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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용서하라(Forg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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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7,201회 작성일 09-11-01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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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용서하라(Forgive).

마18:21~35

2009. 11/1 11:00

살아가기 위해 용서하라(Forgive to live).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롬3:23)고 말씀하고 있다. 세상에는 완전하고 완벽한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때문에 살면서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또한 상처를 받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 상처로 인하여 분노와 고통 속에서 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복수를 위해 고민을 하기도 하고, 또는 평생 원수처럼 지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훌륭한 사람은 이런 상처를 잘 극복해서 상처로 별이 되게 한다. 상처로 별이 되게 하는 비결이 ‘용서’(容恕)다.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용서 프로젝트’의 설립자이자, 용서학 교수인 프레드 러스킨(P. Ruskin)은 수년 동안 심리학과 의학을 접목시켜 과학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용서」라는 책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사람은 용서할 때 스트레스와 분노가 감소하고,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여 건강하고 행복하게 된다.’고 말한다. 탈무드에도 ‘당신이 남에게 복수하면 그 기쁨은 잠깐이지만, 용서하면 그 기쁨은 영원하다.’고 했다. 복수의 기쁨과 용서의 기쁨이 질적으로 다르다는 이야기다. 용서하면 손해인 것 같지만, 용서가 큰 기쁨을 주고, 축복이 된다.  

 

미국 미시간 주에 있는 호프대학에서 71명에게 과거의 상처나 원한을 기억하도록 했더니 혈압이 오르고 맥박이 빨라지고 근육이 긴장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이 대학에서 또 비슷한 실험을 했다. 1,32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누군가를 용서한 사람이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보다 훨씬 건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어느 일간지에 정신병원에 입원한 환자의 절반정도는 용서하거나 용서받으면 다 나을 환자라는 기사가 나왔다. 용서는 내 영이 살고, 내 육체가 살고, 내 이웃이 사는 길이다. 용서하지 않으면 질병도 낫기 힘들고, 영적으로도 막혀 신앙이 성장하지 않고, 하늘 문이 막혀 축복도 받을 수 없고, 기도 응답도 받을 수 없다(人通하면 神通하고, 神通하면 亨通한다). 그래서 주님은 예물보다 먼저 형제와 화해를 요구하셨다(마5:23~24). 오늘은 신자의 ‘삶 시리즈’ 여섯 번째로, 서로 용서함’(Forgive)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용서의 조건

심리학자이자 심리상담사로 행동 건강학을 연구하고 있는 딕 티비츠(D. Tibbits)의 「용서의 기술」이라는 책이 있다. 이는 소위 ‘용서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책이다. 그는 용서를 ‘다른 사람의 잘못된 행동을 바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규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내가 상대방을 용서한다 해도 그 사람의 행동에 법적, 혹은 윤리적인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왜냐하면 용서는 복수하고 싶다는 자신의 욕구를 풀어주는 것이지 인과관계의 법칙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용서는 현재의 평온을 회복하고, 미래의 희망과 삶의 목적을 되살리기 위해서 과거에 받은 분노와 상처에 새로운 틀을 씌우는 작업이다. 그래서 용서는 ‘사건을 잊는 게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해석하느냐’의 문제다. 사건에 대한 생각과 해석이 용서의 중요한 조건이라는 말이다.

 

본문은 용서하는 삶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다. 베드로의 질문(21)으로 시작된 이 비유는 용서에 있어서, ①율법에 비교하여 예수님의 탁월성(율법은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고 했으나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끝까지 용서하라고 하심), ②유대교에 비교하여 기독교의 탁월성을 보여준다. 아울러 우리가 끝까지 용서해야 할 이유이자 조건을 말씀하고 있다. 사실 신자로 살면서 용서의 삶이 마땅하다는 것은 알지만 이를 실천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이는 모든 신자들이 속히 해결해야 할 무거운 짐이 아닐 수 없다. 본문을 통해 용서의 삶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1.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은 원수가 아니라 같은 동료임을 기억하라.

어느 기관에서 청소년들에게 ‘어디에서, 누구에게 가장 상처를 많이 받는가?’라는 설문을 조사했다. 그 1위가 가정이었고, 부모였다. 나를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곳이 가정이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부모인데, 그곳과 그분들이 내게 가장 상처를 많이 준다는 것이다. 역설 같지만 당연한 일이다. 늘 함께 있고 친하고 가깝기 때문에 사랑과 격려, 위로도 많이 받은 만큼 상처도 많이 받는 것이다.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나 원수라면 포기할 수도 있지만 잘 아는 사람이고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더욱 상처를 받을 수 있다. 내적 치유와 관련된 책들을 보면 이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확인할 수가 있다.

 

신자들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디서, 그리고 누구에게 가장 상처를 많이 받느냐? 교회이고 신자들이다. 특히 교회 지도자들에게 많은 상처를 받는다. 그리고 목회자는 자기 교회 신자들에게서 상처를 많이 받는다. 이는 불가피한 상황이다. 하지만 이를 뒤집어 생각하면 이 때문에 서로 용서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내게 상처를 준 사람들이 부모형제이고, 가까운 친척이나 이웃이다. 함께 은혜를 받으며 주님을 섬기는 신앙 공동체의 지체들이고, 내 영혼을 돌보는 목회자다. 물론 친구를 용서하는 것보다 원수를 용서하는 것이 쉽다고 한다. 하지만 원수도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인데, 가까운 지체들을 용서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어떻게 생각하고 해석하느냐가 중요하다.

 

본문에 주인으로부터 엄청난 빚(일만 달란트)을 졌는데, 그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종이 나온다. 또 한사람은 이 사람으로부터 약간의 빚을 진(일백 데나리온) 그의 동료다. 이 사람은 주인에게 자신의 많은 빚은 탕감 받았으나 동료의 간곡한 부탁을 뒤로 하고 그의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다. 본문은 이 두 사람의 관계가 서로 가까운 사이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들은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 이전에 한 주인을 섬기고 있는 같은 동료(fellow-servants)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빚을 갚지 않는다며 동료를 무자비하게도 옥에 가두고 말았다(30). 이는 그에게 ‘동료의식’이 없었기 때문이다(31). 그를 동료가 아니라 빚을 진 채무자로만 생각한 것이다. 용서의 시작은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을 ‘지체’로 기억하고, 지체는 ‘사랑과 용서의 관계’에 있음을 아는 것이다. 원수가 아니라 늘 함께 하고 있는 친구이고, 동료이고, 가족이고, 교우임을 알아야한다. 이렇게 생각이 바뀌면 해석도 바뀐다. 그러면 기꺼이 용서의 삶을 살 수가 있다.

 

2. 나 역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음을 기억하라.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도 남의 허물을 책망하는 것은 밝고, 아무리 총명이 있어도 자기를 용서하면 사리에 어두워진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 남을 책망하는 그 마음으로 자기를 책망하고, 자기를 용서하는 그 마음으로 남을 용서한다면 이는 훌륭한 사람이다. 대개 사람은 자기중심적이다. 그래서 자신에게 관대하고, 자기는 허물이 없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자신은 늘 상처를 받는 사람이지 상처를 주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부모에게 상처를 받는 만큼 부모 역시 나에게 상처를 받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상처를 잘 받는 사람일수록 상처를 잘 주는 사람이다. 이것을 알고 서로 용서하고 용서를 받으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곧 은혜롭고 행복한 삶의 시작이다. 생각해 보라. 부부간에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주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서로 용서하고 용서받으며 산다면 얼마나 행복한 부부가 되겠는가? 이 가정엔 항상 ‘모두가 내 탓이오. 모두가 당신 덕이오.’하는 말이 메아리칠 것이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상처를 주기만 하고, 또는 받기만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 부부의 삶은 건강할 수가 없다. 여기서는 서로에 대한 원망과 불평, 정죄의 소리만 커질 것이다. 말 그대로 그 가정은 무덤의 되고 말 것이다.

 

본문에서 자신의 동료를 용서하지 못한 이 사람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기 역시 채무자였음을 망각하고, 채권자로 행세한 것이 문제다. 그래서 자기 동료에게 그렇게 모질게 한 것이다. 사실 그가 그의 주인에게 진 빚에 비하면 그의 동료는 1/600,000에 지나지 않았다(한 데나리온은 한 달란트의 1/6,000임). 그런데 이 사람은 자신은 이렇게 큰 용서를 받았으면서도 자기 동료에게는 사소한 것도 용서하지 못한 것이다. 세상이 각박하고, 우리의 삶이 답답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억울하다고 하소연 하는 사람은 많은데, 자기도 남을 억울하게 했노라고 고백한 사람은 적다. 그래서 서로 용서하는 생활에 인색한 것이다.

 

용서(容恕)의 ‘恕’(용서하다, 헤아려 동정하다)는 如(같다, 같게 하다)+心(마음)이다. 상대방과 마음을 같게 하는 것이다. 이는 ‘상대방의 사정을 알고 접어 생각해 주는 것’(헤아려 동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恕’이다. 이런 생각과 태도에서 용서가 생긴다. 본문의 이 사람에게는 자신에게 빚 진 동료에 대한 헤아려 동정하는 마음이 없었다(33). 결국 이것은 자신 역시 주인에게 큰 빚을 졌던 사람인 것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는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가장 큰 거짓말쟁이요, 자기 자신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요, 믿음의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같은 빚 진자로서 상대방의 사정을 알고 접어 생각하면 누구든지 용서할 수가 있는 것이다.

 

3. 용서해야 용서받을 수 있음을 기억하라.

가장 위대한 믿음의 법칙 중 하나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는 말씀이다. 무엇이든 심는 대로 거두고, 심은 만큼 거두는 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적인 법칙이다. 누가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6:38)고 말씀하셨다. 받음은 줌으로 이어지고, 줌은 또 받음으로 이어진다. 행복한 사람은 받을 줄을 알고, 또한 받은 만큼 베풀 줄 아는 사람이다. 용서도 마찬가지다. 가장 많이 용서하는 사람은 가장 많이 용서를 받은 사람이다. 자신이 많이 받았기에 또한 많이 베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많이 받아 놓고도 베풀 줄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 본문의 비유는 바로 이런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주인에게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이 사람은 자신이 받은 대로 동료에게 베풀지 못했다. 결국은 그가 받았던 빚의 탕감도 취소되고 말았다.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34). 그리고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이 비유를 마감하셨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 용서해야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용서 뿐만 아니다. 사랑해야 사랑을 받고, 이해해야 이해를 받고, 위로해야 위로를 받고, 안아주어야 안아줌을 받는다.......결국 용서는 자신을 위한 일임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가 건너야할 다리를 파괴하는 사람이다.’(조지 허버트)고 했다. 용서란 자기를 위한 일이란 말이다. 사실 그렇다. 용서의 최대 수혜자는 자기 자신이다. 헬라어로 용서는 ‘자신을 풀어주다, 멀리 놓아주다.’라는 뜻이다. 용서하지 않으면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나 사건에 내 자신이 계속 묶여 있다. 그래서 그 사람이나 사건에 대한 분노와 미움이 독이 되어 자신을 해친다. 스스로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때문이다. 용서하는 마음을 통해서만 비로소 과거의 상처와 아픔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이나 사건으로부터, 상처로 인한 분노와 미움으로부터 내 자신이 자유롭게 된다. 과거의 상황이 현재의 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용서다. 용서하기 전에는 두 개의 무거운 짐이 존재한다. 한사람(상처를 준 사람)은 ‘죄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고, 다른 한 사람(상처를 받은 사람)은 ‘원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용서는 그 두 사람을 모두 자유롭게 한다. 주님께서 본문 서두에서 우리에게 끝까지 용서하라고 하신 뜻이 여기에 있다. 이와 같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용서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

 

사랑의 완성은 용서다.

영어로 용서는 ‘forgive’다. 이는 ‘for’(~위한)+‘give’(주다)의 합성어다. 무조건, 거저 베푸는 것이 용서다. 그리고 이것이 기독교 정신이다. 용서는 죄의 악순환을 끊고, 서로가 잘사는 상생의 길이다. 전 유엔사무총장 로버트 뮬러(R. Muller)는, ‘용서함은 사랑의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에 대한 보상으로 당신은 말할 수 없는 평화와 행복을 누릴 것이다. 오직 용기 있는 사람만이 용서할 줄 알 뿐이다. 용서는 비겁한 사람의 품성이 아니므로 비겁한 사람은 용서를 하지 못한다.’고 했다. 용서는 사랑의 실천이자, 완성이다. 주님께서 이를 친히 보여주셨다. 주님은 평생 사랑을 가르치셨고, 몸소 실천하셨다. 그리고 죽음의 순간 원수를 포함한 모두를 용서하심으로 그 사랑을 완성하셨다. 용서는 상처를 묻어버리거나 잊어버리는 것과 같은 소극적인 사랑이 아니라, 상처를 새로운 이름으로 꽃피우는 것과 같은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이고, 그 사랑의 완성이다. 그래서 용서하는 삶에는 평화와 행복이 그 선물로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아름다운 세상, 아름다운 삶을 위한 사랑과 행복의 비타민 ‘F’는 서로 ‘용서함’(Forgive)이다. 우리 모두 서로 용서함으로 평화와 행복이 피어나는 아름다운 세상, 아름다운 삶을 만들어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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