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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권리를 포기하라(Qu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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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330회 작성일 10-02-15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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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권리를 포기하라(Quit).

히11:24~26

2010. 2/14 11:00

파인애플 이야기

밀림에서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있었다. 그는 파인애플이 먹고 싶어 고국에서 파인애플 묘목을 가져다가 원주민을 고용하여 심었다. 3년이 지나 드디어 맛있는 파인애플을 먹게 되나 하고 기뻐했다. 그런데 파인애플이 익기가 무섭게 사라졌다. 알고 보니 원주민들이 가져간 것이었다. 선교사는 원주민들에게 내 나무이니까 파인애플을 따가지 말라고, 이렇게 남의 것을 훔쳐간 것은 도둑질이라고 했더니 밀림에서는 나무를 심은 사람이 그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이 법이라 하였다. 선교사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그 후로도 원주민들의 파인애플 도둑질은 계속되었다. 화가 난 선교사는 원주민들을 위해서 운영하고 있는 병원의 문을 닫겠노라 위협하기도 하고, 파인애플 주변에 개로 경비를 서게 하기도 했으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이렇게 선교사와 원주민간의 갈등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교사는 성경을 읽는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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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애플이 누구의 것이냐? 네 것이냐? 내 것이지!’

 

비로소 선교사는 욕심 때문에 파인애플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가를 망각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 후 또 다시 원주민들이 열매를 모두 따갔지만 선교사는 화를 내지 않았다. 달라진 것이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원주민들이 선교사를 찾아와 물었다.

‘선교사님, 올해는 왜 우리에게 화를 내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난 그 나무가 내 것이라고 생각해서 화가 났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진짜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선교사는 파인애플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원주민들에게 말을 했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다음부터 원주민들이 파인애플을 훔쳐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파인애플을 훔쳐 가면 그것은 하나님의 것을 훔치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런 선교사의 변화를 보고 원주민들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다.

 

포기가 얻는 길이다.

이는 한동안 우리교회 방문자들에게 선물로 드렸던 「파인애플 스토리」란 책의 내용이다. 뉴기니(New Guinea)의 밀림에서 사역을 했던 어느 선교사가 경험한 실화로 ‘분노를 다스리는 법’이 부제(副題)로 되어 있다.

 

권리란 ‘법이 보장하고 있는 이익을 누리기 위한 법률상의 힘’이다. 그런데 이 권리는 평안히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라(Rudolf von Jhering, 독일의 대표적인 법철학자)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류의 역사는 권리를 쟁취하려는 세력과 그것을 억제하고 침해하는 세력 간의 갈등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지금도 곳곳에서 이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파인애플 이야기」는 이런 갈등을 멋지게 해결하는 법을 보여주는 책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거나 침해를 당할 때 좌절하고 분노한다. 그래서 이를 극복하고자 권리투쟁을 하지만 그것으로 극복되지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갈등을 낳을 뿐이다. 역설이지만 그것은 선교사처럼 권리의 주체이신 주님께 권리를 돌려드리는 것,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께서 죽고자 하는 자를 살려주신 것처럼, 권리 역시 회복시켜 주신다. 나아가서 관계도 회복시켜 주신다. 그래서 이 시간은 신자의 ‘삶 시리즈’ 열일곱 번째, 서로 권리를 포기함’(Quit)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은?

권리를 쟁취하고자 투쟁하는 상황 속에서, 더 많은 권리를 가지려고 하고 누리려고 하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포기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는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고, 겸손하게 낮아질 때 높아지고, 비워야 채워지고, 죽고자 할 때 살고, 잃을 때 얻는다는 철저하게 역설에 기초한 신앙의 원리를 붙들어야만 가능하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신앙 원리를 붙잡고 권리를 포기하며 살 수 있을까?

 

1. 자아관이 변해야 한다.

자아관이란 내가 나에 대하여 갖고 있는 마음의 상, 이미지를 뜻한다. 즉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다. 내가 나를 평가하고, 결정하고, 선택하는 이런 모든 태도가 자아관에서 비롯된다. 이 자아관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다.

 

그런데 권리포기란 내가 나의 주인 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을 말한다. 내가 나를 결정하고 선택하고 판단하는 모든 것을 중단하는 것을 말한다. 즉 자아관의 주체를 바꾸는 일이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대로 살지 않고,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사는 것이다. 신앙생활이란 이것을 훈련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이런 바울의 자아관을 보여준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죽음을 선언하고 있다. 사람이 죽으면 그의 권리도 사라진다. 이와 같은 바울의 사명선언은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 곧 자아의 주체가 주님이시라는 고백이다. 변화된 자아관의 고백이다. 이렇게 자아관이 변할 때 권리포기가 가능해 진다.

 

믿는다는 것은 주님을 ‘나의 왕’ ‘나의 주’로 모시는 것인데, 주님을 주로 모시는 것과 주님의 주되심을 인정하며 사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여기서 신앙의 질적 차이가 생긴다. 주님을 주로 모셨지만 여전히 자기가 주인인 사람(권리의 주체가 자기인 사람)이 있다. 아직 신앙이 어린 육에 속한 신자다(고전3:1). 하지만 성숙한 영에 속한 신자는 모든 권리를 주님께 양도하고 산다. 주님이 권리의 주체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모든 일을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초점을 맞추셨던 주님의 삶을 실현할 수가 있다. 성경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며 자신의 뜻대로 사는 것을 포기하도록 권고하신다. 자기 권리를 포기하고 주님의 주되심을 인정할 때 심령의 평안과 평화를 경험하게 되고, 마음의 분노와 불편한 관계들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살아갈 때 인간은 필연적으로 두려움, 좌절, 피곤함, 그리고 실패로 결론지어 진다. 그러므로 날마다 바울처럼 나의 죽음을 선언하여 내가 내 인생에 대하여 권리(한)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내 인생의 주인은 주님이심을 고백하며 살아야 한다. 이것이 세상에 화평을 심는 건강하고 성숙한 신자의 모습이다.

 

2. 가치관이 변해야 한다.

가치관이란 무엇이 나에게 더 소중하고 중요한가를 판단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에 어디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지 알 수가 있다. 10년 전 서울시내 초등학교 5학년을 대상으로 ‘어떻게 살고 싶냐’고 물어보았더니, 여러 대답 중에 가장 많은 것이 ‘유명하게 살고 싶다,’ ‘부자로 살고 싶다,’ ‘편하게 살고 싶다’고 하였다 한다. 돈이 있어야 하고, 권력이 있어야 하고, 섬기는 것보다는 지배하며 대접받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이야기지만 이것은 오늘날 사람들의 가치관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의 가치관이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들의 소망이 보다 많은 재물과 힘(권력), 그리고 이를 통한 편안한 삶이다. 이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한 권리포기는 죽으라는 것과 같다. 이는 스스로 가난해질 각오, 무력하게 짓밟힐 각오, 힘들고 어려운 좁은 길을 걸을 각오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본문은 모세의 선택에 대한 말씀이다. 모세는 40년 동안 애굽 왕 바로의 궁궐에서 공주의 아들로 생활했다. 그것은 평생 명예와 부귀가 보장되는 자리였다. 그런데 그는 그 권리를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길을 선택했다. 그가 이런 선택을 하게 된 것은 가치관이 변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좋아했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큰 재물로 여겼으며, 상주심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그의 가치관이 변했기에 공주의 아들이라는 권리를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가치관이 바뀔 때 모든 것이 바뀐다. 생각이 바뀌고, 관점이 바뀌고, 의미가 바뀌고, 말도 행동도 바뀐다. 가치관의 변화는 모세에게 세속적인 성공(번영)에 대한 해석을 바꾸어 놓았다. 그는 세속적인 낙을 ‘죄악의 낙’이라 그 기간을 ‘잠시’라고 여겼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받는 고난에 대한 의미를 바꾸었다. 그의 백성과 함께 받는 고난을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으로, 그리고 그 고난을 이 세상에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값진 보배’로 여겼다. 그리고 세속적인 보상보다 하나님의 보상을 사모하였다. 그래서 지금까지 목숨처럼 여겼던 것들을 초개처럼 버릴 수가 있고, 지금까지 다투며 쟁취하고자 했던 권리를 기꺼이 포기할 수가 있다.

 

가치관이 변해야 권리포기가 가능하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집중되어 있는 세속적인 가치관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영적인 가치관으로, 찰나적이고 임시적인 것에 집착해 있는 가치관이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가치관으로, 자기중심적인 이기적인 가치관이 타인 중심적인 이타적인 가치관으로 변할 때 세속적이고 임시적인 것에 대한, 그리고 이기적인 것에 대한 권리포기가 이루어진다. 불변하는 절대적인 가치를 발견해야 변하는 상대적인 가치를 포기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이런 가치관의 변화는 자아관의 변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주님이 주인된 삶을 살면 자연스럽게 가치관도 바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가 서로에게 해야 할 중요한 일은 서로의 믿음을 격려하는 일이다. 그래서 자기가 주인된 삶을 내려놓고 주님이 주인된 삶을 살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히 변화된 가치관으로 자신과 주변을 바라보게 될 것이고, 가치관이 변했으니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기보다 기꺼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게 될 것이다. 서로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으니 경쟁과 다툼이 사라지고 협력과 평화가 임하게 된다. 믿는다는 것이 이렇게 멋진 일이고, 이 일을 이루는 것이 신자의 사명이다.

 

최고의 사랑은 권리포기다.

영화 타이타닉을 본 사람들은,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사랑하는 연인에게 구명보트를 양보한 주인공, 갑판 위에서 찬송가를 연주하여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는 악단의 모습을 기억할 것이다. 자신의 권리를 다른 사람을 위해 포기한 숭고한 사랑의 모습이다. 이 영화에서 많은 부분이 각색되었지만 악단은 실재라고 한다. 이들의 연주로 죽음의 공포에 떨던 사람들이 천국을 소망하는 모습으로 변하여 공포의 바다가 은혜의 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사랑이 아니고는 이런 순간에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 수 없다. 그리고 자기 권리를 포기하지 않고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다. 그래서 권리포기야말로 최고의 사랑이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크고 완벽한 사랑을 보여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그래서 예수님을 사랑의 화신(化身)이라고 하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말한 것이다. 바울은 이런 예수님의 삶을 ‘권리포기’라는 한 단어로 요약했다(빌2:5~).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것, 모든 것의 주인이신 그 분이 평생 헐벗고 굶주린 삶을 사신 것, 죄 없으신 그 분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신 것, 그리고 죽으실 수 없는 그 분이 죽으신 것. 이 모두가 우리를 위한 권리포기였다. 그래서 바울 역시 이런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자신의 모든 권리를 ‘배설물’처럼 여기며(빌3:8) 주님을 따랐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을 수 없다’는 법언(法言)이 있다. 자기 권리는 자기가 지켜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권리포기는 매우 위험하고 어리석은 짓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런데 세상이 아직 살만하고 아름다운 것은 권리포기라는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을 기꺼이 행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 권리를 끝까지 챙기는 사람들이 ‘똑똑한 바보들’이라면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는 사람들은 ‘거룩한 바보들’이다. 신자는 거룩한 바보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세상을 아름답게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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