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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삶의 기초(06-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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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5,097회 작성일 06-05-29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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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삶의 기초
마7:24~27

나이 어린 친구들을 제외하곤 오늘 주보에 실린 그림이 누구의 어떤 그림인지 다 아실 줄 압니다. 밀레의 만종(晩種)이란 그림입니다. 해질녘 멀리서 들려오는 교회 종소리를 듣고 하던 일손을 멈추고 두 부부가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그림에 숨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농부 부부가 바구니를 발밑에 놓고 기도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 바구니가 감자씨와 밭일도구를 담는 바구니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은 그 바구니에는 씨감자가 들어있던 게 아니라 그들의 사랑하는 아기의 시체가 들어 있었답니다. 그들은 배고픔을 참으면서 씨감자를 심어놓고 겨울을 지내며 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하지만 아기는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죽은 것입니다. 죽은 아기를 위해 마지막으로 부부가 기도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 만종입니다. 그런데 친구의 만류로 바구니에 아기 대신 씨감자를 그려 넣게 된 것입니다. 저는 이 그림의 숨은 이야기를 듣고, 지금의 이 그림을 보면서 겉보기엔 평화롭고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내면엔 엄청난 슬픔과 아픔을 지니고 사는 게 인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밀레의 만종에는 3대 신성미(神性美)가 나타나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신성한 신앙입니다. 기도하는 모습에서. 둘째는 신성한 가정입니다. 부부가 함께 기도하는 모습에서. 셋째는 신성한 노동입니다. 일터에서 함께 기도하는 모습에서. 저는 이 신앙과 가정, 그리고 노동(일)이 바로 행복한 삶의 기초요, 또한 행복한 삶의 요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이라고 하는 보배로운 교훈을 마치면서 주신 비유의 말씀입니다. 지금껏 주신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집의 기초를 반석 위에 둔 사람과 같고, 말씀을 듣고도 행치 않는 사람은 집의 기초를 모래 위에 둔 사람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앞에서 들었던 말씀의 실천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동시에 우리 삶의 기초를 어디에, 무엇에다 두고 살 것인가 생각해 보게 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기초가 잘못된 집은 쉽게 무너지고, 기초를 반석위에 두고 세운 집은 어떤 풍파에도 무너지지 않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에, 어디에, 누구에게 삶의 기초를 두고 살아가야 하느냐,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이 곧 우리 인생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기초와 관련하여 사람을 두 종류로 분류할 수가 있습니다. 한 종류는 흔들리는 것에 삶의 기초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소위 세속적인 가치들 위에 인생의 기초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가치들이 사라지면 그의 인생 또한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한 종류는 흔들리지 않는 것에 삶의 기초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행복한 삶이란 바로 이 흔들리지 않는 것에 기초를 두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저는 이 본문말씀에 밀레의 만종에 나타난 3대 신성미를 적용하여 행복한 삶의 기초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행복한 삶의 기초는,

1.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신성한 신앙입니다.
성경은 인생을 질그릇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인간이란 연약한 존재란 뜻입니다. 인생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바이러스에게도 쓰러지고 마는 존재입니다. 그 다음으로 인간은 무가치한 존재란 뜻입니다. 어떤 화학가가 인체를 분석한 결과, 인체의 지방으로는 여섯 조각의 비누를 만들 수 있고, 인으로는 성냥 이 백 이십 개피를 만들 수 있고, 모든 석회질로는 닭장 하나를 소독할 수 있고, 유황으로는 개 한 마리에게 있는 벼룩을 죽일 수 있고, 철로는 못 하나를 만들 수 있으며, 그 밖에는 소금 한 줌, 설탕 한 컵과 화약을 만들어서 총으로 한 번 쏠 수 있는 약간의 질소 가스가 있고, 나머지는 모두가 수분이라는 것이다. 돈으로 환산하면 몇 만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질그릇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질그릇이라도 그 속에 담겨진 내용물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릇의 가치가 변합니다. 그 속에 보화가 담겨 있으면 보물 그릇이 됩니다. 우리 인생도 마음에 무엇을 품느냐에 따라 존재가치가 결정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으로 우리 몸은 영광스러운 주님의 몸으로 변합니다. 그러므로 가치 있는 삶.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신성한 신앙을 가지고 사는데 있습니다.

살면서 슬픔과 절망을 한번도 느끼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인생에는 고통과 슬픔과 피곤함과 절망과 처참함이 있습니다. 삶의 권태, 무의미한 삶, 죄의식으로 인한 무력감, 견딜 수 없는 외로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이러한 삶의 모습들이 종종 복병처럼 등장해 영혼을 위협하고, 우리의 삶을 뒤흔듭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믿음은 삶의 권태를 사라지게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평범한 삶에 생명력과 활력을 더해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무의미한 삶도 사라지게 합니다. 목적도 없고, 개척정신도 없고, 모험정신도 없는 무의미한 삶이 왜 생깁니까? 자신의 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때 그의 삶은 진정 의미 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믿음은 죄의식으로 인한 무력감도 사라지게 합니다. 죄의식으로 인한 무력감, 이것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다가오는 가장 불행한 병입니다. 이 병의 희생자들은 잘못된 약물이나 오락의 도움으로 일시적인 위안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병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다가오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만이 이 널리 퍼져있는 현대인의 병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견딜 수 없는 외로움도 사라지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한 이중의 해결책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친히 친구가 되어 주심으로 외로움을 없애주시고, 또 하나는 예수님을 믿는 다른 사람들과 한 가족이 되게 하심으로 외로움을 없애 주십니다. 믿음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지게 합니다. 죽음은 이 지상에서 가장 강한 왕입니다. 어느 누구도 죽음 앞에 대적해 설 수 없습니다. 모든 불행의 원천은 죽음의 그림자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도 죽음의 그림자 너머에 있는 찬란한 세계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도 간혹 실망스런 일이 찾아옵니다. 교회에 실망할 수도 있고, 다른 교인 때문에 실망할 수도 있고, 인생의 고난 때문에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넓게 보면 차가운 한류가 흐르는 곳 근처에는 따뜻한 난류도 흐르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죄악이 널려져 있는 만큼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도 곳곳에 펼쳐져 있습니다. 그 자비와 은총은 우리의 상처를 아물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의 행복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2. 예수 그리스도를 호주로 모신 신성한 가정입니다.
1852. 4. 10. 한 미국인이 알제리의 한 길가에 쓰러져 죽은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로부터 31년이 지난 후에 미국 정부는 군함을 보내서 그의 유해를 가져오도록 했습니다. 군함이 알제리에서 그의 유해를 싣고 뉴욕에 도착하는 시간에 유해를 영접하려는 군중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유해가 운구될 때 군악대가 미국 국가를 연주하고 조기가 나부끼기 시작했습니다. 대통령까지 나왔습니다. 고위관리들이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여 애도의 뜻을 표했습니다. 도대체 누구의 유해이기에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애도했겠습니까? 그는 전쟁터에서 큰 공을 세운 용감한 장군도 아니었습니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위대한 정치가도 아니었습니다. 세계의 영웅도 아니요, 엄청난 명예와 지위를 가진 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바로 이 사람이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노래를 지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애창하는 즐거운 나의 집(Home Sweet Home)을 작사한 페인(John Howard Payne)이라는 사람입니다. 페인은 집을 떠나 먼 타국에서 외롭고 쓸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문이 활짝 열려있는 집 앞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불빛이 하얀 눈 위에 비췄습니다. 열려진 문 안에서는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벽난로가 보였습니다. 그때 그 가정에 아버지인 듯한 남자가 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가족들은 모두 포옹하며 정답게 맞이했습니다. 페인은 전보다 더 고향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방에 돌아가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집 내 집뿐이리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도
꽃 피고 새 우는 집 내 집뿐이리
오- 사랑 나의 집 즐거운 내 벗 내 집뿐이리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곳, 내가 쉴 수 있는 곳, 내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곳은 가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통하여서 이 땅에서 복되게 살게 만드시고, 가정을 통하여서 이 세상에서 행복을 누리며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만드신 최초의 기관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교회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국가를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먼저 가정을 만드셨습니다. 그것도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교회나 국가의 가장 기초 집단입니다. 가정이 건강해야 교회도 건강하고, 사회도 건강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건강한 가정, 행복한 가정의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정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 이것이 행복한 가정, 건강한 가정의 비결입니다. 오늘 가정의 위기가 여기에 있습니다. 가정의 기초를 잘못된 것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곳곳에서 가정들이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전 러시아에 4년 동안 있으면서 공산주의가 망하게 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를 가정의 파괴라고 생각했습니다. 공산주의 가정은 이데올로기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겐 가정도 하나의 혁명의 도구에 불과합니다. 공산주의라고 하는 이데올로기에 가정이 철저히 희생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 그들의 무덤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무튼 가정이 병들면 국가도 병들고, 가정이 무너지면 사회도 무너집니다.

디트로이트는 미국의 자동차 도시입니다. 그곳에 자동차 왕 헨리 포드 박물관이 있습니다. 그곳에 들어가 보지는 못했고, 그냥 지나치기만 했는데, 그 박물관에 포드가 늘 한 말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헨리는 꿈을 꾸는 사람이었고 그의 아내는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꿈꾸는 남편과 기도하는 아내가 있는 가정은 행복한 가정입니다. 가정은 건물이 아닙니다. 비록 작고 초라하더라도 예수님의 사랑이 넘친다면 그곳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집입니다. 이런 가정에서 믿음과 소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신앙과 그 신앙에 기초한 예수 그리스도를 가정의 주인으로 모신 신성한 가정을 만들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3.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소명으로 여기는 신성한 노동입니다.
중국 명나라 때 왕양명(王陽明)이라는 유학자는 만년에 그의 일생을 회고하면서 자신의 평생에 네 가지의 고통을 받아왔다고 술회했습니다. 그 네 가지 고통이란, 첫째는 배고픈 것과 추운 것이었다고 합니다.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해서 당하는 육체적인 고통입니다. 사실 이보다 절박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생존적 차원에 속하는 것으로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입니다. 두 번째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은 냉대 받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정신적인 고통입니다. 밥도 먹고 옷도 입었는데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멸시하고 냉소적으로 대합니다. 이 또한 견디기 어려운 고통입니다. 세 번째로 고통스러운 것은 염려와 걱정이었다고 합니다. 정서적인 고통입니다. 생각해보면 세상에서 염려처럼 필요 없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염려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백해무익한 것임을 알면서도 걱정하지 않을 길이 없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 고통,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은 '한가로움'이었다고 합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한가로움이 가장 큰 고통이라고 했습니다. 해야 할 일이 없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사람은 일을 해야 합니다. 행복과 보람은 일을 하는 데 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창3장), 인간에게 노동은 범죄한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에겐 이마에 땀을 흘리지는 수고를 하여야 땅이 소산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셨고, 하와에겐 사고의 고통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에는 땀을 흘리고 일을 한 다음에야 보람, 의미,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사람은 일을 해야 합니다. 행복과 보람은 일을 하는 데 있습니다.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는 장작불을 때는 난로 앞에 이런 글을 새겨 놓았었다고 합니다. '장작을 몸소 패면 겹으로 더워진다.' 이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추울 때 난로 앞에 앉으면 따뜻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몸소 장작을 패면 패는 동안에 덥고, 그 장작으로 불을 피워서 덥습니다. 이중으로 따뜻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일 하는 것이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행복하게 해 준다는 뜻입니다. 음식으로 인한 즐거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일한 뒤 허기진 상태에서 대하는 음식이 더 맛있고 즐겁습니다. 일이 음식을 맛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재물도 그렇습니다. 돈 많은 아버지가 자식에게 돈을 물려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돈을 벌면서 얻은 행복은 물려줄 수가 없습니다. 그 기쁨과 즐거움은 물려줄 도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일 한 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아프리카 밀림에서 원주민들과 원시적인 생활을 하면서도 95세까지 살았습니다. 그는 만년에 가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모든 병에 대한 가장 좋은 약은 내가 할 일을 가졌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내가 할 일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열심히 뛰는 것이 최고 '명약'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행복의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일을 함에 있어 중요한 것은 일하는 마음가짐입니다. 어떤 자세로 일하느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을 한다고 다 행복하고, 일 한다고 다 건강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하는 태도가 바로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 때문에 더 스트레스를 받고, 일 때문에 건강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영국의 극작가인 버나드 쇼(G. Bernard Shaw)는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바보스러운 사람은 자기 직업을 의무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의무 때문에 하는 일은 참으로 괴롭고 따분합니다. 발명왕 에디슨은 하루 18시간씩 일했지만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일을 재미로 했고, 일 보다 즐거운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 자체를 즐겼기에 하루에 18시간을 일해도 따로 휴식이 필요 없었던 것입니다.

셰익스피어가 한 번은 식당에 들어가 점심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식당에 있던 사람들이 모여와서 셰익스피어에게 정중히 인사들을 합니다. 그 광경을 밖에서 보던 청소부가 비를 든 채 땅이 꺼질듯이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이것을 본 셰익스피어가 그 청소부를 불러서 물었습니다. "여보시오, 당신은 왜 그렇게 땅이 꺼질듯이 한숨을 쉽니까?" 청소부 대답이 "나도 선생님과 같은 남자인데, 선생님은 그렇게 많은 사람의 존경의 대상이 되고 나는 이처럼 한 끼의 밥을 벌기 위해서 온종일 이 마당만 쓸고 있으니 너무나 자신이 한심스러워서 한숨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이때 셰익스피어는 청소부를 향해 말했습니다. "친구여, 한탄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지금 하나님이 지어 놓으신 이 세계의 한 모퉁이를 깨끗하게 하는 책임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대가 이 책임을 감당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지어 놓으신 이 지구의 한 모퉁이는 더러워질 것입니다." 어떻게 기쁨을 느끼면서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어떤 일이든 그 일에 대한 소명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일의 보람, 기쁨,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일에서 이런 보람과 기쁨을 느낀 사람이라야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람마다 행복을 꿈꾸고, 행복을 노래합니다. 행복을 찾아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초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 기초에 문제가 있으면 반드시 문제가 발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집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신성한 신앙, 예수 그리스도를 가정의 주인으로 모신 신성한 가정, 그리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소명으로 아는 신성한 노동에 하여, 행복하고 아름다운 여러분의 인생의 집을 건축할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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