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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어야 할 복음Ⅴ, ‘변화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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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215회 작성일 09-08-23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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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어야 할 복음Ⅴ, ‘변화된 삶’

눅19:1~10

2009. 8/23 11:00

변화의 중요성

☀ 솔개의 변화(동영상보기). 이 동영상과 같은 경우를 두고 한자 사자성어로 ‘환골탈태’(換骨奪胎)라고 한다. 환골탈태란 우리 몸의 골격을 이루고 있는 뼈를 바꾸고 내장을 몽땅 빼내어 새 것으로 채운다는 뜻으로, 몸과 얼굴이 전혀 몰라볼 정도로 변한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이 무시무시한 말은 주로 어떤 결단이나 각오를 밝힐 때 사용한다. 이 영상은 변화의 중요성과 함께 변화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잘 보여준다. 변화가 곧 생명이고, 생명을 낳는 고통을 겪어야 변화를 이룰 수 있음을 말한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A. Toffler)는 ‘21세기 문맹자는 글자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학습하고, 교정하고, 재학습하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고 하였다. 한마디로 배움을 멈춘 사람이 문맹자, 혹은 낙오자라는 뜻이다. 사람은 평생 학생이다. 평생 배워야 한다. 배움을 통해 변화하는 세상에 대한 적응력을 키워가야 한다. 그런데 배움을 멈추면 적응력을 상실하게 되고, 다 변한데 혼자 변하지 않으면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도태되어 낙오자가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진화론의 핵심용어인 적자생존(適者生存)을 메모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적자생존, 즉 적는 자가 살아남는다.’고 사용한 것을 보았다. 꾸준히 메모하면서 배우는 사람이 살아남는다는 말이다. 무언가 배우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부족과 더불어 현재 자신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다. 변화는 이런 자신의 부족함과 만족하지 못함에서 시작된다. 신앙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자신의 ‘부족을 아는 것’, 그리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거룩한 불만을 품는 것’이다. 그래야 변화를 위한 몸부림을 갖게 되고, 그래야 날마다 더 좋은 방향,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하여 성장하고 성숙하게 된다.

 

더 나은 변화를 위하여

물론 우리를 변화시키고, 또한 변화를 이루어가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일이다. 하지만 이 변화를 아름답게 가꾸어가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기도 하다. 나무에게 생명을 주고 자라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 나무가 보다 잘 자라고 아름답게 자라게 하는 것은 사람의 책임이다. 사람이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잡목이 될 수도 있고, 값비싼 조경수가 될 수도 있다. 성경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는 말씀이 여기에 해당된다. 본문에 나온 삭개오의 변화는 아름답고 건강한 성장/성숙을 위한 좋은 모델이다. 삭개오는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그래서 죄인의 대명사로 여겼던 ‘세리’였다. 그런 그가 복음으로 변화되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참으로 놀랍고 아름다운 변화다.

 

 

1. 변화를 기대하라.

컨설팅회사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의 마케팅 부장 존 팀펄리(J. Timperley)는 ‘자신의 꿈을 가장 빠르고 효과적으로 이루는 길은 자기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과 연결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라면서, ‘이제는 무엇을 아느냐(Know-What)가 아니라, 누구를 아느냐(Know-Who)가 더욱 중요한 시대’라고 했다. 내 삶의 변화를 위해 무엇을 얼마나 알고 무슨 일을 하느냐보다, 누구를 만나야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이다. 변화를 위해 가장 소중한 분을 이미 만났기 때문이다. 바로 그 분은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내 삶을 변화시키는 가장 확실한 길이고, 자신의 꿈을 이루는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길이다.

 

삭개오는 세속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다. 직위는 세리장이요, 누구나 좋아하는 돈까지 많이 모은 부자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사회적 지위나 재물이 그에게 만족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천대를 무릅쓰고 성공을 위해 목숨 걸고 달렸고, 그래서 성공했는데, 마음속에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렇다. 사람에게는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있다(St. Augustine)고 했다. 그 공간은 하나님이 아니고는 세상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고, 이 공간이 채워지지 않는 한 인간에게는 만족이 없다. 삭개오는 그것 때문에 잠 못 이루다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고,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소원을 갖게 되었다He wanted to see who Jesus was(3). 변화에 대한 갈망을 품게 된 것이다.

 

변화하려면 현재에 대한 ‘거룩한 불만’이 있어야 한다. ‘이대로는 살 수 없다. 이렇게 무능하게 믿을 수는 없다.’ 판잣집에 살아도 좋다는 사람은 그렇게 살 것이다. 경차가 기름도 적게 들고 주차하기도 좋다는 사람은 계속 경차를 탈 것이다. 하지만 내가 장애인이니까 아내만은 정상인이어야 한다는 사람은 정상인 아내와 살 것이다. 현재에 대한 거룩한 불만을 가지고 변화를 열망해야 한다. 변화에 대한 강렬한 소원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진지하게 기도하게 되고, 잘 듣게 되고, 잘 생각하게 되고, 좋은 만남을 시도하고 가꾸게 된다. 그래야 변화에 대한 갈망과 기대를 갖게 된다. 이런 변화에 대한 갈망과 기대가 우리를 더 나은 방향으로 성장하고 성숙하게 만드는 것이다. 삭개오가 자기 삶에 거룩한 불만을 품고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기대를 가졌기에 예수님을 만나 그의 삶이 변화되고, 성경에 이름이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2. 변화를 시도하라.

솔개의 동영상에서 보았듯이 변화라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다.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힘들고 위험할 수도 있다. 이 세상 모든 것에는 두 가지 힘이 존재한다. 하나는 현 상태를 유지하려는 ‘현상유지의 힘’이고, 다른 하나는 현 상태를 깨뜨리려는 ‘변화의 힘’이다. 변화는 이 두 힘의 균현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러니 거기에 얼마나 강력한 저항이 따르겠는가? 더더욱 영적인 변화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강력한 저항이 있다. 때문에 더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삭개오가 기대를 품고 주님을 보기 위해 갔는데, 주님을 볼 수가 없었다. 세상일이란 내 기대대로 되지 않는 것이 훨씬 많음을 알아야 한다. 그의 기대가 여지없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그 이유는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서다(3). ‘키가 작은 것’은 자기 때문이고, ‘사람이 많은 것’은 주변 사람들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다. 이는 변화를 위한 심각한 장애물이다. 이것을 넘어서느냐, 여기서 주저앉느냐에 우리의 변화가 달려 있다. 많은 사람들이 변화의 필요성은 가지고 있지만 장애물을 넘지 못해 포기하고 만다. 사실 무슨 일이든 장애가 따르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그 장애물에 대한 나의 태도와 반응이다.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A. Adler)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장애물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불가피한 장애물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응해 나가느냐가 중요하다. 용기있게 장애물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간 사람은 장애물 때문에 더욱 큰 발전을 이루어낸다. 나는 어렸을 때 허약했고, 어린 동생의 죽음을 보면서 질병이나 죽음에 대한 강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이 두려움이 나로 하여금 의사가 되도록 긍정적인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므로 아들러의 말처럼 장애물을 성장의 디딤돌이 되게 하기 위해선 장애물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 무슨 일이든지 장애가 따른다.

◈ 장애가 크고 심각할수록 중요하고 큰일이다.

◈ 장애는 반드시 극복된다(고전10:13).

◈ 주님의 사랑을 신뢰하라(5, I must stay at your house today).

 

삭개오는 변화를 위한 장애물을 멋지게 극복한다. 본문은 장애물 앞에서 삭개오가 취한 행동을 두 개의 동사로 표현하고 있다(4). ①앞으로 달려가다. ②뽕나무로 올라가다. 이는 변화를 위한 삭개오의 과감한 시도다. 생각해 보라. 어린아이라면 몰라도 어른이, 그것도 사회적인 지위도 있고 돈도 많은 사람이, 무엇이 부족하여 30대 초반의 젊은이를 보자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무 위로 올라가겠는가? 이는 변화에 대한 삭개오의 간절한 갈망과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한 그의 과감한 시도를 잘 보여준다. 이런 그의 행동이 주님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주님의 시선을 그에게로 향하게 한 것이다.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선 이런 간절함과 모험이 요구된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꼭 기억할 것이 있다. 주님은 문제보다 크신 분이란 사실과 중요한 것은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발길을 멈추게 하여 내 문제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

 

본문의 이 뽕나무는 삭개오에겐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예비하신 특별한 섭리의 도구다. 이 뽕나무는 가만히 있는 사람에겐 한갓 나무에 지나지 않지만, 무언가를 시도한 사람에겐 주님을 만나고 장애물을 극복하는 중요한 도구가 되고, 변화된 삶으로 나아가는 디딤판이 된다. 당시 삭개오 주변에 그와 같은 사람이 그 한 사람 밖에 없었을까? 다른 삭개오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해 뽕나무 위로 올라간 사람은 오직 삭개오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단지 예수님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려 했는데,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자신의 집에까지 모시는 영광을 경험하게 되었다(5). 사랑하는 여러분, 장애물을 두려워하지 말자. 장애물 때문에 낙심하지 말자. 오히려 그것을 극복하고자 과감하게 시도하자. 그러면 반드시 주님은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뽕나무(섭리의 도구)를 우리 앞에 예비하실 것이다.

 

 

3. 변화를 선언하라.

성경에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중에 사람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푼 사람들이 있다. 삭개오도 그 중에 한 사람이다. 이 잔치에는, ①자신이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고, ②자신이 예수님의 제자 천국의 백성이 되었음을 주변에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의미가 있다. 이제는 자신이 옛 생활을 떠나 변화된 사람인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즉 변화된 삶을 살겠다는 선포인 것이다. 그런데 삭개오는 잔치만으로 끝나지 않고, 평생 갖은 수모를 참고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을 나누는 것으로 자신의 변화를 선언한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8).

 

삭개오의 이 고백은 18장에 나온 예수님께 와서 잘난 채 한 어떤 부자 관원(18~23)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이는 단순한 구제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으로서 변화된 삶을 위한 결단이고 선언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주님의 제자로서 변화된 삶을 살겠다는 결단적 선언이다. 지금까지 삭개오의 삶을 볼 때 이 고백은 상징성이 크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가장 멸시를 받는 두 계층이 있었다. 여자로서는 '창기'이고, 남자는 '세리'였다. 그런데 삭개오가 이런 세리직업을 택할 땐 비장한 각오를 했을 것이다. 그것은 멸시천대를 받더라도 출세하고, 돈을 벌어야겠다는 각오다. 그는 그렇게 해서 출세하고, 돈을 모아 부자가 되었다. 이런 그에게 지위와 돈은 그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뽕나무 위로 올라갔고,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한가? 이제 그의 존재의미와 가치가 변했다는 뜻이다. 그가 뽕나무 위로 올라간 것은 사회적 지위나 체면을 내려놓은 것이고, 재산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다는 것은 재물이 더 이상 자신의 존재의미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삭개오의 이 고백은 변화의 선언이고, 변화를 위한 선언이다. 이 선언에 대하여 주님도 응답해 주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9,10).

 

우리가 오래 신앙생활을 해도 변화가 더딘 이유가 여기 있다. 변화를 위한 결단적인 선언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에는 수많은 매듭들이 있다. 감정의 매듭, 정서의 매듭, 관계의 매듭, 생활의 매듭, 습관의 매듭, 불신앙의 매듭, 죄의 매듭 등. 이런 매듭들이 성장과 성숙에 장애물로 작용한다. 삭개오처럼 이런 것들을 과감히 내려놓거나 단절을 선포해야 한다. 그 때 비로소 성장과 성숙을 경험할 수가 있다. 아무튼 우리로 이런 선포와 선언을 못하게 하는 것은 사단의 속임수다. 사단은 그냥 그대로 있어도 나쁘지 않다고 우리에게 속삭인다. 적당이 믿으면 되지 꼭 성장이나 성숙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러한 사단의 속삭임에 단호하게 맞서야 한다. 그리고 선포하고 선언해야 한다. ‘나는 변했다. 변한다. 변할 것이다. 주님은 내가 성장하고 성숙하기를 원하신다. 나는 이런 주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삶이 되겠다. 변화된 삶을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하겠다.’ 날마다 내 자신을 향해, 세상을 향해 외치고, 그리고 주님 앞에서 다짐하자.

 

데이비드 바움(D. Baum)은 그의 책「바보는 변했다고 하고 현자는 변하자고 한다」에서 스위스 시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1960년대에 스위스 시계가 세계 시장의 90%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때 두 명의 기술자가 각고의 노력 끝에 신기술 디지털시계를 계발했다. 그런데 누구도 그들의 기술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미국의 인스트루먼트사와 일본의 세이코사에 그 기술을 팔았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후, 스위스의 시계는 단 8%로 비참하게 몰락했다. 변화를 거부한 대가다. 역사가 토인비(A. J. Toynbee)는 ‘변화를 거부하면 결국 자기만족, 자기도취, 자기 우상화에 빠져 망한다.’고 했다. 이 말은 변화를 거부한 결과도 되지만 원인도 된다. 자기만족, 자기도취, 자기 우상화에 빠지지 않기 위해선 지속적으로 변화해야 한다. 변화가 곧 성장이고 성숙이다. 우린 이미 복음 안에서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이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장과 성숙을 위한 변화다. 삭개오처럼 변화를 갈망하고, 변화를 시도하고, 날마다 변화를 선포(언)하여 영/육간에 성장하고 성숙한 사람으로 변화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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