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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받으라(Accept one an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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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21,586회 작성일 09-09-27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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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받으라(Accept one another).

롬14:1~12.

 

2009. 9/27 11:00

큰 결과는 작은 배려에서 시작된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에 대한 일화다. 남아프리카 연방의 통합을 위해 전략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던 추장 여러 명을 왕실로 초청하여 만찬을 베풀었다. 사전에 오리엔테이션이 있었지만 추장 한 명이 포크와 나이프 사용이 불편하자 손으로 음식을 먹었다. 함께 식사를 하던 영국의 각료들은 눈살을 찌푸리고 긴장하였다. 그 때 여왕이 빙그레 웃더니 자기도 나이프와 포크를 제쳐놓고 손으로 먹었다. 그랬더니 잠시 후 그곳에 있던 사람들도 여왕을 따라 손으로 음식을 먹었다. 그래서 아프리카 손님들은 기분 좋게 식사를 마쳤고, 여왕의 아프리카 통합제의에 흔쾌히 협력을 다짐했다고 한다.

 

초대를 받았으니 초대한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는 것이 예의고, 그 문화를 존중해 주는 것이 교양이다. 하지만 습관이란 한순간에 바뀌지 않는다. 때문에 힘들어 하는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고 받아주는 것은 배려이고 사랑이다. 비판이나 판단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사랑으로 품어주고 수용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아프리카 추장들이 여왕의 통합제의에 흔쾌히 협력하였던 이유가 여왕의 깊은 배려와 넓은 포용력에 감동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사소한 배려가 큰 결과를 낳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고, 또한 사랑의 능력이다. 사랑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Accept). 병이 들었으면 병이든 그대로, 무식하면 무식한 그대로, 가난하면 가난한 그대로 받아주는 것이 참 사랑이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이다. 주님은 내가 변해야만 받아주시겠다고 하시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다(롬5:8). 오늘부터 ‘신자의 삶’에 대한 시리즈 설교(영어 알파벳 순서에 따라)를 하려고 하는데, 첫 번째로 ‘받아 줌’(Accept)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다.

 

로마교회의 문제

당시 로마는 국제도시였고, 다문화 사회였다. 로마교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롬14장~15장은 로마교회가 문화적 차이로 인하여 갈등을 겪고 있는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주인공은 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이다. 유대인 신자들은 주님을 믿는 믿음이 주는 자유에 대한 확신이 약했다. 조상대대로 믿고 지켜왔던 모세의 율법이 여전히 이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고, 유대교의 전통과 관습에 깊이 매여 있었다. 반면 로마교회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이방인 신자들은 믿음의 자유를 주장하며 모세의 율법이나 유대교 전통에 대해 자유로운 입장에 서 있었다. 특히 이들 사이에 갈등의 원인이 되었던 것은 고기를 먹는 문제(2), 포도주를 마시는 문제(17), 그리고 유대교의 날들을 지키는 것이었다(5,6).

 

이 문제들에 대하여 유대인 신자들은 주님을 믿어도 지켜야한다고 주장했고, 이방인 신자들은 지킬 필요가 없다며 맞섰다. 그래서 이방인 신자들은 유대인 신자들의 행위를 경멸했고, 유대인 신자들은 이방인 신자들의 자유로운 생활방식을 정죄했다(3). 이렇게 비본질적인 일에 감정적으로 날카롭게 대립하여 서로를 판단하고 비난하였다. 사실 살아온 배경이 다르고, 사람마다 수준이 다르기 때문에 이런 견해의 차이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 차이로 인하여 서로를 판단하게 된 것이 문제다. 그렇다면 이렇게 감정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오늘 본문은 이런 심각한 상황에 놓인 로마교회를 향한 바울의 해결책이다.

 

서로 받으라.

사람 사는 세상에 문제가 없는 곳은 없다. 교회도 예외 일 수는 없다. 피를 나눈 사람들끼리 모인 가정 안에도 갈등이 있는데, 교회는 말할 것도 없다.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로마교회는 여러 인종이 섞여 있는 다문화 교회다. 특히 유대인과 이방인은 복음이 아니고는 절대로 함께 할 수 없는 사이다. 그런 그들이 복음 안에서 한 교회를 섬기고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지만, 거기엔 아직도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갈등은 예견된 일이다. 이에 대한 바울의 해결책은 간단하면서도 분명하다. 그것은 “서로 받으라.”(1)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서로 받는 삶을 살 수 있을까?

 

1.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으라(3).

사랑한다는 것은 받아준다는 뜻이다.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자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받아줄 수가 없다.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의 대부분이 자신을 싫어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와 실망이 다른 사람에게 대한, 혹은 사회에 대한 분노로 나타나 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자신을 사랑하고, 받아주는 것이 중요하다.

 

건강한 관계는 건강한 자아상에서 비롯된다. 건강한 자아상은 주님 안에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생긴다. 자아상이 건강한 사람은 자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외부 환경이나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늘 밝고 긍정적이며 안정감이 있고 확신에 차 있다. 너그럽고 수용의 폭이 크다. 바다와 큰 강은 물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처럼, 그래서 사람들을 두루 품어주는 건강한 관계를 유지한다. 바울은 치명적인 가시(약점)를 가진 사람이었다(고후12:7). 그런데 그는 이런 약점까지도 주님이 허락하신 것으로 믿고 받아들였다. 오히려 이 약점이 주님의 은혜를 머무르게 하는 도구가 되었다며 기뻐하고 자랑하였다(고후12:10). 그가 이런 건강한 자아상을 가졌기에 누구도 품을 수 있었고, 어떤 상황과 환경에서 천국을 누렸다. 본문은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으셨다(3,15:7)고 말씀한다. 이는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고, 나아가서 다른 사람을 받아주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먼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것이 다른 사람을 받아주는 첫 걸음이다.

 

2.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인정하라.

10인(人) 10색(色)이란 말이 있다. 같은 사람이 없고 사람마다 각기 다르다는 뜻이다. 신앙의 수준도 마찬가지다(2).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는 비결은 상대방이 나와 다르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는데 있다. 나와 다른 남을 인정하는 것, 이것은 인격의 성숙도를 보여준다. 미숙할수록 나와 다른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소아적 반응을 보인다. 나와 다른 상대방을 이해하고 인정하지 못할 때 갈등은 커지고 심지어 전쟁의 원인까지 된다. 로마교회의 문제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미숙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인정할 때 판단이나 비난이 사라지고 서로 받아주게 된다.

 

특히 1절의 “받되”라는 단어는 헬라어 ‘프로스람바노’에서 왔다. 이 프로스람바노는 ‘동질성을 인정하고 구성원의 하나로 여긴다.’는 뜻이다. 동질성을 근거로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인정하라는 것이다. 본문은 동질성을 근거로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인정해야 할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고기를 먹는 믿음이 강한 사람이든 먹지 못하는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든 모두가 하나님이 이미 받으신 사람들(3)이라는 점이다. 신앙의 동질성이다. 둘째는, 신자는 수준의 차이는 있어도 같은 믿음 안에서 삶의 목적이 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8). 목적에 있어서 동질성이다. 이와 같은 동질성을 근거로 하여 서로 다름을 인정하며 서로를 받으라는 것이다. 사람은 다른 점도 많지만 또한 같은 점도 많다. 다른 점보다는 같은 점에 집중하면 다른 점도 극복할 수가 있다. 차이를 바라보는 소극적인 태도보다는 동질성을 바라보는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라는 것이다. 이것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인정하는데 효과적이다.

 

3.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15:1).

트로이(Troy) 전쟁에서 전쟁의 영웅 아킬레우스(Achileus)라는 인물이 나온다. 그는 그의 어머니 테티스(Tethys)가 저승의 스틱스(Styx) 강에 그의 몸을 담가 어떤 무기로도 상처를 입지 않는 무적의 몸이었다. 그러나 발목 부분은 강물에 닿지 않았기 때문에, 발목 뒤 힘줄은 아킬레우스가 상처를 입을 수 있는 유일한 부분이었다. 이 신화에 의해 사람들은 치명적인 약점을 ‘아킬레스건’(Achilles tendon)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신화의 의미는 세상에 완벽한 인간은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강한 사람도 한 가지 이상의 약점이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 사람=장점+약점이다. 사람은 누구든지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도움을 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것은 자신의 장점으로 다른 사람의 약점을 담당하며 사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의 약점 또한 누군가에 의해 채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여기서(15:1)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믿음의 강함을 연약한 지체를 판단하는데 사용하지 말고 돕는데 사용하는 것으로 보이라는 것이다. 건강한 믿음의 모습, 성숙하고 사랑이 풍성한 신자의 모습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건강한 믿음은 다른 사람의 약점을 판단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 준다. 판단하기보다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를 세워주고 이끌어준다. 그러므로 “서로 받는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맡아 감당해 주는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주님께서 이런 사랑을 먼저 우리에게 보이셨고, 또한 우리가 이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바울은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2)고 하였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법이란 ‘사랑’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은 주님의 법을 성취하는 길이다.

 

우리는 서로를 위한 존재다.

이 세상에 나만 홀로 있다고 상상해 보라. 나의 삶이 더 의미가 있고, 더 아름답고, 더 돋보이게 된 것은 배경이 되는 ‘너’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15:2)고 말씀하고 있다. 나의 존재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되고 기쁨이 되라는 말씀이다. 즉 다른 사람을 더욱 의미가 있고, 더욱 아름답고, 더욱 돋보이게 하는 삶을 살라는 뜻이다. 출전(出典)을 알 수 없는 아주 멋진 글이 있어서 소개하고자 한다.

 

유(有)는 무(無)로 생(生)하고,

무(無)는 유(有)로 생(生)하니,

유(有)와 무(無)가 공(共)이다.

 

이는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 덕으로 살고, 없는 사람은 있는 사람 덕으로 사니,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 똑같다.’는 뜻이다. 얼마나 귀한 말인가? 이런 마음, 이런 자세로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를 인식하고, 서로 인정하며 산다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울까? 얼마나 행복한 세상이 될까? 그리고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 그러면 어떻게 이런 마음과 자세를 가질 수 있을까? 이것은 믿음 안에서 건강한 자아상을 가지고 차이를 넘어 사랑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인정하며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면서까지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 줄 때 가능하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는데 꼭 필요한 사랑과 행복의 비타민 ‘A’는 서로 ‘받아 줌’(Accept)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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