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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낮추라(Hum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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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909회 작성일 09-11-22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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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낮추라(Humble).

눅18:9~14

2009. 11/22. 11:00

훌륭함의 자질은 겸손이다.

무엇인가 성취했다고 느낄 때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더 겸손하자!’고 결단하는 일이다. 사람의 성취는 허무한 것이다. 인생자체가 허무하다. 하나님이 한번 ‘후~’하고 부시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패의 최고봉은 교만한 것이고, 성공의 최고봉은 끝까지 겸손한 것이다. 어느 날,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교육자 존 케인즈(J. Keynes)가 교육회의에 참석하려고 기차를 타고 목적지에 내렸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위대한 교육자의 방문을 환영하였다. 그때 케인즈는 누군가 유명한 사람이 이 기차에 탔나보다 생각하고 자신도 다른 승객들 틈에서 열렬히 박수를 쳤다. 그때 환영객 대표가 뛰어와 물었다.

 

‘선생님, 지금 누구에게 박수를 치세요?’

‘글쎄요. 지금 누군가 훌륭한 사람이 이곳을 방문한 것 같아서 나도 박수를 치는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훌륭한 사람의 최대 자질은 ‘겸손’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더욱 높여 주신 것이다. 행복의 가장 큰 걸림돌은 높은 장애가 아니라 높아진 자신이다. 그래서 성경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함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라고 경고한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주변을 높이는 것이 훌륭함이고 잘됨의 비결이다. 어떤 사람이 장수촌에서 장수의 비결을 연구했는데 그곳 사람들은 하나같이 겸손하고 예의바른 사람이었다. 그들은 항상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단전에 힘이 모이니까 나이가 들어도 기력이 넘쳤다. 사람이 뻣뻣한 상태로 오래 서 있으면 기가 빠진다.), 물건을 줄 때 두 손으로 공손하게 주고(몸의 균형을 유지), 친구 간에도 존댓말을 사용하였다(서로를 존중하는 건강한 관계를 유지). 기력이 넘치고, 균형이 유지되고, 관계가 건강하니 장수하게 된 것이다. 이 모두가 겸손이 준 축복인 것이다. 갈대가 바람에 꺾이지 않는 이유는 속을 모두 비워낸 유연성 때문이다. 겸손은 곧 정신적인 유연성이다. 그래서 몸도 마음도 관계도 건강하고, 모두가 잘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부분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은 고집이 세고, 남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자신이 최고로 잘 난 줄 안다. 정신적으로 경직되어 있고, 이기적이다. 이것이 교만의 특징이다.

 

겸손의 중요성

오늘은 신자의 ‘삶 시리즈’ 여덟 번째, 서로 ‘낮춤’(Humble)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기도생활이다. 본문은 기도에 대한 교훈인데, 교만이 신앙(기도)생활에 얼마나 심각하고 치명적이며, 또한 겸손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준다(14). 특히 하나님 앞에서는 ‘어떻게 살았느냐’보다 ‘어떤 태도로 사느냐’가 중요함을 강조한다. 바리새인과 세리 중 객관적으로 누구의 삶이 더 훌륭한가? 물론 바리새인이다(11,12). 그런데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은 세리였다(14).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바리새인은 그의 의로운 생활이 그를 교만하게 만들었고, 교만은 ①그의 기도를 왜곡시켰다. 그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자신의 의로움에 대한 자랑이었다(11절 “따로 기도하여”에서 ‘따로’를 영어성경은 ‘about himself’로 번역). 하나님은 자기 자랑의 대상이 아니라 호소의 대상이다. 그리고 ②이웃에 대한 그의 태도를 왜곡시켰다. 그는 이웃을 비교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우월함을 감사하였다(“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인간은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다. 반면 세리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13) 기도했다. 기도할 때 하늘을 보는 것이 정상적인 기도의 태도였는데, 세리는 추한 자신의 모습을 통회하는 의미에서 머리를 들지 못했다. 이는 그의 겸손한 태도를 뜻한다. 그리고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라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세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의롭게 하셨다. 그러면서 주님은 겸손이 신앙생활, 즉 기도생활의 최대 관건이라고 결론을 지으셨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의 관건이 되는 겸손의 삶이란 무엇인가? 본문을 통해 생각해 보자.

 

1. 겸손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이다(11,12).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 흐르다가 막히면 멈춘다. 사실은 멈춤이 아니라 막힘을 넘기 위해 조용히 채워지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 막힘을 넘으면 무서운 속도로 다시 낮은 곳으로 흐른다. 때로는 흐르다가 걸림돌이 있으면 돌아가고, 그러면서 낮은 곳으로 계속 흐르는 것이 물이다. 그래서 물이 겸손의 상징이 된 것이다. 바울은 교회에서 주의 일을 하는 신자들에게 이렇게 아름다운 권면을 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2:3). 이는 교회일치를 위한 방법이고, 주의 일을 하는 일꾼의 자세에 대한 말씀이다. 소극적으로 주의 일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않는 것이며, 적극적으로는 겸손하게 하는 것이다. 이 겸손이란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는 것’이 실천되는 삶이다.

 

대부분 성공한 후 실패한 사람들을 보면 형통할 때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하기 때문이다. 교만한 사람의 공통점은 남들보다 자신이 ‘조금 더 낫다’는 생각이다. 조금 더 낫다는 것이 재물일수도 있고, 지식일 수도 있고, 사회적 지위일수도 있다. 사실은 이런 것들이 아무것도 아는데, 아무것도 아닌 것들로 인해 마음이 높아져서 자신의 삶이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교만은 천사를 떨어뜨려 마귀가 되게 하고, 겸손은 사람으로 하여금 천사가 되게 한다는 했다. 본문의 바리새인이 좋은 예다(9). 그가 그토록 자랑삼아 말하고 있는 그의 삶은 신자라면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지, 자랑할 것까지는 못된다(그것도 하나님 앞에서!). 그런데 그 당연한 것을 가지고, 당시 사회에서 죄인의 대명사로 여겼던 세리와 창기의 삶에 비교하고 있으니 한심할 뿐이다. 그것도 가장 진지해야 할 기도시간에 말이다. 당시 유대교가 얼마나 한심한 종교였는가를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앞서 ‘사람은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라’고 하였다. 최소한 신자는 이런 시각으로 사람을 보아야 한다. 굳이 비교한다면 그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어야 한다. 전능하시고, 위대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 나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비교의 마음은 사라지고 사랑의 마음을 품게 되고, 누구든 자신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으로서 사람이 되신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습이다(빌2:6,7). 그리고 우리 역시 이런 삶을 닮기를 원하셨고(빌2:5), 이런 사람에게 은혜를 주신다.

 

2. 겸손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다(13).

영국 에든버러 대학 제임스 심프슨(J. Simpson) 박사는 마취제(Chloroform)를 발견하여 의학계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그의 강의 시간에 어떤 학생이 ‘교수님의 생애에 가장 뜻 깊은 소중한 발견 한 가지를 들라면 무엇을 들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한참 동안 머리를 숙이고 있다가 이런 말을 했다. ‘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발견은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님이 나의 구주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이 대답만으로도 그가 어떤 사람이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가치사전」에서 겸손을 여러 비유로 재미있게 정의해 놓은 것을 보았다. 겸손이란 ①나도 알고 있지만 친구가 설명하는 것을 잘 듣고 있는 것, 혹시 내가 모르는 것을 듣게 될지 모르니까(들어줌). ②내가 아는 문제를 짝꿍이 풀고 있을 때 먼저 답을 말하지 않는 것, 내 짝꿍은 지금 문제를 풀며 스스로 공부하고 있으니까(배려). ③자신에게는 ‘태어난 것만으로도 고마워’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당신을 만난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아는 것(자신의 존재에 대한 감사와 타인의 중요성을 아는 것). ④자기가 무엇을 더 노력해야 하는 지 아는 것, 이런 자기 모습을 남에게 감추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부족을 알고,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겸손이란다. 그래서 겸손을 참으로 자신 있는 사람만이 갖출 수 있는 인격이라고 하는 것이다.

 

겸손이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데서 시작된다. 바리새인이 자기 의에 도취되어 자기를 잃어버린 사람이라면 세리는 자기의 부족을 알고 이를 해결하고자 몸부림쳤던 사람이다(13).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위험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를 모르는 사람이다. 반면에 가장 행복하고 지혜로운 사람,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아는 사람이다. 자기 부족을 알고, 자기 무능을 알고, 자기 무지를 알고, 자기의 약함을 알고, 자신의 악함을 아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다. 이렇게 자기를 바로 아는 것이 곧 ‘힘’이다. 독일어로 겸손을 ‘데무트’(Demut)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힘’이란 뜻도 있다. 하나님의 능력이 겸손한 자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의 이런 모습을 깨우쳐 겸손한 사람이 되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 마르틴 루터는 ‘나는 모르기 때문에 믿는다.’고 고백했다. 자기 지식 앞에 겸손하고, 자기 경험 앞에 겸손하고, 자기 이성 앞에 겸손하였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그가 주님 앞에서 크게 쓰임 받은 비결이다.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더 많으면서도 마치 많이 아는 척, 잘난 척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가장 큰 적이다.

 

3.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신다(14).

무릎을 꿇고 비석을 다듬는 석공이 있었다. 석공은 땀 흘리며 비석을 깎고 다듬었다. 그리고 나중에 그 비석에 명문(名文)을 각인했다. 그 과정을 한 정치인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작업을 마무리 짓던 석공에게 다가가 ‘나도 돌같이 단단한 사람들의 마음을 당신처럼 유연하게 다듬는 기술이 있었으면 좋겠소. 그리고 돌에 명문이 새겨지듯 사람들의 마음과 역사에 내 자신이 새겨졌으면 좋겠소.’라고 말했다. 그러자 석공이 대답했다. ‘선생님도 저처럼 무릎 꿇고 일한다면 가능한 일입니다.’

 

유명한 강해설교가 마이어(Frederick B. Meyer)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 여러 층으로 된 선반에 있는 줄로 알고 높아질수록 그 여러 층의 것을 가질 수 있는 줄로 알았다. 그러나 후에 깨닫기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은 아래로 내려가면서 여러 층 되는 선반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이 선물들을 받으려면 높아지기를 원할 것이 아니라 더욱 더 굽히고 내려가며 또 내려가기를 힘써야 된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받고, 그 은혜를 계속 유지하는 비결에 대한 명쾌한 답이다. 본문 14절에서 주님은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다. 베드로도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5:5)고 하였고, 야고보 역시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4:6)고 하였다. 실력이나 영적인 능력, 믿음의 성숙은 높여야 하지만 자세는 오히려 낮춰야 한다. 낮추는 것이 겸손이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 역시 물처럼 항상 낮은 곳으로 임한다(약1:17). 그러므로 겸손한 사람만이 위로부터 임하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받아 누릴 수가 있다. 또한 그것을 계속 유지할 수가 있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출 때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고, 풍성하고 건강한 관계가 이루어진다. 살면서 깨달은 것이지만 복 중에 가장 큰 복은 사람이다. 좋은 사람 만나는 것이 복이고, 좋은 사람과 교제하는 것이 복이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복이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에게 좋은 사람을 붙여주시고, 그들을 통하여 복을 받고, 누리게 하신다.

 

하나님의 도리깨질

‘하나님은 부서진 것들을 사용 하신다.’는 히브리 격언이 있다. 단단한 곡식이 부서져야 빵이 된다. 포도주나 향수도 잘게 부서짐을 통하여 만들어진다. 단단하고 질긴 음식도 우리의 입안에서 고르고 잘게 부서져야 소화가 된다. 사람도 원숙한 인격과 신앙을 갖추려면 반드시 부서지는 과정을 밟아야 한다. 그러므로 부서짐의 크기(size)가 성숙의 크기다. 어려서 부모님이 도리깨질하는 장면을 자주 보았다. 콩이나 깨를 마당에 펼쳐놓고 사정없이 도리개로 후려친다. ‘왜 때려!’하고 외치는 콩들의 신음소리에도, ‘이제 그만 좀 때려!’하는 콩들의 저항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려친다. 그러나 이것은 아프라고, 혹은 미워서 때린 것이 아니다. 껍데기를 벗겨내기 위함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우리에게 고난과 역경이라는 도리깨질을 하실 때가 있다. 이는 우리가 미워서가 아니다. 우리에게 있는 교만의 껍질을 벗겨내고, 단단하고 질긴 교만 덩어리들을 부드럽게 잘게 깨뜨리기 위함이다.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어거스틴(St. Augustine)은 겸손을 우리 신자가 갖춰야 할 가장 으뜸이 되는 덕으로 꼽았다. 왜냐하면 겸손은 모든 경건한 성품들이 들어 설수 있는 길을 닦아 주고, 성령의 열매(갈5:22,23)에 속한 여러 성품들이 뿌리내리고 자랄 수 있는 토양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것을 누리는 인생, 그리고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는 인생이 되기 위한 사랑과 행복의 비타민 ‘H’는 서로 ‘낮춤’(Humbl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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