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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어야 할 복음, '죄 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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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907회 작성일 09-07-26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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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어야 할 복음, '죄 사함'

행2:37~41

2009. 7/26 11:00

15분

생명이 15분밖에 남지 않은 한 젊은이를 주인공으로 한 연극이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따를 사람이 없을 만큼 총명했다. 20대에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그의 뛰어난 논문에 심사위원들은 격찬을 했다. 이제 학위를 받을 날짜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누구도 그의 성공을 의심치 않았고, 본인도 자신에 넘쳐 있었다. 그저 하루하루 분홍빛 미래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슴에 이상한 통증을 느끼고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폐암말기, 앞으로 15분밖에 살수 없다는 죽음의 선고가 내려졌다. 그는 암담한 심정으로 병상에 누웠는데, 시계의 소리와 함께 시간은 쉬지 않고 지나갔다. 5분이 금방 지나가고 남은 시간이 10분으로 줄어들었다. 이 때 그의 병실로 한 통의 전보가 날아든다.

 

‘억만장자인 당신의 삼촌이 방금 돌아가셨습니다. 그의 재산을 상속할 사람은 당신뿐이니 속히 와서 상속절차를 밟아 주십시오.’

 

하지만 죽음을 앞둔 그에게 이 전보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위로도 기쁨도 주지 못했다. 운명의 시간은 8분으로 줄었고, 생각할 시간도 없이 또 한통의 전보가 도착했다.

 

‘당신의 학위 논문은 우리 학교 개교 이래 가장 훌륭한 논문으로 평가가 되었으며, 올해 최우수 논문으로 선정되었음을 알려 드립니다.’

 

그러나 이 전보 역시 그에게 기쁨이 되지 못했다. 이제 운명의 시간은 마지막 3분을 남겨 놓고 있었다. 이때 또 한통의 전보가 날아온다. 그가 그렇게도 애타게 기다리던 연인으로부터 결혼승낙이었다. 세 통의 전보들이 다른 때 같으면 그에게 큰 기쁨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15분의 제한된 시간 속에서는 어떤 소식도 기쁨이 되지를 못했다. 오히려 아쉬움과 회한만 안겨 줄 뿐이었다. 15분의 시간이 지나고 그는 세 통의 전보를 손에 움켜쥔 채 숨을 거둔다. 그리고 연극은 끝이 난다.

 

 

인간의 ‘운명’

그렇다. 생명이 보장되지 않는 한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 성공도, 명예도, 지식도, 좋은 집도, 좋은 직장도 생명이 보장될 때 의미가 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8:36)라고 말씀하셨다. 천하를 얻는 일이 쉽지 않는 일이지만 설령 천하를 얻었다 해도 목숨을 잃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는 말씀이다. 즉 천하보다 귀한 것이 목숨이란 뜻이다. 전도서에도 “모든 산 자 중에 참예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 산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니라.”(전9:4)고 했다. 어떤 모습으로든 살아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살아있다는 것은 희망이기 때문이다. 살아있기에 아직 기회가 있고, 지금 실패를 했어도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은 그것으로 끝이다. 기회도, 다음에 대한 기약도 없다. 사자는 동물의 왕이다. 반면에 개는 사자에 비해 보잘것없는 짐승이다. 이렇게 하찮은 개도 살아 있는 한 죽은 사자보다 낫다. 한자로 죽음을 사망(死亡)이라고 한다. 여기 망(亡)자는 ‘망하다, 없어지다, 달아나다, 죽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죽음이 얼마나 고약하고 무섭고 절망적인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지난 7월 11일, 여성 산악인 고미영씨가 히말라야 13좌 낭가파르바트(8,126ⅿ)를 정복하고 하산 길에 사고로 사망했다. 그런데 그녀의 장례식 때, 문화체육부 장관 앞으로 보낸 그녀의 편지가 공개되어 주변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이 편지는 그녀가 13좌를 오르기 전에 쓴 것인데, 편지를 받은 것은 죽음의 소식을 들은 다음 날이었다. 여기에는 13좌에 이어 14좌까지 완등을 하고, 8월에 귀국 예정이라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13좌를 정복하고 하산하다 사고를 당하여 죽고 말았다. 그래서 그녀는 14좌는 다른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싸늘한 시신이 되어 서둘러 고국으로 돌아왔다. 누가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리라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는 고미영씨의 문제만이 아니다.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 아니야’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바램이고, 단 1분후에 내게 일어날 일에 대하여 장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이고, 또한 우리 인간의 운명이다.

 

 

문제는 ‘죄’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라(창1:26)고 말씀한다. 이는 하나님처럼 영생하도록 지음을 받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 안에 있는 ‘영원에 대한 사모함’(전3:11)이 이를 증명해 준다.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고, 그래서 몸에 좋은 것을 찾아서 먹고, 하는 모든 것이 이를 반영한다. 이것은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인간이 행복한 존재로 살도록 지으셨고, 그렇게 살 수 있는 모든 여건을 만들어 주셨다. 그곳이 에덴이다(창2:8~9). 그런데 에덴에서 영생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아야할 인간이 그 곳에서 쫓겨난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아벨’(허무하다)이 되고(창4:2), ‘에노스’(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가 되는(창4:26) 비참한 인생이 되고 말았다. 그러면 왜 인간이 이런 비참함에 떨어지게 되었는가? 탁월한 지성을 갖춘 존재(창2:19)가 단 1분후에 자신에게 임할 일도 예측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로 전락하게 되었는가? 그토록 영광스럽고 존귀한 존재가 벌레와 같은 비천한 존재가 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죄’ 때문이다. 죄로 인하여 인간의 존재, 신분, 운명과 삶이 뒤바뀌게 되었다. 성경은 말씀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오직 너희와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59:2).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23).

 

위 말씀들은 인간의 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 죄는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를 내고,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얼굴을 가로막았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최대 원수인 사망이 죄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큰 숙제는 생전의 비참함과 더불어 모든 것을 허무하게 만들어버리는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제임스 패커(J. I. Packer)는 그의 책 「내 안의 죄 죽이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죄는 우리 속에 거할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활동하여 육체의 행실을 행하도록 자극한다. 죄가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면 우리도 죄를 방치할 수 있다. 하지만 죄는 겉으로 조용한 것처럼 보여도 속으로는 매우 활동적이다. 죄의 물줄기는 외관상 고요해 보이지만 그것은 조류의 움직임이 심한 매우 깊은 물이다. 따라서 우리는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조금도 방심하지 않은 채 어느 상황에서든지 죄와 대항해서 싸워야 한다.’

 

 

죄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복음’

인간이 있는 곳에는 항상 범죄가 있었고, 범죄가 있는 곳엔 이를 해결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 있었다. 종교나 철학, 윤리, 교육, 법률이나 형벌제도 등이 범죄를 예방하거나 줄이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범죄는 더욱 늘어나는 추세이다. 신사의 나라 영국에서는 교도소가 부족할 정도로 범죄율이 상승하고 있어 선상 교도소와 주중에는 가정에서 생활하다 주말에만 수감되는 주말 교도소를 고려중이라 한다. 이런 현상은 미국이나 우리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이는 단지 사회적인 범죄에 한정된 것이지만 인간의 의지나 노력만으로는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준 예이다.

 

오늘 본문에 죄 문제에 대한 분명한 해결책이 제시되고 있다. 본문은 사도 베드로의 첫 설교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베드로는 여기서 ‘너희가 십자가에 죽인 그분 나사렛 예수가 바로 우리가 그토록 기다렸던 메시야셨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분을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마음이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을 향하여 외쳤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37). 이는 죄에 대한 심각성과 깊은 탄식을 보여준다. 이것이 죄를 해결하는 첫 걸음이다.

 

어느 책에서 고우스님(불교계의 원로 중 한 사람으로 선사상을 대중화시킨 명승)의 글을 보았다. 어느 스님이 캄캄한 저녁에 화장실을 다녀오다 뱀을 밟아 죽였다. 이 스님은 무의식중이지만 살생을 했다는 깊은 죄책감 때문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날이 밝아서보니 간밤에 자신이 밟은 것은 뱀이 아니라 호박넝쿨이었다. 이 스님이 호박넝쿨을 뱀으로 착각을 한 것이다. 그래서 고우스님은 말하기를 죄의식이란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내가 없고(無我), 마음이 없으면(無心) 죄의식도 없다고 했다. 이는 죄를 실체가 아닌 단순한 심리적인 현상정도로 보고 있는 현대인들의 죄의식를 잘 보여주는 가장 보편적인 견해이다. 죄는 마음의 착각이 아니라 실체이다. 이는 손과 발을 묶고 있는 사슬과 같고, 출구가 없는 깊은 감옥과 같다. 치명적이고 심각한 것이 죄이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그 죄가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깨닫고, 깊이 탄식할 때 해결의 길이 보인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사람들이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탄식하며 부르짖자 베드로를 통하여 죄에 대한 해결책이 주어졌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38).

 

예수님이 곧 모든 죄의 해결책이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는 의식적인 세례를 의미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즉 예수님을 구원의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세례란 예수님을 구원의 주님으로 영접하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의식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마28:19 비교).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어야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성경은 예수님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代言者)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1요2:1).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1요2:2).

 

이렇게 우리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죄를 해결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곧 ‘복음’이다. 우리 기독교 복음은 본문의 베드로처럼 이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이 우리가 복음을 반드시 믿어야 할 이유이다. 그 이유는 누구도 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없고(롬3:10), 누구도 자신의 의지나 노력, 선행, 수행 등으로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복음의 주제인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실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우리의 모든 불행은 죄에서 비롯되었다. 죄 때문에 생전의 비참함과 허무한 죽음, 그리고 죽임이후 심판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시고, 누구든지 믿는 사람은 죄를 용서받고 영생을 선물로 주셨다. 우리 모두 복음 안에서 이런 용서의 기쁨, 죄로부터 해방, 영생의 선물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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