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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라(Need each 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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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044회 작성일 10-01-24 13:51

본문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라(Need each other).

요5:1~9

2010. 1/24 08:00, 11:00

할아버지의 사랑방식

금슬(琴瑟)이 좋은 부부가 있었다. 몹시 가난했던 젊은 시절, 그들의 식사는 늘 한 조각의 빵을 나누어 먹는 것이었다. 모든 어려움을 사랑과 이해로 극복한 뒤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자 그들은 결혼 50주년에 금혼식(golden wedding)을 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축하 속에서 부부는 무척 행복했다. 손님들이 돌아간 뒤, 부부는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식탁에 마주 앉았다. 가난한 시절을 생각하며 간단하게 구운 빵 한 조각에 잼을 발라 나누어 먹었다. 할아버지는 지난 50년 동안 늘 그래왔듯이 할머니에게 빵의 제일 끝부분을 잘라 내밀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할머니가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내는 것이었다.

 

‘역시 당신은 오늘 같은 날에도 내게 두꺼운 빵 껍질을 주는 군요. 50년을 함께 살아 오는 동안 난 날마다 당신이 내미는 빵 부스러기를 먹어 왔어요. 그 동안 당신에게 늘 그것이 불만이었지만 섭섭한 마음을 애써 참아 왔는데........하지만 오늘같이 특별 한 날에도 당신이 이럴 줄은 몰랐어요.’

 

할머니는 분에 못 이겨 마침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몹시 놀란 할아버지는 한동안 머뭇거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할머니가 울음을 그친 뒤에야 할아버지는 더듬더듬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이 진작 이야기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미안하오. 하지만 여보, 바삭바삭한 빵 끄트머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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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서로를 잘 알지 못한데서 비롯된 해프닝이다. 어쩌면 이것이 지금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 여러분은 지금 아내나 남편, 혹은 부모나 자녀들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는가? 상대방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고,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 때문에 고민하며 밤잠을 설치고 있는지, 간절한 기도제목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함께 살고 있지만 진지하게 상대방의 필요를 알아보기보다 그저 자기 좋은 것은 좋고, 싫은 것은 싫은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하지만 자기중심적인 생각, 자기중심적인 말, 자기중심적인 행동은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독이다. 자기가 좋아하니까 상대방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고, 폭력이다. 사람은 관계적인 존재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길들여져 가는 것이다. 그것은 상대방을 자기 편의에 맞춰 길들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길들여져 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서로의 필요를 알고, 그것을 채워주는 것이다. 그래야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로 든든히 서게 된다.

 

서로의 필요를 알라.

오늘은 신자의 ‘삶 시리즈’ 열네 번째, 서로 필요한 존재가 됨’(Need each other)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본문은 자비(은혜)의 집이라 불리는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일어난 일이다. 각지에서 온 각색 병자들이 여기에 모여 있다(3). 그들은 가끔 천사가 내려와 연못물을 동하게 할 때 가장 먼저 연못에 들어간 사람은 어떤 병이든 낫는다는 막연한 소문에 의지하여 병을 치료받고자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다(4). 게다가 ‘먼저 들어간 자만이 낫을 수 있다’는 말은 서로 도우며 살아도 어려운 처지에 있는 병자들끼리 심각한 경쟁의식만 부추겨 놓았다. 그래서 다들 자신의 필요에만 눈이 멀어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이곳의 특징을 사회에 비유한다면, 환자들로 넘쳐나는 병든 사회, 헛된 소문에 의해 움직이는 허상이 지배하는 사회, 자신의 필요에만 눈이 먼 이기적인 사회, 1등만 치료받을 수 있다며 경쟁을 부추기는 경쟁사회다. 그리고 이름은 자비의 집인데 물이 동할 때마다 서로 먼저 들어가겠다는 욕심 때문에 끔찍한 지옥과 같은 상황이 연출되는 그래서 그 이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부조리한 사회다. 이곳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축소판이고, 또한 우리들의 모습이라 생각한다. 본문은 이런 곳에서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있는 한 사람과 그를 찾아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여기서 주님이 이 환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6)고 물으신 질문과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고 하시며 보여주신 행동은 인간의 실존과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태도에 대한 도전을 준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는 질문은 단순히 환자의 필요와 열망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 환자가 처한 상황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다. 7절에서 이 사람은 주변에 사람은 많지만 사람이 없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경쟁사회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고독한 인간의 부르짖음이다. 그가 직면한 끔찍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주님은 신자와 교회는 이런 현실을 볼 수 있는 눈과 이런 현실에서 부르짖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런 사람들을 찾아서 그들의 필요를 알고 채워주어야 한다는 것 보여주신 것이다. 이것이 신자와 교회가 저들에게 필요한 존재로 다가가는 비결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주님처럼 다른 사람의 필요를 알고, 그것을 채워줄 수 있을까?

 

1. 관심

어떤 사람은 관심을 ‘세상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발견하게 하는 힘이라.’고 했다. 그것이 무엇이든 관심을 갖는 순간, 그것은 나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이름 모른 풀이지만 그것에 관심을 갖는 순간, 그 풀은 내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그것의 아픔, 그것의 고통, 그것의 기쁨은 나의 아픔과 고통과 기쁨이 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관심을 가질 때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내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그 사람이 보인다. 그의 아픔이 보이고, 그의 고통이 보이고, 그의 기쁨이 보인다. 그의 필요가 보인다.

 

관심은 관계의 시작이다. 건강하고 행복한 관계는 서로의 관심에서 시작된다. 함께 살고 있어도 관심이 없으면 그것은 건강하고 행복한 관계가 아니다. 본문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모두가 환자라는 같은 ‘형편’, 천사가 내려와 연못물을 움직여주길 바라는 같은 ‘기대’, 병이 치료되기를 바라는 같은 ‘열망’을 가지고 함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함께 있었을 뿐, 서로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서로에 대한 관심보다는 서로의 존재를 원망하고 시기하고 미워하고 있었고, 더불어 잘되기를 원하기보다는 그저 자기만 잘되기를 원했다. 평생을 부부로, 가족으로, 혹은 교우로 살아도 서로에게 관심이 없으면 그것은 동거인이지 부부라 가족이라 교우라 할 수가 없다. 술주정뱅이 남편과 살고 있는 집사님 집에 목사님이 심방을 갔다. 그 집사님의 형편을 듣고 목사님이 그녀를 보며 ‘어떻게 이런 남편과 살았느냐. 참 대단하다.’고 위로해 주었다. 그랬더니 이 집사님이 ‘목사님, 성경에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잖아요.’라고 대답했다. 헤어지지 않고 이렇게라도 사는 것이 기특하지만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어떻게 부부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이런 관계가 우리 주변에 많다. 여기에는 상대방의 필요를 알고, 그 필요를 채워주고자 하는 마음이 자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주님은 말세의 특징을 “사랑 없음”(마24:12)으로 규정하셨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서로에 대한 ‘무관심’이다. 그런데 이런 세태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본문에서 보여주신 주님의 모습은 심각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명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신 주님의 관심은 명절 분위기에 들떠있는 축제의 장소가 아니라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었다. 고통의 현장에 있었고, 예루살렘 근교에 있으면서도 질병 때문에 성전 예배와 명절축제에 참여할 수 없는 소외된 사람들에게 있었다. 그래서 주님은 그곳을 찾으신 것이고, 그 사람들 중에서도 병이 가장 심각하고 보호자도 없는 외로운 사람을 찾아가셨다. 그리고 그의 필요를 알고, 그 필요를 채워주셨다. 오늘 우리와 우리 교회에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낮은 곳, 낮은 사람들에게로 향하시는 주님의 마음, 그 관심과 사랑이다. 이 주님의 마음과 관심을 가질 때, 그 사람이 보이고, 그의 아픔, 그의 고통, 그의 눈물, 그의 탄식, 그의 필요가 보인다. 그래서 그것을 채워줄 수가 있다. 사랑하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되고,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된다. 관심을 가질 때 바로 이 사랑의 문이 열린다. 관심만큼 사람을 변화시키고,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 없다.

 

2. 내려놓음

베스트셀러 작가에 비즈니스 전략가인 척 마틴(C. Martin)은 「관심」이란 그의 책에서 ‘삶을 재발견하는 최고의 법칙’(관심)을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발견하기’(find it)다. 관심이 시작되는 단계로 일하기를 멈춘 다음, 주위를 둘러보고 귀를 기울여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진상을 파악하는 단계이다. 둘째는 ‘변화하기’(change it)다. 관심을 실행에 옮기는 단계로, 보고들은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구체적인 해결책을 하나하나 실행하는 단계이다. 셋째는 ‘전달하기’(pass it on)다. 관심의 지혜를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 단계로, 알아낸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명확히 전달하여 함께 개선을 도모하는 단계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를 실행하기에 앞서 먼저 해야 하는 것은 바로 ‘멈춤’(Stop)이다. 본문 중에 멈춤의 중요성에 대한 이런 내용이 나온다.

 

‘빌, 당신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좋은 방향으로 바꾸려면, 먼저 주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잘 이해해야해요. 그게 첫 번째죠. 그런데 뭔가를 이해하려면 우선 그걸 알아낼 시간이 필요해요. 그러려면 하던 일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고,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야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하던 일을 멈춤은 ‘삶을 재발견하는 최고의 법칙’ 세 가지 중 첫 단계인 발견하기(find it)와 연결되는 가장 중요한 실천이고, 세 가지 단계 전체를 잇는 핵심인 것이다. 상대방의 말을 듣기 위해선 자기 말을 멈추어야 하고,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선 자기 일을 멈춰야 한다. 누군가에게 관심과 사랑을 갖는 첫 단계는 멈춤이다. 멈춰서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보고 듣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내려놓음’이라 한다. 내려놓을 때 다른 사람이 보인다. 그들의 소리가 들리고, 그들의 필요를 알 수가 있다.

 

왜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필요를 알지 못하는가? 내려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에 나온 사람들처럼 모두가 그저 자기 필요에만 집착해 있기 때문이다. 자기 필요에만 집중하면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난다. 하나는 아무것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고, 다른 하나는 곁에 있는 사람이 사랑의 대상이 아닌 극복해야 할 장애물로 보이게 된다. 이는 극도의 이기주의와 격렬한 경쟁의식만 낳을 뿐이다(작금의 아이티 상황이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니 상대방의 아픔이나 고통, 그 필요를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짓밟고서라도 내 필요만 채우면 그만이다. 이런 의미에서 병자를 향한 “네가 낫고자 하느냐?”는 주님의 말씀은 물음이 아니라 ‘도전’이다. 정말 낫고자 한다면 ‘내가 먼저 물에 들어가겠다.’는 이기적인 마음과 경쟁의식, 다른 사람에 대한 원망과 미움과 시기 등을 다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7절 말씀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가 있다. 이 환자 역시 더욱 심각한 것은 육체의 병이 아니라 자기 필요에만 집착해 있는 그의 마음이다. 그것은 이기적인 마음과 경쟁의식, 다른 사람에 대한 원망과 미움과 시기하는 마음이다. 이것을 내려놓을 때 자기 필요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필요를 보게 되고, 알게 되고, 돕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은 자기의 필요도 채워지게 되는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내 옆에 있는 나무, 당신

언제부턴가 내 옆에 나무가 생겼습니다.

그 나무 때문에 시야가 가리고

항상 내가 돌봐줘야 하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할 때도 많았습니다.

 

비록 내가 사랑하는 나무이기는 했지만

내 것을 포기한다는 게

이렇게 힘든 것인 줄 몰랐습니다.

 

언제부턴가 나는 그런 나무가 싫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귀찮고 날 힘들게 하는 나무가 밉기까지 했습니다.

괴롭히기 시작했고 괜한 짜증과

심술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내덕을 많이 보고 있다고 느꼈기에

이정도의 짜증과 심술은 충분히 참아낼 수 있고

또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무는 점점 병들었고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태풍과 함께 찾아온 거센 비바람에

나무는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나는 그저 바라만 보았습니다.

어쩌면 나무의 고통스러워함을 즐겼는지도 모릅니다.

 

그 다음 날

뜨거운 태양아래서

나무가 없어도 충분히

살수있다고 여겼던 나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내가 나무를 보살피는 사이에

나무에게 짜증과 심술을 부리는 사이에

나무는 나에게 너무나 소중한 그늘이 되었다는 것을.......

 

이제는 쓰러진 나무를 일으켜 다시금 사랑해 줘야겠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나 필요한 존재임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나무는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것의 상징이다. 때때로 그(그것)들 때문에 힘들고, 또한 그들이 거추장스럽게 여겨질 때도 있었고, 그들로부터 도망치고 싶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할 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다. 사실 이 나무들은 시련의 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림이고, 고난의 눈보라와 폭풍우에도 쓰러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버팀목이다. 뜨거운 햇볕을 가려주는 그늘이고, 외부의 침입을 막고 보호해주는 울타리이다. 내게 필요해서 주님이 내게 주신 소중한 선물이다. 서로의 필요를 알고, 필요를 채워주는, 그래서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자. 무엇보다도 우리 주님과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 필요한 존재가 되자. 여기에 삶의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이다. 서로의 필요를 알고, 필요를 채워주는 사랑과 행복 비타민 ‘N’서로 필요한 존재 됨’(Need each other)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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