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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위로하라(Comf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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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9,701회 작성일 09-10-11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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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위로하라(Comfort).

눅7:11~17

2009. 10/11 11:00

삶의 진통제

어떤 신앙이 신실한 분이 사업에 실패하여 많은 빚을 지게 되었다. 가족들을 볼 면목이 없어 하루 종일 고민하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집 안팎에 불을 환하게 켜놓고 미소로 남편을 맞았다. 그리고 잠시 기도 후 말을 건넸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보고 손가락질을 한다 해도 나는 당신의 진실을 믿습니다. 비록 부도가 나서 많은 빚을 졌지만 당신의 진실은 부도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당신이 다시 일어날 것을 확신합니다. 그 옛날 욥이 다시 하나님의 복을 받아 일어난 것처럼, 당신도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나와 아이들은 변함없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의 당신을 가장 뜨겁게 사랑합니다.’

 

이 분은 아내가 울면서 자신을 원망하고 불평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자신을 격려하는 아내의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아내 앞에서 목 놓아 울고 말았다. 그날 이후 다시 용기를 얻어 마침내 사업을 다시 일으켰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면, 그것이 기적 아니겠는가? 사랑을 담은 따뜻한 말은 한없는 위로와 기쁨을 준다. 위로는 고통을 잊게 하는 진통제와 같다. 실패나 좌절, 절망과 같은 삶의 모든 고통과 아픔을 잊고 새롭게 출발하게 해주는 것이 위로다. 그래서 바울은 위로를 ‘진통제’를 뜻하는 단어로 표현을 하고 있다(골4:11). 국어사전에도 위로를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 주거나 슬픔을 달래 줌’이라고 적고 있다. 즉 고통이나 아픔을 완화시켜주는 작용을 한다는 뜻이다. 오늘은 신자의 ‘삶 시리즈’ 세 번째로, 서로 ‘위로 함’(Comfort)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예수님, 우리의 참된 위로자

본문은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들의 죽음 앞에서 절망적인 슬픔에 빠진 한 여인과 그녀의 아들을 살려주시므로 그 슬픔을 위로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다. 여기에 두 행렬이 나온다. 한 행렬은 성 안에서 밖으로 나오고 있고, 다른 하나는 성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한 행렬은 죽은 자를 따르는 장례의 행렬, 곧 죽음의 행렬이다. 절망과 슬픔의 행렬이다. 다른 행렬은 예수님을 따르는 생명의 행렬, 곧 소망과 위로의 행렬이다. 그런데 이 두 행렬이 서로 만나게 되었다. 즉 죽음과 생명이 서로 마주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죽음이 생명으로, 슬픔이 기쁨으로, 절망이 희망으로, 장례의 행렬이 축제의 행렬로 바뀌게 되었다. 이는 죽음의 행렬에 참여했던 모두에게 주어진 ‘주님의 위로’였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문제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주님은 우리의 참된 위로자이시다. 누구든지 주님 안에 있으면 이 위로를 경험할 수가 있다. “너희가 젖을 빠는 것 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 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을 인하여 즐거워하리라.”(사66:11).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주님께서 그 택하신 자들을 위로하신다는 약속이다.

 

어떻게 위로할까?

본문에 주님께서 이 청년을 살리시는 과정이 나온다. 이는 주님의 ‘마음’(죽은 청년의 어머니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과 ‘말씀’(이 어머니에게 하셨던 주님의 말씀), 그리고 ‘행동’(죽은 자를 살리실 때 보이셨던 주님의 행동)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위로의 방법으로 적용할 수가 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이 보여주신 방법에 따라 서로 위로할 수가 있다.

 

1. 사랑하는 ‘마음’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13).

드라마 「대장금」에서 정상궁(故 여운계 분)이 장금이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한 말이 참으로 인상이 깊었다. ‘어릴 적 내가 본 화려한 궁(宮)은 허상이었어. 늘 사람이 바글거렸지만 궁은 외로웠다. 모두들 아마도 그 외로움에 지쳐 그렇게들 시기와 질투가 있었을 게야. 외로움에 지쳐 승은(承恩)이라도 입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니 아등바등했을 테고, 외로움에 지쳐 부(富)라도 얻어야겠으니 남에게 빌붙었을 테고, 외로움에 지쳐 권력이라도 얻어야겠으니 권모술수라도 써야했겠지. 어여삐 여기거라. 불쌍히 여겨.......이게 내가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마지막 말이다.’ 남을 너그럽게 이해해 주는 마음, 남을 불쌍히 여기고 어여삐 여기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13절,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는 비극적인 죽음 앞에서 절망하고 있는 여인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을 잘 보여준다. “보셨다”는 말은 주님의 깊은 관심을 의미한다. 즉 이 여인의 슬픔과 고통을 아셨고, 남편을 잃고 또 외아들까지 잃은 이 여인의 참담한 심정을 이해하셨다는 뜻이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은 이 여인이 당한 일과 이로 인한 이 여인의 슬픔과 고통에 깊은 연민을 느끼셨다는 뜻이다. 즉 공감하는 마음이다. 사랑은 상대방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그의 슬픔으로 나의 슬픔으로 느끼는 것이다.

 

관심에는 두 가지가 있다. 뜨거운 관심과 차가운 관심이다. 뜨거운 관심은 사랑이 배경에 있으나 차가운 관심은 미움, 증오, 편견이 배경이다. 사랑이나 미움이나 쓰면 쓸수록, 나누면 나눌수록 솟아나는 샘물과 같다. 다만 오염된 지하수에서는 오염된 물만 나올 뿐이다. 미움이나 증오가 배경이 된 차가운 관심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한갓 가십거리로 전락시키고, 또는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이용하기도 한다(요8:1~11). 이는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되는 참으로 비겁하고 잔인한 짓이다. 그러나 사랑이 배경이 된 관심은 상대방의 불행에 진심으로 동참하게 된다. 그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그의 슬픔으로 자신의 슬픔으로 느낀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이다. 이 마음을 품어야 위로자가 된다. 두 도둑이 죽었다. 한 도둑은 남의 재물을 훔쳐 지옥에 갔고, 다른 한 도둑은 남의 슬픔을 훔쳐 천국에 갔다. 우리 역시 사랑의 마음으로 남의 슬픔과 아픔을 훔쳐가는 위로의 사람이 되자.

 

2. 사랑의 ‘말’ “......울지 말라 하시고.”(13).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주 소중한 선물을 주셨다. 그것은 ‘말’이다. 그런데 말도 관심과 마찬가지로 사랑이 배경이 된 말은 살리는 도구가 되지만 미움이나 증오, 시기가 배경이 된 말은 죽이는 도구가 된다. ‘격려와 칭찬’은 사랑이 배경이 된 말이다. 이는 위로의 소중한 도구다. 누구나 격려의 말을 듣고 칭찬의 말을 들으면 위로를 받는다.

 

초등학교 1학년인 아들이 하나 있는데, 학교생활에 흥미를 잃어 큰 고민에 빠진 이민부부 가 있었다. 특히 체육시간이 있는 날이면 더욱 심했다. 1학년은 주로 달리기를 많이 하는데 같은 또래의 미국 아이들은 다리도 길고 체구가 커서 잘 다렸다. 그래서 이 아이는 번번이 꼴찌였다. 이것이 창피해서 학교생활이 싫어진 것이다. 부부는 체육시간이 든 날이면 아이를 학교 보내느라 혼이 났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아이가 상장 하나를 들고 오면서 너무 좋아했다. 그 상을 받아본 부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상장의 내용은 이랬다.

 

‘위의 학생은 달리기 대회에서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 뛰어 다른 학생의 모범이 되었으므로 이 상장을 드립니다.’

 

이를테면 꼴찌에게 준 상이었다. 1등은 아니어도 열심히 하는 학생을 칭찬하고 용기를 주는 격려의 상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후 이 아이가 즐겁게 학교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상 하나가 이 아이의 학교생활에 대한 태도를 바꿔놓은 것이다. 이것이 곧 격려의 힘이다. 그래서 윌리엄 바클레이(W. Barclay)는 이 격려를 ‘영혼의 산소’라고 하였다. 이는 격려가 우리의 삶에 그만큼 절실하다는 뜻이다. 작은 격려와 칭찬이 그 동안 꼴찌로 인한 마음의 상처에 큰 위로가 되었던 것이다.

 

주님은 이 여인을 향하여 “울지 말라”고 위로하셨다. 물론 이 말은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에게나 들을 수 있는 말이다. 동네 사람들도 이 여인에게 ‘울지 마라’고 위로했을 것이다. ‘운다고 죽은 아들이 살아오겠느냐? 울지 말고, 그저 숙명으로 받아들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울지 말라고 하신 것은 그 의미가 다르다. 여기에는 ‘이제 더 이상 울 필요가 없다.’는 뜻이 담겨 있다. 왜냐하면 주님이 죽은 아들을 살려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의 위로는 ‘입 서비스’에 지나지 않다. 사람에게는 아들을 살리는 능력이 없고,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나는 일 외에 어떤 것도 이 여인에게 위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죽은 아들을 살릴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참된 위로자시다. 우리 가운데 위로가 필요한 분들이 많다. 사람의 위로로 위로가 되지 않을 만큼 큰 슬픔과 고통 중에 있는 분들도 있다. 이분들이 위로의 주님을 만나고, “울지 말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한다. 아울러 우리 역시 주님의 위로로 서로 위로하며, 무엇보다 주님 안에서 격려와 칭찬의 말을 유감없이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3. 사랑의 ‘행동’(만지심)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14).

뇌수술을 받으러 가는 한 사람이 있었다. 수술에 성공해서 생존할 확률은 고작 10%였다. 마음을 가누질 못하고 차에 올라 집을 나섰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느낌이었다. 차가 집을 나와 골목으로 접어드는데, 길 양쪽으로 이웃사람들이 서서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이웃들이 그의 수술 성공과 건강을 기원하며 격려해주자고 약속한 일이었다. 절망했던 이 사람은 ‘나는 사랑받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 벅찼고,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치료를 받았다. 이웃들의 작은 사랑의 행동이 절망하고 있는 사람에게 큰 위로가 된 것이다. 세상에서 이 만큼 의미있고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나의 작은 사랑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면 이보다 의미있고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제 주님의 관심은 이 여인에게서 죽은 청년에게로 향하신다(15). 주님은 청년이 죽어서 들어있는 관에 손을 대셨다. 그리고 이 청년을 향하여 일어나라고 명령하셨다. 주님은 단지 말씀만으로도 이 청년을 살릴 수 있으셨다. 그런데 굳이 손을 대시고 명령을 하셨다. 그것은 상여를 멈추게 하려는 표시기도 하지만, 여기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시신이 들어 있는 관을 만지는 것은 율법에서 금한 일인데(레22:4), 단순히 상여를 멈추고자 율법을 어기실 주님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이는 율법을 초월한 주님의 뜨거운 사랑과 ‘주님의 간섭하심’을 뜻한다. 이 여인의 문제에 직접적인 개입을 의미한다. 즉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울지 말라고 위로의 말씀을 하심도 개입이지만 손을 대신 것은 ‘구체적인 사랑의 행동’이다. 사랑의 마음을 행동으로 보이신 것이다. 이와 같은 주님의 뜨거운 사랑의 만지심이 기적을 낳았다. 저와 여러분도 순간순간 주님의 이러한 사랑의 만지심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여기서 회복의 역사, 치유의 역사, 위로의 역사가 일어난다.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다. 사랑의 만짐을 통해 위로를 받는다. 말보다도 말없는 사랑의 만짐이 더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므로 주님처럼 사랑의 관심을 구체적인 사랑의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란다. 주는 내게는 사소한 일이지만 어떤 사람에게 생명을 걸만큼 소중한 일이 될 수가 있고, 나는 그냥 한 일인데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새로운 삶을 위한 동기가 될 수 있다. 우리의 크고 작은 일에 주님의 사랑을 담아 행동한다면 그 효과는 더욱 극대화되리라 생각한다. 죽은 청년이 다시 살아난 것처럼 슬픔과 고통으로 낙심과 좌절, 절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나로 인하여 위로를 받아 다시 일어서게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이 세대 가운데 가득 찬 죽음의 행렬을 생명의 행렬로 변화시키는 일이다.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요즈음 온 국민의 분노와 안타까움을 주고 있는 ‘나영이 사건’을 보면서, 인간의 사악함에 깊은 절망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위로하는 사람들을 보며 그래도 세상은 살만한 곳이구나 하는 생각을 갖는다. 인간이 아름다운 이유는 슬퍼도 상처 받아도 서로를 위로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세상엔 위로가 필요없을 만큼 온전하고 강한 사람도, 위로하지 못할 만큼 비어있는 사람도 없다. 세상에 이런 흉악한 일들이 일어날수록,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질수록 서로 위로하고 위로받으며 살아야한다. 위로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사랑이자 힘든 세상을 견디게 해주는 원동력이다. 이런 위로를 통해 세상도 사람도 치유된다. 그리고 이것이 세상을 아름답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비결이다. 신자는 이미 주님의 위로를 경험한 사람들로, 이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할 책임이 있다(고후1:4). 그러므로 우리 모두 주님처럼 사랑의 마음, 사랑의 말, 사랑의 행동을 통해서 세상을 위로하고 사람들을 위로하며, 또한 위로받으며 살 수 있기를 바란다. 세상을 아름답게,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사랑과 행복 비타민 ‘C’는 서로 ‘위로 함’(Comfort)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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