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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어야 할 복음Ⅲ, '자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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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325회 작성일 09-08-09 14:54

본문

믿어야 할 복음, ‘자녀 됨’

요1:12

2009. 8/9 11:00

사막의 신기루

죄의 유혹은 마치 사막의 신기루와 같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많은 연합군들이 중동사막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들은 사막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다가 뜨거운 태양아래서 타는 목마름으로 신기루를 보았다. 물이 없는데도 귀에는 물이 흘러가는 소리가 들리고, 눈에는 출렁이는 호수가 보였다. 군인들은 그것이 진짜 물인 줄 알고 첨벙첨벙 들어가서 물을 마셨다. 실상 이들이 마신 것은 물이 아니라 뜨거운 모래였다. 모래를 잔뜩 먹고 기도가 막혀 죽었다. 나중에 그들을 찾아온 후속부대가 보니 모두 입 안 가득 모래를 물고 죽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주님도, 복음도 모르고 죄의 유혹을 좇아 살아가는 인간의 비참한 최후다. 그러므로 여러분, 속지 말자. 세상이 주는 평안, 세상이 주는 기쁨, 세속적인 영예나 권세, 세속적인 재물. 이 모두는 신기루와 같은 것이다. 우리 영혼을 사냥하기 위한 사단의 미끼이다. 미끼는 화려하고 멋지다. 매력적이고 아름답다. 그래야 사냥감이 걸려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경건한 신자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살지 않았다. 이렇게 살았다.

 

구름같은 이 세상 모든 부귀영화

나는 분토와 같이 내어버리고서

오직 천국의 복만 사모하며 사니

주여 내 작은 이름 기억하옵소서.

주가 나의 이름 보좌 앞에 놓인

어린양 생명책에 기록하셨을까?

                                   -찬송가 532장 1절

 

세상 모든 것들은 분토(糞土)처럼 여기고 그저 천국의 복을 사모하며 살았다. 천국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기쁨으로 삼고 살았다. 그저 고민이 있다면 어떻게 하면 주님을 더 사랑하고, 더 잘 믿고, 더 잘 섬길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 땅에서 잘 사는 것보다 천국에서의 부요한 삶이 목표였고, 이를 위해 기도하며 힘쓰고 애썼다. 이것이 복음을 믿고, 복음 안에서 사는 사람의 모습이다.

 

복음의 외침

한 소년이 손가락을 베이면서 조각칼로 돛까지 단 예쁜 나무배를 만들었다. 소년은 기쁜 마음으로 개울가로 달려가 나무배를 개울물에 띄웠다. 나무배는 개울물을 따라 잘도 떠내려갔다. 그런데 갑자기 물살이 빨라지면서 순식간에 배가 멀리 떠내려가 버렸다. 소년은 나무배를 잃고 허탈한 마음으로 돌아왔다. 여러 날이 지나 소년은 장터에 나갔다가 우연히 자신이 만든 나무배가 어느 상점 진열대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소년은 상점으로 들어가 상점 주인에게 자초지종을 말하며 그 나무배를 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상점 주인은 자신이 돈을 주고 샀다며 거절했다. 소년은 집으로 돌아와 저금통을 가지고 다시 그 상점을 찾았고, 상점 주인은 돈이 조금 모자라지만 나무배를 가져가도록 허락했다. 소년은 너무 기뻐서 소리쳤다.

 

‘너는 이제 내꺼야. 너는 두 번이나 내 것이 된 거야! 첫 번째는 내가 만들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내가 돈으로 샀기 때문이야!’

 

하나님도 우리를 향해 똑같이 말씀하신다. “너는 두 번이나 내 것이다. 첫 번째는 내가 너를 창조하였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 값으로 너를 샀기 때문이다.” 이것이 영적 사생자처럼 살아가고 있는 인생들을 향한 복음의 외침이다. 복음은 우리의 정체성과 존재감을 회복시켜 준다. 다시는 죄의 종이 아닌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진노의 자식이 아닌 축복의 자녀로서 당당히 살아가게 한다. 우리를 향한 이 복음의 외침에 늘 귀를 기울이기 바란다. 그래야 우리 영이 기쁘고, 믿음이 자라고, 삶이 건강하여 모든 일이 형통하게 된다.

 

자존감이 높을수록 성공률이 높고, 삶의 만족도와 행복지수가 높다고 한다. 그런데 이 자존감이란 우리 내적인 문제가 아니다. 사실 인간이란 보잘 것 없는 질그릇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자신의 모습에서 무슨 자존감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자존감을 결정하는 것은 질그릇 속에 담겨 있는 내용물이다(고후4:7). 거기에 보배를 담았을 때 그 가치가 드러나게 된다. 즉 우리의 자존감은 복음이신 보배로운 예수님과 그에 대한 믿음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배라고 다 같은 것이 아니다. 그 가치가 천차만별이다. 같은 금이라도 순수한 금이 있고, 합금이 있다. 합금 중에서도 금의 함유량에 따라 가치가 다르다. 신자도 마찬가지다. 같은 복음을 믿지만 14K, 18K 같은 ‘합금신앙’을 가진 사람이 있고, 순도가 99.99%인 ‘순금신앙’을 가진 사람이 있다. 그가 어떤 신앙을 가졌느냐에 따라 자존감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기 정체성이 분명하고 자존감이 높은 신앙이 되기 위해선 순금신앙을 가져야 한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을 못하고 마귀도 포기하게 된다.

 

자녀됨(sonship)의 축복과 권세

복음 안에서 우리는 절망적인 죄를 용서받고, 죽은 영혼이 생명을 얻어 영생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런 내적인 변화와 더불어 육체의 욕심과 마음의 원하는 것을 좇은 진노의 자녀(엡2:3)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죄인이 의인이 되는(롬3:24) 놀라운 신분의 변화도 가져온다. 본문은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증거하고 있다. 이는 복음 안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새로운”, 혹은 “새 것”은 시간적인 의미가 아니라 질적인 의미다. 질적으로 완전히 변화되었다는 의미다. 마치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과 같다(요2:1~11). 이것은 물리적인 변화가 아니라 화학적인 변화다. 물(H2O)과 포도주(C2H5OH)는 화학식이 다르다. 전혀 다른 물질이란 뜻이다. 복음 안에서 우리 신자의 변화가 이와 같다. 우리 존재 자체가 변한 것이다. 존재가 변했으니 신분이 변한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 신분 속에는 ‘축복과 권세’가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어 군대에서 대령이 장성으로 진급을 하면 복장을 비롯하여 각종 예우가 100여 가지 정도 변한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됨에도 각종 축복과 권세가 따른다.

 

1. 자녀는 부모의 보호를 받는다.

부모를 보호자(保護者)라고 한다. 자녀를 지키고 보호해 주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래서 부모가 있는 자녀는 당당하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엡3:12). 담대함과 확신으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주님은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고 하셨다. 주님의 보호 아래 있는 한 우리는 안전하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외친다. “그런즉 이 일에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 이어서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37). 이것이 자녀가 누리는 축복이요, 또한 권세이다. 

 

2. 부모는 자녀의 필요를 채워준다.

요즈음 세상이 각박해서인지 부모답지 못한 부모들 이야기를 가끔 듣는다. 하지만 정상적인 부모는 자녀를 책임지고 양육한다. 당신은 못 먹고 못 입어도 자식 먼저 챙기는 사람이 부모다. 이런 부모가 있어서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이다. 전날 속을 뒤집어 놓고도 다음 날 아침에 차비 달라, 용돈 달라고 손을 내밀 수 있는 존재가 부모다. 이것이 부모와 자녀의 관계다. 하나님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11).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육간의 필요를 아시고, 또한 채워주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7:7~8)라고 하셨다. 이는 기도에 대한 말씀인데, 기도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인 우리에게 주신 특권이다. 바로 이 특권을 잘 활용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녀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고 다 응답해 주신다는 것이며, 기도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비결이라는 것이다.

 

3. 자녀는 부모의 상속자다.

바울은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고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입니다.”(롬8:17, 표준 새번역)고 하였다. 자녀에게는 부모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권한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유의 상속자로 창조하셨고, 우주의 모든 좋은 것들을 소유하고 누리게 하셨다. 우리가 자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이 특권을 상실하였다. 그런데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었으므로 상속권 역시 회복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떠나서는 절대 궁핍에서 참혹한 삶을 살 수밖에 없지만 복음 안에서는 모든 좋은 것을 누릴 수 있다(눅15:14~17). 자녀이기 때문이다.

 

은혜는 과거형이다.

하나님의 자녀란 이와 같은 엄청난 축복과 권세가 있다. 그런데 이런 축복과 권세를 복음 안에서만 누릴 수 있다. 때문에 복음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믿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쉽고 안타까운 것은 이런 축복과 권세가 주어졌음에도 많은 신자들이 이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본문에도 그 비밀이 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believing in his name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to become권세를 주셨으니gave”

 

먼저 본문의 시제를 알 필요가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그 이름을 믿는 것보다 시제가 앞선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에서 ‘되다’는 동사와 “권세를 주셨으니”에서 ‘주다’는 동사의 시제가 모두 ‘과거형’이다. 반면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의 시제는 ‘현재분사’다. 즉 은혜의 시제는 과거형이고, 믿음은 현재형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영적 축복인 은혜는 장차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이다. 즉 ‘이미 완료된 일’(Done)이다. 예를 들어, 죄 용서는 지금부터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다 해결이 되었다. 심지어는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깨끗이 청산되었다. 우리의 믿음과 상관이 없이 이루어진 사건이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를 은혜의 종교라고 하는 것이다. 대신 믿음(믿음 역시 은혜)은 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그릇이고, 그것을 누리는 비결이다. 우리가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도 영적 빈곤과 삶의 무기력함을 느끼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장차 올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것이 결정적인 실수다. 하나님은 이미 주셨는데, 우리는 달라고 하니 불신앙이고, 그것을 누리지 못하니 늘 궁핍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그 권세를 가지고 있으면서 자녀답지 못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은행통장에 현금이라고 하는 은혜를 가득 채워놓고 믿음이라는 카드를 주셨는데, 우리는 돈을 보내달라는 말만 반복하며 카드를 사용하고 있지 않는 것과 같다.

 

복음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과 권세를 주셨다. 참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은혜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자녀답게 사는 것(복음에 합당한 삶)이다. 자녀다움이란 아버지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는 삶이다. 또한 자녀에게 주어진 축복과 권세를 잘 사용하는 것이다. 이미 주어진 축복과 권세를 믿음으로 잘 활용하여 주님께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는 삶을 살자. 하나님 자녀로서 당당하고 영향력 있는 삶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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