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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하나가 되라(Un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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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5,377회 작성일 10-04-18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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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하나가 되라(Unite).

요17:20~26

2010. 4/18 08:00, 11:00

칼과 바늘

인간이 강철로 만든 것 가운데 가장 상징적인 대립을 이룬 것이 있다면 그것은 칼과 바늘일 것이다. 영국의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A. Tennyson)은 이 칼과 바늘을 이렇게 비유했다. ‘남자는 칼이고, 여자는 바늘이다.’ 칼은 힘의 상징이고 전쟁의 상징이다. 칼은 자르고 토막을 내고, 생명을 죽이는 파괴의 도구다. 그러나 바늘은 사랑과 평화의 상징이다. 바늘은 찢어지거나 헤진 것들을 깁고 합쳐서 거기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바늘은 융합, 하나됨, 창조의 상징이다. 과거에는 전쟁을 잘하는 남성들이 지배하는 힘의 시대, 즉 칼의 시대였다. 이제 21세기는 헤진 것을 깁고 합쳐서 그 안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여성들의 시대, 즉 바늘의 시대다. 아무튼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나누고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찢어지고 헤진 것을 깁고 합쳐서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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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과 바늘의 비유는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넘어서 인생 전반에 적용할 수 있다. 주변에는 칼처럼 자르고 찌르고 나누고 파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바늘처럼 깁고 합쳐서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사람이 있다. 신자들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 성경은 전자를 마귀의 일로, 후자를 성령의 사역으로 규정하고 있고, 신자는 마땅히 바늘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을 촉구한다. 신자는 갈등의 벽을 넘어 화해를, 분열의 강을 건너 일치를, 전쟁의 지진을 평화로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칼이 아니라 바늘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간은 신자의 ‘삶 시리즈’ 스물 한 번 째, ‘서로 하나가 됨’(Unite)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왜 하나가 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본문에서 신자와 교회가 왜 하나가 되어야 하며, 하나가 되는 일에 힘써야 하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 수가 있다. 본문은 세 가지로 그 이유를 말씀하고 있다. 첫째는 그것이 주님의 소원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7장은 제자들(6~19)과 교회(20~26)를 위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기도다. 그런데 이 기도의 핵심이 ‘하나 되는 것’이었다. 제자들이 하나가 되고, 교회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는 하나 되는 것이 얼마나 간절한 주님의 소원이었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1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21,22).

 

둘째는 그것은 성자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이 모범으로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님은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라고 말씀한다. 이는 성육하신 아들과 아버지의 본질적이며 완전한 일치를 뜻한다. 주님께서 친히 이런 일치의 삶을 먼저 실천하시고, 그것을 모델로 제자들과 교회에게 요구하신 것이다. 셋째는 세상에 증거를 삼기 위함이다(21,23). 하나됨의 결과는 내적으로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이고(“우리 안에 있게 하사”), 외적으로는 세상으로 믿게 하는 것이다(“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그러므로 신자의 하나됨은 하나님의 임재와 복음전도의 중요한 방편이다. 분열된 곳에 주의 영이 임할 수 없고, 그런 모습으로 전도의 결실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분열이 전도의 가장 큰 장애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 좋은 예다.

 

어떻게 하나됨을 이룰 수 있을까?

주님의 기도는 신자와 교회가 하나가 되어야 할 이유와 목적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신자와 교회의 존재 이유와 목적이기도 하다. 우리가 주님의 소원을 알고, 주님의 삶을 따르기를 원한다면, 그리고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증인된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서로 하나됨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됨을 이루어 갈 수 있을까?(정확하게 표현하면 지킬 수가 있을까?)

 

1. 서로의 같은 점을 지향하라.

90년대 초반에 통일과 관련된 두 권의 책이 발표되었다. 하나는 이문열의 「아우와의 만남」이고, 다른 하나는 고(故) 이청준의 「흰옷」이 그것이다. 두 중견 작가의 통일관이 담긴 작품들이다. 두 작가의 공통된 견해는 비록 남과 북이 이념갈등으로 많은 세월 갈라져 살아왔지만 한 민족이라는 공통점을 지향하여 동질성을 회복하자는 것이다(이문열은 같은 핏줄이라는 측면에서, 이청준은 같은 정신적 문화의 측면에서). 같은 핏줄, 같은 문화를 가진 같은 민족이라는 공통점에 초점을 두고 서로 만나고, 발전시켜서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그래서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여 통일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의미있는 제안이다. 사실 ‘서로 다름’에만 초점을 맞추면 분열과 갈등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서로 같음’에 초점을 맞추면 만남과 화해, 하나됨의 길이 열리게 된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신자의 하나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4:4~6).

 

이는 신자(교회)가 하나가 되어야 할 이유에 대한 역설이다. 동시에 하나가 되는 방법이기도 하다. 물론 신자도 서로 다른 점이 많다. 배경이 다르고, 나이가 다르고, 하는 일이 다르고, 생활정도나 취향이 다르고, 생각도 다르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비본질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신자는 같은 성령, 같은 소망, 같은 주님, 같은 믿음, 같은 세례,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다. 본질적인 것들에 있어서 서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이 ‘서로 같음’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라는 것이다(모든 차이는 ‘비본질적인 것’에서 나오고, 같음은 ‘본질적인 것’에서 나오기 때문). 그러면 차이를 극복하고 하나됨으로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영국의 젠틀맨 골퍼(gentleman golfer)는 골프를 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골프 이야기를 한마디도 하지 않다고 한다. 서로 같은 점을 지향하여 하나됨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이것이 성숙이고 겸손이다. 우리는 누구를 만나든지 그 사람에게서 다름을 찾지 말고, 같음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동질성을 찾고, 바라보고, 집중하여 만나고 교제하여 하나됨을 이루어 갈 수 있기를 바란다. 여기에 건강하고 행복한 인생, 관계, 가정, 교회를 이루는 비결이 있고, 주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제자된 삶의 비결이 있다.

 

2. 서로의 소중한 것을 나누라.

‘나눈다’는 것은 ‘함께 한다’는 뜻이다. 기쁨을 나누는 것은 그가 경험하고 있는 기쁨에 함께하는 것이고, 고통과 슬픔을 나누는 것은 그가 당하고 있는 고통과 슬픔에 함께하는 것이다. 이것을 공감(compassion)이라고 한다. 공감은 상대방과 하나가 되는 정서적 일치(rapport)를 의미한다. 그래서 함께 한다는 것은 서로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기쁨을 나누어 그 기쁨에 함께하고, 고통과 슬픔을 나누어 그 고통과 슬픔에 함께 하므로 그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물질을 나누고, 시간을 나누고, 생활을 나누고, 대화를 나누면 서로 하나가 된다. 옛날 마을을 보면 이웃과 함께 일손을 나누고(품앗이), 음식을 나누고, 놀이를 나누었다. 이렇게 무엇이든 함께 나눔으로 하나가 된 마을 공동체를 이루었다. 그러므로 나눔이 하나됨의 중요한 비결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최초의 기독교회다(행2:41~47). 모두가 유대인이긴 하지만 서로 각기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혈통적으로 유대인이라는 점 외에는 살아온 배경, 문화, 언어도 다 다른 사람들이었다. 세계 각국에서 흩어져 살다가(디아스포라) 오순절이라는 명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잠시 방문했던 사람들이다(행2:5~11). 그런데 이런 사람들로 구성된 예루살렘 교회가 완벽하게 하나됨을 실현하여 모든 세대에 가장 귀감이 되는 교회가 되었다. 성경은 이 교회의 특징을 이렇게 증거하고 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행2:44,45).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물건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더라.”(행4:32).

 

이는 완벽하게 마음과 뜻이 하나가 되는 신앙 공동체를 이루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여기에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자기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다는 점이다. 나눔을 통해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자기 것일지라도 자신의 소유를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이다. 소유에 대한 이기심을 완전히 비웠다는 뜻이다. 결국 이 둘은 하나다. 이기심을 비웠기에 나눔의 생활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기심이 있으면 나눔은 불가능하다. 현대사회나 교회가 하나가 되지 못함이 여기에 있다. 또한 나눔을 통한 하나됨의 원리를 잘 보여주는 것이 성찬식이다. 성찬식은 주님이 친히 세우신 예식이다. 이것은 주님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와 살을 상징하는 떡을 나눔으로 주님과 하나가 됨을 의미한다. 나아가서 이 떡과 포도주를 함께 나누어 먹은 사람들끼리도 하나가 됨을 뜻한다. 나눔이 곧 하나가 되는 비결인 것을 주께서 친히 보여주신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 거룩한 예식을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행하라고 하셨다. 이는 교회와 신자는 나눔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고, 나눔을 실천하여 하나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이 성찬식의 거룩한 나눔을 실천하는 장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하나됨을 이루는 삶이 되자.

 

하나됨을 힘써 지키라.

정신병자들의 가장 큰 특징이 서로 하나가 되지 못한다는 점이라고 한다. 그래서 환자가 100명이라도 관리인 3명이면 이들을 충분히 관리한다고 한다. 결국 이 말은 하나됨이 건강함, 온전함, 그리고 성숙함의 표라는 것을 뜻한다. 군대에서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병사를 ‘교회환자’라고 부른다(타 종교를 섬기는 병사에게도 동일하게 부름). 이는 군대에서 부르는 편의상 명칭이긴 하지만 실제로 오늘날 사회가 바라본 우리 교회와 신자의 모습이 아닌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교회와 신자들이 하나가 되지 못한 병적인 모습을 자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서로 하나됨을 힘쓰는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여 믿게 하는 것(고전12:2)과 서로 하나가 되게 하신 것(엡4:3)이다. 문제는 그것을 지키지 못하여 하나됨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힘쓰라고 권하고 있는 것이다. ‘힘쓰다’는 헬라어로 ‘스푸다론테스’인데, 이는 현재분사로 끊임없이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됨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쏟아 부으라는 것이다. 신앙생활이란 주님께서 주신 소중한 선물을 잘 가꾸는 것이다. 하나됨이야말로 끊임없는 노력으로 잘 가꾸어야 할 소중한 선물이다. 서로의 동질성에 초점을 맞추고, 나눔의 생활을 실천하여 건강하고 온전한, 그리고 성숙한 제자의 삶, 주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삶이 되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증인된 삶을 실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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