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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십자가 달게 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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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999회 작성일 10-03-28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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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십자가 달게 지고

히브리서12:1-2

2010. 3/28 08:00, 11:00(성찬식)

Stay hungry! Stay foolish!

사람들은 오늘날 가장 존경하는 최고경영자로 스티븐 잡스(S. P. Jobs)를 꼽는다(그의 프로필은 생략). 그의 스탠포드 대학졸업 축사가 크게 화제가 되었다. 그의 살아온 인생여정 뿐만 아니라 인생철학이 여기에 다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축사에서 명언을 남겼다. 그것은 ‘stay hungry, stay foolish’(배고픈 채로, 어리석은 채로 머물라)다. 자기 만족에 빠져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자기 부족을 알고 계속해서 도전하고 노력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자신이 이런 삶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더욱 감동을 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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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해방직후 국민소득 67불에서 불과 50여년 만에 2만 불이 되었다. 이는 우리 부모세대들의 ‘헝그리 정신’ 때문이다. 잘 살기 위해 굶주림을 참으며 열사(熱沙)의 나라 건설현장으로, 이국만리(異國萬里) 수천 길의 땅속으로, 말도 통하지 않는 환자들을 돌보는 일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노력한 대가다. 그런데 요즈음 청년 실업률이 10%를 넘고, 아까운 인재들이 ‘88만원 세대’(대학을 졸업하고도 비정규직으로 임금 88만원에서 119만원을 받는 20대를 칭함)로 전락했다는 탄식과 우려의 소리가 높다. 경제학자 찰스 핸디(C. Handy)는 ‘현대의 문제는 부가 아닌 정신의 빈곤’이라고 했다. 우리 현실에 적합한 표현이라 생각한다. 사실 이런 현실보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이런 현실을 만들어내고 있는 우리의 정신과 태도다. 빈곤해진 정신(hungry spirit), 헝그리 정신을 유지(stay hungry)하지 못한 태도가 문제다. 이런 정신과 태도는 소위 힘들고(Difficult), 지저분하고(Dirty), 위험한(Dangerous) ‘3D’직종에 대한 회피로 이어진다. 요즈음 아무리 구직란이라 하지만 ‘3D’에 해당되는 직종에서는 구인란이다. 그래서 외국에서 그 인력을 보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영적 생활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주님은 좁은 문, 좁은 길을 요구하시만 우리는 넓은 문, 넓은 길을 좋아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셨는데 십자가를 타고 가려한다. 신앙생활에 목숨을 거는 것이 아니라 취미생활의 한 방편으로 생각하고 있다.

 

십자가, 신자 생활의 ‘3D’

본문은 히브리서의 결론이다. “이러므로”라는 접속사는 1~11장에서 설명한 구세주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떻게 살아야할지 결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 믿음의 대상이시고, 믿음을 완성시켜주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즉 삶의 모범이 되신 주님에게 집중하는 것,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님처럼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라는 강력한 요구이다. 십자가는 신자들이 감당해야 할 ‘3D’직종이다. 주님은 몸소 이를 실천하셨고, 우리에게 이를 따르라고 요구하신다.

 

 

1. 십자가는 고난(Difficult)의 상징이다.

 

   “십자가를 참으사”

 

오늘날은 죄수의 인권을 고려해서 사형을 집행하더라도 고통을 적게 느끼고 빨리 죽을 수 있도록 고안되어 있다. 그러나 옛날에는 그 반대였다. 죄수로 하여금 끔찍한 고통을 경험하면서 서서히 죽게 하였다. 그것은 이를 본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십자가의 처형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십자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육체적 고통을 주는 형벌이었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이 형을 반역죄를 지은 이방인들에게만 제한하여 집행을 했다. 그런데 이 엄청난 고난과 고통의 상징인 십자가를 주님께서 담당하신 것이다. 아마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기억할 것이다. 멜 깁슨(Mel C. G. Gibson)이 만든 영화〈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Christ)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시작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12시간 동안 고난의 과정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것을 보면서 세상에 힘들고 어렵지 않은 일이 없지만 주님의 십자가 고난에 비할 수 있는 어려움은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므로 참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세상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다. 다른 사람이 하고 있으니까 그게 쉬워 보이고 좋아 보이는 것이다. 일 자체가 고통이고 고난이다. 왜냐하면 죄를 범한 사람 아담에게 그 형벌로 주어진 것이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생각을 바꾸면 힘들고 어려운 것도 쉽고 편해진다. 즐겁게 감당할 수가 있다. 그 비결이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는 것, 주님이 당하신 고난에 비교하는 것이다(벧전2:18~24). 여러 가지 힘들고 어려운 육체적 고난과 악조건들을 견뎌내지 않고 성공한 사람, 승리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십자가 후에 부활이 있었던 것처럼 어려움을 참고 견디면 영광이 따르게 된다.

 

 

2. 십자가는 수치와 부끄러움(Dirty)의 상징이다.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찬송가 135장은 20세기 최고의 찬송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16세에 소년가장이 되어 가난 속에서도 고학으로 목사가 된 버나드(G. Bernard)가 1913년에 작사 작곡한 ‘험한 십자가’(Old Rugged Cross)라는 제목의 찬송이다. 그는 여기서 십자가는 고난과 수치의 상징이지만(1절),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멸시를 받은 험한 십자가에 매력이 끌린다(2절)고 고백한다. 그리고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받았으니 조롱과 비난의 험한 십자가를 항상 달게 지겠다고 결심한다(4절).

 

육체적 고통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이 정신적 고통이다. 수치와 부끄러움은 정신적인 고통이다. 주님은 유대와 로마의 지도자들과 병사들에게 온갖 수치와 부끄러운 당했다. 그들은 주님의 그 얼굴에 침을 뱉고, 홍포를 입히고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씌워 조롱을 하고, 주먹과 손바닥, 채찍으로 때렸다(마26:67). 십자가에 달린 주님에게 ‘이스라엘의 왕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오고, 하나님의 아들이면 스스로 구원하라.’고 희롱했다(39~44).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 주님의 제자 가룟 유다를 유혹하여 은 30냥에 주님을 팔아넘기게 했던 사단은 우리에게 수치와 수모를 주어 사명을 포기하고, 사명의 자리를 떠나게 만든다. 살다보면 정말 ‘더러운 꼴’을 당할 때가 많이 있다. 그러나 이것도 참아야 한다. 수치와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뛰쳐나가면 아무것도 성취할 수가 없다.

 

 

3. 십자가는 위험(Dangerous)의 상징이다.

십자가는 육체적 고통의 위험, 정신적 고통의 위험, 영적 고통의 위험, 죽음의 위험을 상징한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눅22:39~46)에서 이런 고통을 경험하셨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드린 처절한 기도(:44)는 바로 이러한 위험과의 싸움이었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이런 위험들 앞에서 주님은 통곡을 하셨다(히5:7). 그래서 주님은 세 번이나 이 잔을 물리쳐 달라고 기도하셨으나 이 모두를 하나님 아버지께 맡김으로 기도를 마쳤다.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 주님은 십자가상에서도 이런 고통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주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라고 외쳤다. 이는 단절과 죽음의 위험에 직면한 영혼의 고통스러운 부르짖음이다. 이때도 역시 주님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라는 하나님께 대한 강한 신뢰로 이 위험을 극복하셨다. 바울 역시 선교여행 과정에서 삶에 대한 희망을 버려야 할 만큼 심각한 위험에 직면한 적이 있다고 고백하였다. 그런데 위험에서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로 선교의 사역을 계속할 수가 있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11장에서 선진들의 믿음을 이야기하면서 믿음의 길이 결코 낭만적이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그 길은 목숨을 걸어야할 만큼 힘들고 위험한 길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그 길을 기꺼이 갔다고 소개한다. 그래서 본문 1절에서 위험한 길이지만 선진들의 응원을 받으며 인내로서 경주(競走)하자고 격려한 것이다. 그렇다. 나만 혼자 당하는 고통은 없다. 주님이 이미 당하셨고, 믿음의 선진들도 당하였다. 그리고 그 고통 가운데 주님이 함께 하시고, 하늘의 천군과 천사들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이 응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은 결코 위험한 것이 아니다. 부활의 영광을 위한 전주곡일 뿐이다.

 

 

위대한 반전(反轉)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본문은 주님이 이런 어려움과 부끄러움, 그리고 위험을 무릅쓰고 십자가를 지신 이유를 간단하게 말씀하고 있다. 또한 이는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는 위대한 반전의 상징이다. 그것은 부활이라는 영광을 선물했기 때문이다. 즉 저주를 축복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고통을 영광으로 바꾸었다. 그래서 십자가는 더 이상 힘들고(Difficult), 지저분하고(Dirty), 위험한(Dangerous) 것으로서의 ‘3D’가 아니라 역동적(Dynamic)이고, 극적(Dramatic)이고, 꿈이 가득한(Dreamful) 것으로서의 ‘3D’가 되었다. 그래서 누구든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따르면 이런 삶을 보장 받는다.

 

1865년 아주 추운 겨울, 눈보라가 치는 날이었다. 한 여인이 영국의 사우스 웨일즈 언덕을 지나가고 있었다. 아이를 안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강풍과 폭설이 매섭게 몰아쳤다. 하얀 눈이 길을 순식간에 지워버렸고, 여인은 길을 잃은 채 방황하다가 눈 속에 묻히고 말았다. 눈보라가 그친 다음 구조대가 이 여인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 여인은 자기 옷을 모두 벗어 아기의 몸을 감싼 채 죽어 있었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아이는 살아 있었다. 이 아이는 자기 숙부 집에 자라서 변호사 시험에 합격을 했다. 축제의 날, 숙부는 그 동안 가슴에 묻어두었던 그 위대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조카에게 해주었고, 이 청년은 눈이 쏟아지는 추운 겨울에 어머니 무덤을 찾았다. 그리고 자신의 외투와 양복과 속옷을 하나씩 벗어 무덤을 덮었다. 청년은 벌거벗은 몸으로 무덤을 껴안으며 울부짖었다.

 

‘어머니, 그 때는 지금 저보다 훨씬 추우셨지요? 어린 핏덩이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생명을 내던지신 어머니의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합니까?’

 

이 위대한 어머니로 인해 생명을 얻은 사람은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 L. George)다. 그는 1차 세계대전 때 영국 군수장관을 거쳐 1916년 영국수상이 되었다. 그가 어떻게 수상이 되며,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될 수가 있었는가? 주님의 십자가 고난 같은 어머니의 벌거벗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이 고난이 아들을 위대한 사람으로 만든 것이다. 십자가의 사랑에는 이런 역전의 능력이 있다.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을 통하여 내 자신을 비롯하여 자녀, 가정, 교회, 일터, 그리고 이 민족이 아름답게 변화될 것이다. 우리 모두 ‘쓴 십자가 달게 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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