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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기쁘게 하라(Joy 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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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903회 작성일 09-12-13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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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기쁘게 하라(Joy in).

사62:1~5

2009. 12/13 11:00

사랑의 흔적(love mark)

요즈음 기업들 사이에서 경제와 비즈니스를 하나의 키워드로 해석하려는 시도들이 많다. 예를 들면 지식경제(Knowledge Economy), 경험경제(Experience E.), 관심경제(Attention E.), 유혹경제(Attraction E.)라는 표현들이 그 예다. 이들 중에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유혹경제다. 유혹은 사람을 억지로 강요하지 않고, 매혹시켜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소비자를 유혹한다.’는 아이디어는 주로 테마파크나 관광, 그리고 장터로 돌아다니는 떠돌이 약장사들이 사용했던 마케팅 방법인데, 지금은 기업의 마케팅에서도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그 대표가 커피 전문점인 스타벅스나 애플 같은 기업으로 소비자에게 ‘관심’을 요구하기 보다는 ‘유혹’하는 것으로 성공했다.

 

이 유혹경제의 관심은 이성을 넘어선 충성심을 가진 평생고객을 만들어내는데 있다. 그리고 충성심을 가진 고객을 만들어내기 위해선 ‘놀라움을 통해 기쁨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 때 고객의 가슴속에 그 기업에 대한 지울 수 없는 ‘사랑의 흔적’(love mark)을 간직하게 된다. 놀라움을 통해 고객의 기쁨을 이끌어내는 것은 제품의 질을 높이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다른 방법들도 많다. 술에 취한 한 남자가 어느 가전제품 대리점 앞에 앉아서 울고 있었다. 그 점포 매니저가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오늘이 자기 아들 생일인데, 술을 먹고 지갑을 잃어버려 아들에게 게임기를 사주기로 한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된 자신이 한심해서 울고 있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 매니저가 다음에 갚는 조건으로 자기가 게임기를 사주고 집에까지 데려다 주었다. 생면부지인 자신에게 친절을 베푼 이 매니저의 행동에 감동한 이 사람은 그 점포와 그 점포에서 팔고 있는 회사 제품의 충성고객이 되었다. 이것이 곧 유혹경제다. 이처럼 열린 가슴과 세심한 배려에 의한 따뜻한 감동이 진정 고객을 놀라게 하고 기쁘게 한다. 그리고 이것은 고객 가슴 속에서 지울 수 없는 사랑의 흔적으로 남게 된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큰 감동을 받거나 기쁨을 받을 때 마음속에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의 흔적이 남게 된다. 이것은 성공적인 인간관계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신자들은 엄청난 주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이기에 주님에 대한 지울 수 없는 커다란 사랑의 흔적(갈6:17)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서로에게 큰 기쁨을 주어 사랑의 흔적을 남길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오늘 신자의 삶 시리즈 열 번째, ‘서로 기쁘게 함’(Joy in)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는 주님의 기쁨이다.

본문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주신 장차 회복될 유대 나라와 그 백성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다. 본문은 회복될 땅과 백성에 대하여 원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쁄라’와 ‘헵시바’가 바로 그것이다. 쁄라는 ‘결혼한 여자’라는 뜻이고, 헵시바는 ‘나의 기쁨은 그녀 안에 있다.’는 뜻이다. 이는 이사야가 활동할 때 유다 왕이었던 히스기야의 아내 이름이었다. 실존 인물의 이름을 들어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결혼하여 남편이 있는 여인처럼 유대 나라와 백성이 더 이상 버림받은 곳, 존재가 되지 않을 것, 그리고 결혼한 부부에게 있어서 아내가 남편의 기쁨이고 마음이 그녀에게 있는 것처럼 유대 나라와 백성에게 하나님의 마음이 있고, 그들이 하나님의 기쁨이 될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오늘날 교회와 신자가 주님께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말씀이기도 하다. 교회와 신자는 주님의 ‘쁄라’(신부)요, 주님의 ‘헵시바’(기쁨)이다. 주님은 이 교회를 피흘려 사셨고, 또한 그렇게 우리를 구속하셨다. 그러니 교회에 대한, 우리 신자에 대한 주님의 기쁨이 클 수밖에 없다.

 

우리는 신자로서 주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특히 주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자신이 ‘주님의 기쁨’(헵시바)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두고 보기도 아까울 만큼 소중한 주님의 자녀다. 선지자 스바냐는 하나님이 ‘나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습3:17)고 했다. 우리가 주님께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의 대상이라는 뜻이다. 물론 자식들 중에는 잘난 자식도 있고, 못난 자식도 있다. 자랑스러운 자식도 있고, 그렇지 못한 자식도 있다. 하지만 모든 자식은 부모의 기쁨이다. 신자도 마찬가지다. 모든 신자는 주님의 기쁨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많은 신자들이 이 사실을 잊고 있다. 자신이 주님에게 어떤 존재인가를 잊고 산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난 것도, 그래서 이방 나라에서 포로생활을 한 것도 모두 이 때문이다. 자신들이 하나님께 어떤 존재인가를 잊은 까닭이다. 그래서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주님의 신부이고, 기쁨이다. 우리는 주님의 쁄라요, 헵시바이다. 우리 모두 서로에게 이렇게 말해 보자. ‘당신은 주님의 기쁨입니다. 당신은 주님의 헵시바입니다.’

 

주님의 기쁨이 된 삶을 위하여

우린 예배 마지막 순서로 항상 ‘나 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라는 찬양을 드리고 있다. 소중한 결단이다. 하지만 주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겠다고 결단하기에 앞서 내가 주님의 기쁨인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주님의 기쁨인 것을 발견한 사람이라야 주님께 기쁨이 되는 삶을 살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주님의 기쁨인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주님께 기쁨이 되는 삶이 될까?

 

1. 하나님 중심적인 삶이다.

어거스틴(St. Augustinus)은 인간의 삶을 두 종류로 말하였다. 하나는 ‘아모르 수이’(Amor Sui), 즉 자기 중심적인 삶이고, 다른 하나는 ‘아모르 데이’(Amor Dei), 즉 하나님 중심적인 삶이다. 신자의 기쁨은 주님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인한 기쁨, 곧 하나님 중심적인 기쁨이어야 한다. 자기 중심적인 기쁨은 쾌락에 지나지 않다. 이 쾌락은 인간을 죄악의 늪으로 인도할 뿐이다. 주님의 기쁨인 신자는 주님 중심적인 삶에 기초한 기쁨이어야 한다. 이것이 주님께 기쁨이 되는 삶이다.

 

믿음의 열전이라 할 수 있는 히브리서 11장에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했던 구약의 인물 에녹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에 에녹에 대한 아주 독특힌 표현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5)라는 표현이다. 이는 “하나님과 동행했다”(창5:24)는 구약 본문의 말씀에 대한 해석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었기에 하나님과 동행이 가능했던 것이고, 그 결과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로 데려감을 당한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같은 의미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 중심적인 삶으로 연결이 된다. 삶의 초점이 하나님께 맞춰진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다. 여기에서 예배의 삶, 말씀의 삶, 기도의 삶, 찬양의 삶, 성김의 삶 등이 시작되고, 이 모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기 위해선 하나님 중심적인 삶이 되어야 한다.

 

2. 지체들과 연합하는 삶이다. 그래서 서로 기쁘게 하는 삶이다.

시편 133편은 다윗의 시이다(다같이 읽음). 이 시는 축제의 중심인 예루살렘 성전예배에 참석하여 부르는 노래이다. 시편에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란 표제가 붙은 시들(120~134)이 여기에 속한다. 그러므로 133편 역시 절기를 연상하며 읽어야 한다. 지금 다윗은 절기를 지키기 위해 각지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든 백성들을 보며 감격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1)

 

지파를 따라, 혹은 생업을 따라 각지로 흩어졌던 사람들이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어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아 이렇게 외친 것이다. 여기서 다윗은 이렇게 연합하여 동거하는 모습을 “선하다.” “아름답다.”고 표현하고 있다. 특히 “아름답다”를 영어 성경은 ‘즐겁다’(pleasant)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렇다. 형제의 연합은 그 안에 많은 ‘즐거움’(기쁨)을 가지고 있다. 우선 형제의 연합은 ‘하나님께 즐거운 일’이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요, 크게 기뻐하시는 것이다. 평강의 하나님이시기에 평화로운 신자들의 삶에서 큰 즐거움을 취하신다. 다음은 ‘우리 자신에게 즐거운 일’이다. 불편한 관계의 가장 큰 피해자는 자기 자신이다. 반면에 더불어 화평하면 큰 즐거움이 찾아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에게도 즐거운 일’이다.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모든 사람에게도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본시는 형제의 연합을 보는 이의 즐거움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바울은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롬14:18)고 말하였다.

 

여기서 다윗은 형제의 연합을 두 가지로 비유하고 있다. 하나는 대제사장 아론의 위임식에 비유를 하고 있다. 이는 형제의 연합이 대제사장의 위임식에 비교할 만큼 거룩하다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헐몬산의 이슬에 비유하고 있다. 이슬은 사막 지역에서 생명의 젖줄이다. 사막에도 생명체들이 살 수 있는 것은 이슬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슬을 하나님의 은혜(총)에 비유하고 있다. 사막과 같은 인생길에서 생존하기 위해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함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와 같이 형제의 연합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형제의 연합은 대제사장의 위임식처럼 거룩하고, 마른 땅에 이슬처럼 소중하다. 이렇게 거룩하고 중요한 형제의 연합, 함께 하나가 되어 서로 기뻐하는 것은 그 자체가 축복이고, 나아가서 하나님께 가장 큰 기쁨이다. 그러므로 이 선하고 아름다운 일을 잘 지키고 가꾸어 나가자. 더 선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가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고 또한 영생의 복을 주실 것이다.

 

기쁨을 주는 사람

1982년 8월 9일은 일곱 살 난 소년 숀 버틀러(S. Butler)가 죽는 날이었다. 뇌암으로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혼자서 숨쉬기조차 불가능한 아들을 살려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던 그의 부모는 마침내 아들의 생명을 억지로 연장하고 있던 인공호흡기를 제거하기로 결심한 날이었다. 희망이 없는데 억지로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은 결과적으로 죽음보다 더한 고통만 가중시키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 때 그 아빠에게 한 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아들이 평소에 그렇게도 만나기를 원했던 야구선수 데이브 스테이플톤(D. Stapleton)을 대면시켜 주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곧 바로 보스턴 야구팀 레드 삭스(Red Sox)의 홈런타자 스테이플톤을 찾아가서 자기 아들을 한번만 만나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스테이플톤은 기꺼이 승낙을 했고,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바로 그 순간, 그 홈런타자가 병실에 나타나 ‘숀, 내가 스테이플톤이야!’라고 하면서 아이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순간 아이는 눈을 번쩍 떴고 형언할 수 없는 기쁨에 사로잡혔다. 얼마 후 그 선수는 ‘숀, 내일 시합에서 홈런을 칠테니 기다려!’라는 말과 함께 자신의 싸인이 든 야구공 하나를 남겨놓고 사라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소년은 그날 죽지 않았다. 다음날 스테이플톤은 약속대로 홈런을 쳤고, 아이는 그 홈런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에게 힘을 주었다. 그 힘으로 소년은 암과 피나는 싸움을 벌일 수 있었다. 5개월 후, 의사들은 소년의 뇌 속에서 단 하나의 암세포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의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작은 사랑의 기쁨이 낳은 놀라운 이야기다.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인생은 자신의 삶을 통하여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고, 희망을 주고, 행복을 주는 인생이다.

 

주변에는 마치 햇살과도 같이 어두운 마음에 고운 빛을 뿌리고, 아픔을 승화시켜 고운 향기를 뿜어내어 기쁨을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아픔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켜 무수한 독소를 뿜어내고, 다른 사람의 기분을 암울하게 하여 잡치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사실 내가 힘들다는 이유가, 내가 아프다는 이유가, 내가 바쁘다는 이유가 꽃을 피우지 못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주님을 닮은 꽃, 우리는 그런 꽃과 같은 사람들이다. 피어있는 곳이 화려한 곳이든, 누추한 곳이든 그리스도의 고운 향기를 뿜어내는 사람들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꽃을 가슴에 담듯이 우리를 오래 오래 가슴속에 담아둘 것이다.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을 가슴에 영원히 간직하게 될 것이다. 주님을 닮은 꽃과 같은 우리를 통해 세상은 기쁨으로 진동할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눅2:10)으로 오셨다. 그의 자녀된 우리 역시 기쁨을 주며 살아가야 함은 당연한 이치다.  하나님께 인생의 초점을 맞추고, 모든 차이를 뛰어넘어 서로 하나됨을 이루는, 그래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사람들에게도 기쁨이 되는 사람이 되자. 살아가면서 주변 사람들의 마음에 기쁨의 씨앗을 뿌리고, 사람들의 얼굴에 기쁨을 꽃을 피우게 하는 사람들이 되자.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기쁨과 감동을 주는 사랑과 행복 비타민 ‘J’는 ‘서로 기쁘게 함’(Joy i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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