 09-07-12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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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신앙의 본질

막11:15~18

2009. 7/12 11:00

벼랑 끝으로 내 몰리고 있는 교회

마지막 때가 되면 기독교에 적대감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라고 성경은 예언하고 있다(단9:27, 마24:10~12, 딤후3:12~13). 즉 기독교에 적대감을 가진 영, 사상, 집단이 많아질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우리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사실이다. 

 

런던 시내버스 중에 「신은 없는 것 같다. 네 인생을 즐겨라」는 광고판을 붙이고 다니는 버스가 있다고 한다. 이는 다윈주의자이자 무신론자인「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이라는 책을 쓴 리차드 도킨슨(R. Dawkins)이 주도하는 운동이라고 한다. ‘초월은 없다’고 믿었던 18세기 계몽주의, 이성주의 바이러스가 다시 살아난 기분이다. 소위 ‘하나님 죽음의 신학’이라는 것이 있는데, 인간이 하나님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 인간이 하나님을 바꿀 수도 있어야 되고, 죽일 수도 있어야 된다고 믿는 신학이다. 이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하나님 없는 인간, 그리스도가 없는 구원, 복음이 없는 종교생활, 성경 없는 윤리, 교회가 없는 사회다. 과연 현대 교회와 신자들은 이 독한 바이러스와 맞서 싸울 힘이 있는가?

 

요즈음 신종플루 때문에 전 세계가 전전긍긍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감염환자가 300명이 넘어섰다. 이는 마치 세속의 도전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신종플루의 경우는 치명적이지는 않아도 백신이 없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우리 신자들은 강력한 백신을 이미 가지고 있으면서도 무기력증에 빠져있다. 이 백신은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다. 그런데 문제는 이 백신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 심지어는 이것을 잃어버렸다는 점이다. 교회의 위기 신앙의 위기는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교회사를 보면 오늘날처럼 교회가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고, 엄청난 재력을 소유하고 있었던 시대가 없었다.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인구 1/4이 신자이고, 대통령도 장로이고, 국회의장도 장로다. 국회의원 거의 과반수가 신자라고 한다. 그리고 교회 안에 부자 신자들도 많고, 부자교회도 많다. 이렇게 교회와 신자는 권력도 있고 물질도 있지만 무기력하게 자꾸 벼랑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유는 단 하나 복음의 백신을 잃어버린 것이다. 반면 로마시대 기독교인은 2%에 불과했고, 대부분이 노예나 여성과 같은 사회적, 경제적인 약자들이었다. 이런 그들이 로마를 복음으로 정복하였다. 당시 신자들은 복음을 위해 맞아 죽을 각오, 얼어 죽을 각오, 굶어 죽을 각오를 했다. 그러면 주님이 그들이 죽도록 버려두었을까? 천만에 주님은 공중의 새도 기르시고(마6:26), 들풀도 입히시는 분이시다(마6:30). 하물며 그 사랑하는 자들을 돌보지 않겠는가!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6).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우리에게 소중한 것들, 이것들을 주님을 위해 포기한 헌신의 사람)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눅18:29~30).

 

 

주님의 진노

오늘 본문에 인자하신 주님께서 노끈으로 된 채찍을 휘두르고(요2:15), 꾸짖으며 상을 뒤엎는 장면이 나온다. (배경설명생략)결국 성전에서 제물용품에 대한 거래행위는 장거리 예배자의 편의를 도모한다는 본래의 취지와는 달리 장사꾼들의 욕심만 채우는 탐욕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성전은 이런 사람들의 이전투구(泥田鬪狗) 장이 되고 말았다. 이는 그대로 당시 유대종교와 그들의 신앙상태를 반영한 것이다. 주님이 이렇게 불같이 꾸짖고 진노의 채찍을 휘두르신 것은 성전의 본질,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심판이었다. 나아가서 무기력한 우리를 향한 채찍이라 생각한다. 17절 말씀이 이를 증명한다.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의for all nations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17).

 

유대인들은 매일 이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고, 특히 유월절과 같은 절기에는 18,000여 마리의 짐승이 제물로 받쳐졌다. 그래서 제물을 태우는 연기가 하늘을 뒤덮고, 그 냄새가 수 십리 밖까지 진동을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제사가 장엄한 의식 속에서 진행되었다. 성전의 화려함 또한 사람들을 압도하였다(이 성전은 헤롯왕이 46년에 걸쳐 건축한 것임). 그런데 문제는 저들이 성전의 본질을 놓쳤다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성전의 본질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신다. 그것은 ‘만민을 위해 기도하는 집’이다. 성전은 이기적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곳이 아니라 온 세상의 영적 필요를 위한 곳이라는 말씀이다. 이것을 놓치면 사람을 압도하는 성전의 화려함도, 무수한 제물도, 그리고 장엄한 제사의식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단지 ‘강도의 굴혈(소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전은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다. 만민을 위해 기도하는 경건생활의 중심이 아니라 이익의 도구였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기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제사장들까지도 여기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말만 성전이지 강도의 소굴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성전의 본질을 해치는 사람들을 모두 쫓아내면서 이런 성전은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다며 헐라(요2:19)고 말씀하셨고, 그러면 성전의 본질이 살아있는 새로운 성전을 친히 세우겠다(요2:19하)고 하셨다.

 

 

본질을 회복하라.

무엇이든 본질을 놓치거나 잃어버리면 위기를 맞게 된다. 교회도 신앙도 마찬가지다. 사도행전에 나온 예루살렘교회는 말 그대로 일취월장(日就月將) 부흥하였다. 베드로가 설교할 때마다 3천, 5천 명씩 회개하였으니, 폭발적인 부흥이라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게다가 자기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는 사랑과 은혜가 충만한 공동체였다. 그런데 행6장에 이르면 이렇게 부흥하는 은혜로운 교회가 분열 위기에 놓이게 된다. 그것은 유대인 사도들이 구제에서 헬라파 과부들을 제외시키고 있다는 것이다(1). 이 때 사도들은 이 일을 불공평한 구제활동에서 비롯된 불만으로 생각하지 않고, 사도적 사역의 본질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았다(2). 사실 문제란 현상에 불과한 것이고 항상 그 본질을 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 사도들에겐 이런 통찰력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7명의 집사를 뽑아서(모두 헬라파 사람들) 그들에게 구제와 섬기는 사역을 맡기고(3,5~7), 자신들은 ‘기도와 말씀’에만 전무하였다(4). 물론 구제도 중요한 일이지만 사도들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일이요, 말씀을 연구하여 가르치고 전파하는 일이었다. 이렇게 본질이 회복되자 교회문제도 해결되고, 교회가 더욱 든든히 부흥하게 되었다(7). 특히 여기서 특기할 만한 사항은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는 말씀이다. 이 일을 계기로 기독교가 유대 교권자들에게까지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는 말씀이다. 다시 말하면 이 일을 계기로 교회의 영향력이 한층 강화되고 확장되었다는 뜻이다. 본질을 벗어나면 위기지만 본질을 회복하면 새로운 부흥과 더욱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영국에 캐리(Carrie)라고 하는 부호(富豪)가 있었다. 그에게 죠지(George)와 윌리엄(William)이라고 하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했고, 열심히 공부하여 명문 옥스퍼드 대학을 나왔다.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기대가 컸다. 그의 기대대로 큰 아들은 국회의원이 되고, 사업수안도 있어서 돈도 많이 벌었다. 소위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 것이다. 그런데 장래가 촉망되는 둘째 아들이 느닷없이 모든 것을 버리고 선교사로 인도에 가겠다는 것이다. 모두가 깜짝 놀라 강력하게 만류했다. 왜 하필 선교사냐! 왜 보장된 성공을 뒤로하고 미개인, 야만인들 속에서 한평생을 살려고 하느냐! 말렸지만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아무도 배웅하지 않는 가운데 외롭게 선교사로 나갔다. 이것이 ‘현대 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캐리(W. Carrie)가 선교지로 떠난 모습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서 두 사람 다 죽었고, 「대영백과사전」에 두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었다. 윌리엄 캐리에 대해서는 무려 한 페이지 반에 걸쳐 기록되어 있는데, 그 형 죠지에 대해서는 ‘윌리엄 캐리의 형’이라고 하는 말밖에 없다.

 

이는 아주 중요한 교훈을 우리에게 준다. 참된 성공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초라해 보이고 어리석고 실패한 것같이 보이지만 본질을 선택한 사람이 진정한 성공자라는 사실이다. 반면에 본질을 벗어나면 성공 같지만 실패한 인생이다. 특히 세속적인 성공의 허무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세상에서, 세속적인 가치를 가진 사람들이 만든 책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면 천국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무엇이든 본질이 바로 서면 다른 것들도 바로 서게 된다. 이것이 바로 교회와 신자가 사는 길이다. 세속화를 막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영향력을 회복하는 길이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마6:33)고 하셨다. 본질적인 것에 우선순위를 두고 그것을 추구하라는 말씀이다.

 

 

그 얘기 아니면 할 말이 없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성전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진노의 채찍을 높이 드신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에게 이처럼 과격한 행동을 보이신 이유가 무엇인가? 이는 본질을 상실한 신자, 본질을 상실한 교회를 향한 채찍이고, 행동임을 기억하자! 당시 유대인의 모습, 예루살렘의 성전의 모습은 이 시대의 신자와 교회의 모습,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복음은 말하는데 거기에 복음이 없다. 화려한 예배당, 부유한 생활은 있는데 복음이 없다. 예배 가운데, 기도나 찬양 가운데, 성도의 교제나 섬김 가운데 복음이 없다. 선포되는 말씀 가운데 복음이 없다.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 따르지 않고 있다. 우리의 말이나 대화 가운데, 가정생활이나 사회생활, 일상생활 속에서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 묻어나질 않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 복음을 알고, 복음을 경험한 사람들이라면 우리의 말, 행동, 몸짓, 입은 옷, 사람을 대하고, 물건 하나 사고파는 것 속에서도 복음이 묻어나게 된다.  

 

설교 잘하기로 소문난, 그래서 황금의 입(golden-mouth)이란 별명을 가진 크리소스톰(St. John Chrysostom)이란 교부의 일화다. 어느 날 로마황제가 불러 ‘네가 예수를 믿어도 좋지만 오직 예수만이 구원이란 얘기는 하지 말라.’고 했다. 그때 크리소스톰은 ‘그 얘기를 하지 않으면 내가 할 말이 없습니다.’고 대답했다. 황제는 ‘내 명령을 거절한다면 너는 감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했고, 크리소스톰은 ‘나는 감옥에 백번을 가더라도 이 복음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고 했다. 초대교회가 영향력이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사람들 때문이다. 그들은 많이 가지지도 배우지도 못했지만 복음 외에는 할 말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먹는 이야기, 입는 이야기, 사는 이야기, 자녀 이야기와 같은 세속적인 것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자신이 있는데, 복음만 말하면 입이 막히고 할 말이 없는 것. 이것이 우리의 모습 아닌가!

 

어느 분이 요즈음 교회 안에 교회에 이름만 올려놓은 ‘등록’교인, 이름만 신자인 ‘명목’교인, 비만 오면 꼼짝 못하는 ‘소금’교인, 바람만 불어도 날아가는 ‘종이’교인, 급한 일 생겨야 찾아오는 ‘화장실’교인, 날씨 추워지면 꼼짝 못하는 ‘파충류’교인, 더운 여름엔 녹아서 교회 못나오는 ‘눈덩이’교인이 있다고 했다. 주님은 우리가 이런 신자가 되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다. 이런 신자가 되라고 십자가에서 그 고귀한 피를 흘리신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신자가 된 것은 그 안에 복음이 없기 때문이다. 복음의 생명,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 까닭이다. 신앙생활은 하고 있지만 신앙의 본질에 닿아 있지 않기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크리소스톰처럼 ‘그 얘기 아니면 할 말이 없다’고 할 만큼 복음에 대한 분명한 경험과 확신, 합당한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오늘은 주로 본질의 중요성, 즉 본질을 붙들고 회복해야 잘되고 영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음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다. 앞으로 신앙의 본질인 ‘복음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려고 한다. 이 기회에 우리 기독교 복음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복음을 확실히 경험하며,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라고, 이런 기대를 가지고 매시간 잘 참석해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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