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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걸어야 할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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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706회 작성일 09-09-20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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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걸어야 할 ‘복음’

롬1:13~17

2009. 9/20 11:00

一所懸命(일소현명)

일본인들의 정신을 한마디로 ‘사무라이(武士) 정신’이라고 한다. 이 사무라이 정신의 핵심은 ‘잇쇼겐메이’(一所懸命)다. 이 말은 ‘한 곳에 목숨을 걸고 열심히 한다.’는 뜻이다. 자기가 섬기고 있는 주군을 위해,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위해, 자기 맡은 일을 위해 목숨을 걸고 죽기를 각오하는 것이 ‘잇쇼겐메이’다. 옛날에 어떤 요리사가 밥을 했는데, 주인의 밥에서 작은 돌이 나왔다. 그런데 이 요리사는 자기가 최선을 다하지 못해서 그랬다며 칼로 자기 배를 가르고 죽었다. 이 정신을 잘 반영하는 이야기다. 오늘날 시대는 변했어도 일본인들의 이런 정신은 그들의 생활전반에 여전히 남아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일본 제품의 불량률이 가장 낮고, 정직과 청결, 사후관리(A/S)가 세계 최고다. 이 모두가 ‘잇쇼겐메이 정신’에 근거한 것이다.

 

어느 직장인이 갑자기 퇴출을 당했다. 느닷없이 당한 일이라 충격이 너무 컸다. 그는 충격을 이기지 못해 자살을 결심하고 시도하려다가 어떤 방해꾼을 만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이 방해꾼에게 자신의 절망적인 상황을 모두 이야기했다. 그러자 이 방해꾼이 그에게 소중한 충고를 해주었다.

 

자살이란 말을 뒤집으면 살자란 말이 됩니다. 지금 당신이 자살하겠다는 그 결심으로 다른 일을 한 번 도전해 보세요. 그러면 당신은 분명히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이 말에 도전을 받아 ‘그래 한 번 살아보자.’고 결심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김밥장사를 시작했다. 그것도 그가 퇴출되었던 직장 앞에 말이다. 이는 시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아는 사람이 그들밖에 없었고, 갈 곳도 그곳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의 퇴출을 안타깝게 생각한 동료들이 그의 김밥을 사먹기도 하고, 포장을 해서 자기 집으로 가져가기도 하고, 사무실로 배달도 시켰다. 그는 가리지 않고 열심히 장사를 하여 크게 성공을 했다. 누군가 그에게 물었다.

 

‘전에 다니던 직장 앞에서, 그것도 동료들을 상대로 김밥장사를 하다니 창피하지 않습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비록 실패했지만 저는 한 때 자살을 결심하고 시도했던 사람입니다. 죽기를 각오했던 그 마음을 가지니까 두려움도 창피도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사실 무슨 일이든지 목숨을 걸면 못할 일이 없다. 두려울 것도 없고 창피함도 없다. 그래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누구냐? 자기 목숨을 내 놓은 사람이다. 성경도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히11:38)이라고 하였다. 신자는 이런 열정과 간절함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던져진 존재

실존주의 철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은 누군가에 의해, 혹은 무엇인가에 의해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Geworfenheit, 彼投性 存在)라고 한다. 자신의 의사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 세상에 그냥 던져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이 세계에 던져진 그 자체는 아무도 거역할 수 없지만 인간에게 한 가지 자유가 주어져 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살면서 다시 한 번 자신을 ‘던져질 수 있는’(Antworfenheit, 企投性) 자유다. 이는 자신의 의사와 선택에 의해서 던질 수 있다. 사실 이에 따라 그 사람의 삶에 대한 평가가 좌우된다. 그러므로 자신을 어디에, 누구에게, 무엇에 던지느냐가 중요하다. 주변에 보면, 어떤 사람은 도박에 자신을 던져서 자신은 물론 가정과 가족, 주변 사람들까지 망치고 있고, 어떤 사람은 명예에, 혹은 권력에, 세속적인 쾌락에, 재물에, 범죄에, 또는 분노와 원망에 자신을 던져 망치고 있는 사람도 있다. 물론 선한 일에 자신을 던져 값진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무엇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할까?

아무튼 인생의 가치는 무엇에, 누구에게 내 자신을 던지느냐에 따라 결정이 된다. 세속 철학은 이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주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인간이 누구에 의해, 그리고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던져졌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이 어디로부터, 그리고 무엇을 위해 왔는지를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값진 일에 자신을 던질 수 있을까? 그러나 성경은 이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가지고 있다. 성경 역시 인간은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에 의해,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던져진 존재, 곧 ‘보냄을 받은 존재’라는 것이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창45:5,7~8).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여기서 요셉과 바울의 견해를 종합해 보면, 인간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목적에 의해 던져진 존재요,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위해, 어디에, 누구에게 우리 자신을 던져야 할 것인지가 분명해 졌다. 값진 인생, 의미 있는 인생, 영광스러운 인생을 살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 자신을 던지는 것이다. 주님을 위해, 주님의 나라를 위해, 주님이 기뻐하는 일에 우리 인생을 던지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복음’이다. 이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우리 인생을 기꺼이 던져야 하고,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것이 복음이다. 주님도 세상에 계실 때,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복음전도가 자신의 영적인 양식이라(요4:34)고 하셨고, 이것을 위해 오셨다(막1:38)고 고백하셨다. 그래서 이 일에 자신을 온전히 던지셨던 분이 예수님이시다. 바울 역시 자신은 “복음을 위하여 택함을 입었고”(롬1:1), “그 이름을 위하여”(롬1:5) 사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복음에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행20:24, 21:13). 본문에서도 복음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을 피력하고 있다(14).

 

왜 복음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가?(16~17).

이후 수많은 주님의 종들이 이런 삶을 살았다. 모라비안(Moravian, 18세기 보헤미아의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의 지도자였던 진젠도르프(N. L. Zinzendorf) 백작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사회적인 지위와 조건들을 모두 다 버리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맨발로 거리를 뛰쳐나갔다. 이런 그에게 친구들이 ‘도대체 자네의 야망은 무엇인가?’고 물었다. 이 물음에 그는 ‘그리스도뿐, 오직 그 분뿐’이라고 대답을 했다. 깊은 밤에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이 성경을 묵상하다가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천사가 나타나 ‘그대는 무엇을 원하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꿈속이었지만 자신의 의식과 신앙을 지배하는 고백을 했다. ‘아니요, 저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뿐입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이들에게 주님은 전부였고, 전부였던 주님을 위해 주님의 복음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랬기에 이들 모두 역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길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복음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가? 본문이 그 이유를 말씀하고 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6,17).

 

루터(M. Luther)는 ‘성경의 다른 건 다 버려도 이 구절만 붙잡으면 구원받는다.’고 했다. 너무나 위대한 구절이다. 로마서의 첫 메시지는 ‘복음’이다. 복음의 내용으로 시작하여(2~4) 복음의 능력으로 서론을 맺고 있다. 그리고 바울 자신은 이 복음을 위하여 택함을 받은 사도(5)라고 소개한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걸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것은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다.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이 곧 복음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가장 큰 능력이다. 세상에서 하나님이 사람이 된 것보다 더 큰 능력이 어디 있겠는가? 그 하나님이 죄인을 위하여 죽으신 것보다 더 위대한 능력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들을 예수님을 통해 이루셨다. 그래서 복음을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기에 우리는 바울처럼 이 복음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이 복음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은 인간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마11:28)라고 부르고 있다. 사실 인간은 죄로 인한 저주의 짐, 고통의 짐, 질병의 짐, 가난의 짐, 억압의 짐, 죽음의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다. 그 속에서 신음하며 고통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승리하심으로 이와 같은 인생의 모든 문제를 이미 해결하셨다. 그래서 누구든지 복음이신 이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이를 경험하게 되고 누릴 수가 있다. 이것이 먼저 복음을 경험한 우리가 이 복음을 전파해야 할 이유이다. 나를 살리신 이 복음이 다른 사람도 살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복음은 능력이다. 살리는 능력, 고치는 능력, 회복시키는 능력, 변화시키는 능력이 복음 안에 있다.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 우리의 인생을 던져야 하는 것이다.

 

죽은 씨앗

교회학교 어린이부 교사가 성경공부 시간에 조그만 씨앗 하나를 가지고 왔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에게 선생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얘들아, 이것은 씨앗이란다. 그런데 이 씨앗이 자라서 큰 나무가 되려면 무엇이 가장 필요할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아이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대답을 했다. ‘흙이 제일 중요해요. 씨앗은 흙이 있어야 자랄 수 있잖아요.’ 한 아이가 자신 만만하게 대답을 했다. 그러자 다른 아이가 ‘햇빛이 가장 필요해요. 햇빛이 없으면 영양분을 만들어 낼 수 없어요.’라며 자신있게 대답했다. 한참 듣고 있던 선생님이 이제 결론을 내려야 할 시간이란 듯이 입을 열었다.

 

‘그래, 다 맞는 말이야. 그런데 이 씨앗은 삶은 것이란다. 그러니까, 죽은 씨앗이지. 죽은 씨앗에게는 햇빛도, 물도, 흙도, 공기도 더 이상 소용이 없단다. 그러므로 씨앗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이란다.’

 

햇빛도, 물도, 흙도, 공기도 다 중요하지만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생명이 전제되어야 한다. 생명이 없으면 이것들도 소용이 없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어도 생명이 없으면 아무 것도 소용없다. 복음이 중요한 이유, 복음에 우리의 인생을 걸어야 할 이유, 나아가서 복음전도를 사명으로 여기고, 여기에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고 살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복음은 곧 생명이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 복음이다. 그래서 이 복음을 발견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이 복음을 전파하게 되고, 또한 이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걸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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