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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고맙게 여기라(Be Grate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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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173회 작성일 09-11-15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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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고맙게 여기라(Be Grateful).

눅17:11~19

2009. 11/15 11:00(추수감사주일)

감사 치료법(Thank you Therapy)

기독교 작가이며 심리학자인 던 베이커(D. Baker)가 쓴 「탱큐 테라피」 서문에 나온 내용이다.

 

나는 최근 직원들의 월급을 지불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아내는 최근 오른쪽 팔꿈치에 혹이 만져져 MRI를 찍었는데, 결과가 어떻게 나올 것인지 걱정하고 있었고, 고생하고 있는 호르몬 불균형에 대한 효과적인 치료책을 못 찾고 있었다.......물론 이런 모든 문제에 대하여 ‘너희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생각할 때마다 염려를 떨쳐 버리지 못하는 나 자신이 더욱 염려가 된다. 나는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내 자신을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증세가 어떻게 내 관절을 아프게 하고, 침을 마르게 하고, 손바닥에 땀이 나게 하며, 어떻게 호흡곤란과 소화불량, 위경련을 일으키는지, 또 어떻게 우울증을 유발시키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와 아내는 우리의 문제에 대한 너무나 완벽하고 강력한 치료책을 찾아냈다. 얼마나 흥분이 되었는지 모른다. 이 치료제의 효율성은 거의 기적적인 것이다. 나와 아내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이 치료제의 효율성을 임상적으로 경험했다. 이 치료제는 호흡곤란이 오거나 가슴에 통증이 느껴질 때 수시로 복용할 수 있다. 이것은 특별한 처방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절대로 부작용이 없고 안전한 이 치료제는 무료이다. 이를  나는 ‘탱큐 테라피’(Thank you Therapy)이라고 부른다.  감사를 통하여 인간의 많은 질병이 예방되고 치료될 수 있다. 

 

감사는 불치병도 고친다.

일본 해군장교 가와가미 기이찌는 2차 세계대전 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폐허가 된 고향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런 환경에서 사는 삶은 하루하루가 짜증이었고 불평불만의 연속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전신이 굳어져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병이 들고 말았다. 그 때 정신치료가인 후찌다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그에게 매일 밤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만 번씩 하라고 했다. 그는 하기 싫었지만 자리에 누운 채로 낫기 위해 매일 밤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만 번씩 했다. 이렇게 하다 보니 감사가 몸에 베였다. 어느 날 아들이 두개의 감을 사와서 ‘아버지 감 잡수세요.’라고 말했다. 그 때 아들에게 ‘감사합니다.’고 말하면서 손을 내밀자 신기하게도 손이 움직였고, 굳어있던 목도 움직여졌다. 감사가 그를 불치병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었던 것이다.

 

인디언의 속담에 ‘어떤 말이든 만 번 이상 되풀이 하면 그 일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말이 행동이 되고, 습관이 되고, 인격이 되고, 운명이 된다. 당신은 어떤 말을 자주 반복하고 있는가? 그 말이 당신의 삶을 지배할 것이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8)는 말씀은 단순한 종교적인 수식어가 아니다.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가장 실제적인 축복의 비밀이다. 감사는 최상의 긍정의 언어이고, 축복의 언어다. 감사의 말을 하면 불평이나 원망과 같은 부정적인 말, 생각, 생활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삶의 긍정적인 변화들이 일어나게 된다. 건강하고 행복한 삶은 감사의 삶과 비례한다.

 

감사를 실천하라.

이 시간은 신자의 ‘삶 시리즈’ 일곱 번째, 서로 ‘고맙게 여김’(Be Grateful)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열 명의 나병환자를 고쳐주신 사건이다. 그런데 고침을 받은 열 명 중에 단 한 사람, 그것도 유대인들에게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사마리아인만이 예수님 앞에 와서 엎드리어 사례를 하였다. 살면서 받은 은혜는 많지만 그것을 진심으로 고맙게 여기며 사는 사람이 흔치 않다는 말씀이다. 또한 감사는 인격의 성숙, 곧 사람됨을 드러내는 표시임을 보여준다. 본문에서 감사한 사람이 ‘사마리아인’이라는 점을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대인이라는 혈통주의, 즉 오늘날 표현으로 학벌이나 사회적 지위, 소유에 의해 그 사람됨이 결정된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태도에 따라 결정된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앞에서 말한 대로 감사하면 여러 가지 유익한 일들이 자신에게 일어난다. 그러므로 감사하며 사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감사하며 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17)고 탄식하신 것이다. 나 역시 그 아홉에 속하지는 않은지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그러면 어떻게 서로 고맙게 여기며 살 수가 있을까?

 

감사는 ‘즉시’ 실천해야 한다.

행복감이란 순간 순간의 감동을 붙들고 사는 사람만이 경험하는 것이다. 감사를 ‘0.3초의 기적’이라고 말한다. 가슴으로 감사를 느끼는 시간이 0.3초라는 것이다. 이 말은 ①짧은 시간에 사람을 감동시켜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감사라는 뜻이다. 또한 ②이 시간을 놓치면 감사를 잃게 된다는 뜻도 된다. 그 순간을 붙잡아야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감사할 수 있고, 나도 상대방도 행복하게 만들 수가 있다. 본문의 아홉 명은 그 순간을 놓친 사람들이다.

 

작자를 알 수 없는 「그 아홉의 변명」이란 책에, 예수님께 사례하지 못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재미있게 소개되고 있다.

 

첫째 사람은, ‘의사나 제사장에게 가서 먼저 정밀 검사를 받아봐야겠다. 나은 것 같은데 정말 나았는지 확인하고 사례를 해도 늦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한 의심이 많은 사람.

둘째, ‘재발 가능성이 있을지 모르니 며칠 두고 봐야겠다. 나은 것이 확실하면 그 때 사례를 하겠어.’라고 생각한 신중한 사람.

셋째, ‘내 병은 본래 나병이 아니라 특이한 피부병이었던 거야.’고 생각한 회의론자.

넷째, ‘내 병은 나을 때가 돼서 나은 거야.’라고 자연현상으로 생각한 사람.

다섯째, 전답이 궁금해서 그것을 둘러보러 간 소유에 강한 집착을 가진 사람.

여섯째, 식구들이 잘 있는지 궁금해서 집으로 달려간 사람.

일곱째, ‘예수님이 특별히 해준 것이 없다.’고 생각한 사람. 안수를 해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약을 준 것도 아니고, 단지 ‘가서 보이라’고만 했다며 애써 주님의 역할을 축소시킨 사람.

여덟째, ‘다른 랍비에게 갔어도 가능했을 거야.’라고 주님의 능력을 상대화시킨 사람.

아홉째, ‘이 모습대로 갈 수 없잖아. 가서 목욕을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예물을 가지고,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찾아가야지’라고 생각하며 사례의 기회를 미룬 사람.

 

이들이 즉시 주님께 감사(사례)하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재미있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그 아홉의 변명이 무엇이든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현재 자신에게 일어난 감동을 즉시 감사의 행동으로 연결하지 못했다는 점이 문제다. 하지만 자신에게 일어난 감동을 감사의 행동으로 옮겼던 사람은 ‘즉시’ 돌아와 주님께 사례를 드렸다. 때때로 우리도 감사를 모르는 사람으로 오해를 받기도 하는데, 이는 감사를 깨닫지 못하거나 감사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다. 감사의 기회를 놓친 것이 문제다. 그 때, 그 순간에, 그 자리에서 감사를 표현해야 하는데 그 기회를 놓친 것이 결국 감사를 모르는 사람으로 전락하게 만든 것이다. 감사뿐 아니라 무엇이든 선하고 좋은 것은 뒤로 미루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 어떤 분이 지옥에 대해 말하기를, ‘기회를 놓친 영혼들이 탄식하며 부르짖는 곳’이라고 하였다. 누군가에게 전화하고 싶고, 만나고 싶고, 식사라도 함께 하고 싶고, 선물을 하고 싶고, 격려하고 싶은 생각이 들면 즉시 실천하라. 미루다보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이런 글이 있다.

 

지금 말하십시오.

친절한 말 한마디가 생각나면 지금 그 말을 옆에 있는 이에게 하십시오. 당신이 머뭇거리고 있는 동안 그는 다른 쪽으로 가버릴 것이고, 다시는 똑같은 친절의 기회가 오지 않을지도 모르니까요.

 

지금 사랑하십시오.

행복한 가정을 만들고 싶으면 지금 가족을 사랑하십시오. 부모님은 아쉬움에 떠나고, 아이들은 너무 빨리 커버려 사랑을 전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지금 전하십시오.

그리운 이가 있으면 지금 편지를 쓰십시오. 지금 편지를 보내지 않으면 당신에 대한 그의 기억이 날마다 작아져 다음 편지가 도착할 쯤에는 당신의 이름마저 생각나지 않아 편지를 반송할지도 모르니까요.

 

지금 시작하십시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지금 시작하십시오. 지금 그 일을 시작하지 않으면 그 일은 당신으로부터 날마다 멀어져 아무리 애써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날이 다가오고 있으니까요.

 

지금 뿌리십시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으면 지금 좋은 생각의 씨앗을 마음 밭에 뿌리십시오. 지금 뿌리지 않으면 내 마음 밭에는 나쁜 생각의 잡초가 자라 나중에는 애써 좋은 생각의 씨앗을 뿌려도 싹조차 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요.

 

삶의 ‘모드’(mode)를 감사에 맞춰라.

모드란 ‘양식’ 또는 ‘방식’이란 뜻이다. 이는 삶의 태도와 관련된 말이다. 삶의 모드를 어디에 맞추고 사느냐가 중요하다. 불평에 삶의 모드를 맞추고 사는 사람이 있다. ‘나는 불평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불평이나 불만에서 찾는다. 매사가 삐딱하다. 항상 부정적이고 어두운 면만 본다. 그러니 매사가 불평이고 원망이다. 이런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자아상을 갖게 되고, 열등감, 낮은 자존감으로 자주 상처를 받고, 또한 상처를 준다. 사실 이런 불평 모드의 가장 큰 피해자는 결국 자기 자신이다.

 

그러나 감사 모드는 삶을 긍정적으로 보는 태도다. ‘나는 감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감사에서 찾고, 감사에 초점을 맞추고 산다. 감사는 힘들고 어려워도 더 좋은 것을 기대하고 바라보는 적극적인 태도다. 남을 배려하고, 이해하고, 존중하는 태도다. 감사는 삶의 전체를 아름답게 비추는 햇빛과 같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감사 모드에 초점을 맞추고 산다. 마르틴 루터(M. Luther)는 ‘마귀의 세계에는 감사가 없다’고 했다. 감사가 없는 삶은 마귀에게 붙잡힌 삶이다. 크리소스톰(J. Chrysostom)은 ‘죄 중의 죄는 감사하지 못한 죄’라고 했다.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선물이고 은혜인데, 감사하지 못한 것은 그 은혜를 저버린 것이니 심각한 죄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제물로 제사를 드리던 구약시대에도 감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최상의 제사였다.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시69:30~31). 또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시50:23). 그리고 오늘 본문을 보면, 이 감사는 더 큰 축복을 부르는 도구임을 알 수 있다(19).

 

오늘은 우리 한국교회가 전통적으로 지키고 있는 추수감사주일이다. 추수감사절은 구약의 장막절(수장절)에서 유래한 것(신16:13~15)이다. 곡식을 거두어 곡간에 저장(수장절)한 다음, 조상들의 광야장막생활(장막절)을 기념하며 지킨 절기다. 이 절기에서 두 가지가 강조되고 있다. 힘있는 자나 없는 자, 가난한 자나 부한 자, 내국인이나 이방인 ①모두가 함께 기뻐하고(15), ②주실 복을 인하여 온전히 즐거워하는 것이다(16).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이 나눔이고, 감사이다. 풍성한 나눔이 있을 때 모두가 함께 기뻐할 수 있다. 또한 감사는 현재 누리고 있는 것만 아니라 장차 주실 것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다. 이런 기대와 믿음 안에서만이 온전한 감사, 온전한 즐거움이 있다. 이것이 추수감사절의 의미이고, 진정으로 지키는 방법이다. 감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을 행복하게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비결이 있다. 이런 아름다운 세상, 행복한 삶을 위한 사랑과 행복의 비타민 ‘G’는 서로 ‘고맙게 여김’(Be Grateful)이다. 우리 모두 서로를 고맙게 여김으로 온전한 기쁨, 온전한 즐거움이 회복된 아름다운 세상, 아름다운 삶을 만들어 가자.

 

감사의 마음

 -정의재

감사는 계절도 시간도 없습니다.

감사는 어느 곳에서든 캐낼 수 있는

마음의 따듯한 생각의 선물입니다.

 

어느 때든 어느 곳에서든

감사를 캐어내면 감사가 되고

불평을 캐어내면 불평이 나옵니다.

감사는 주어진 조건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해석입니다.

 

부족하여도 감사를

잉태하는 자는 감사를 낳고

풍족하여도 불평을

잉태한 자는 불평을 낳습니다.

 

감사는 소유의 크기가 아니라

생각의 크기이며 믿음의 크기입니다.

소유에 비례하는 감사는

소유에 비례한 불평을 낳고

믿음의 감사는 조건에 메이지 않아

세상을 행복하게 하고

자신을 풍요롭게 합니다.

 

감사는 은혜를 아는 자의

마음의 열매이며

섭리를 수용하는 자의

사유(思惟)의 방식입니다.

감사한 만큼

삶은 여유가 있고 따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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