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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에게 유익하라(Val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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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8,537회 작성일 10-05-02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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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에게 유익하라(Value).

몬1:8~20

2010. 5/2 08:00, 11:00

어떻게 살까?

신학자 고가르덴(F. Gogarten)은 인생은 네 개의 전치사(of, for, with, by)에 의해 결정된다고 했다. 첫째는 누구에 ‘의한’(of) 삶이냐? 즉 내 삶의 주인이 누구냐? 하는 문제이고, 둘째는 무엇을 ‘위해’(for) 살 것이냐? 삶의 목적에 대한 문제이다. 셋째는 누구와 ‘함께’(with) 하느냐? 이는 만남의 문제이고 관계의 문제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무엇에 ‘의해’(by) 사느냐? 삶의 방법에 대한 문제이다. 이 네 개의 전치사를 동반한 질문에 대하여 올바른 응답을 할 때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보장받을 수 있다. 안병욱 교수는 다음의 15글자가 우리의 삶을 결정한다고 했다. ‘나는 누구와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까?’ 저는 여기에 5글자를 더 덧붙여서 20글자에 의해 우리의 삶이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누구며 누구와 함께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까?’ 자기 자신에 대한 분명한 정체성과 좋은 관계, 뚜렷한 삶의 목적과 올바른 방법이 우리의 삶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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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컨(F. Bacon)은 이 세상에는 거미 같은 사람, 개미 같은 사람, 꿀벌 같은 사람이 있다고 했다. 거미는 줄을 쳐놓고 다른 곤충들이 그곳에 걸리기를 기다렸다가 잡아먹는다. 자기가 살자고 남을 해치는 사람을 두고 거미 같은 사람이라 한다.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다. 개미는 겨울을 위해 여름에 일하는 지혜가 있고, 협동심도 뛰어나다. 그런데 자기보다 약한 개미를 무참히 죽일 뿐 아니라 자기 배만 채우고 남과 나눌 줄 모른다. 그래서 이기적인 사람을 개미 같은 사람이라 한다. 있으나마나 한 사람이다. 반면 꿀벌은 남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의 상징으로 ‘꼭 필요한 사람’이다. 영국의 한 생물학자가 꿀벌의 생활에 대하여 연구한 통계다. 1파운드(약450g)의 꿀은 벌이 16,000송이의 꽃에 2,700,000번을 다녀서 추출해낸 것으로, 벌이 꽃을 입으로 빠는 횟수가 3,720,000번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바보스러운 것은 막상 벌 자신은 그 꿀을 먹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도 꿀벌과 같은 사람이 있다. 흔히 사람들은 그를 ‘바보’라 말한다. 그러나 이런 바보가 있어서 세상이 아직도 아름답고 행복한 곳, 살만한 곳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신자와 교회는 이런 ‘거룩한 바보’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of),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살고(for),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다(with). 때문에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살아야 한다(by). 그래서 이 시간 신자의 ‘삶 시리즈’ 스물 두 번 째, 서로에게 유익함’(Value)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무익한 사람이 유익한 사람으로

본문은 한 도망노예에 대한 이야기다. 오네시모라는 사람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골로새 지역에서 가정교회를 이끌고 있는 빌레몬이란 사람의 종이었다. 구체적인 정황은 모르나 주인인 빌레몬에게 큰 해를 주고 멀리 로마로 도망쳤다가 붙잡혀 옥에 갇히게 되었다. 당시 로마사회에서 노예의 생명은 주인에게 있었다. 오네시모처럼 주인에게 해를 주고 도망을 한 노예들이 붙잡혀서 주인에게 처형을 당해도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노예를 숨겨준 사람까지 중한 벌을 받았다. 이는 로마라는 나라가 노예제도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불가피한 일이었다. 로마 최전성기(5현제의 시대) 때 제국의 인구는 총 1억 2천 만 명이었는데, 그 중에 노예의 수가 6천 만 명이 넘었다(시민권자가 약 2천 만 명이었고 나머지는 속주민, 절반이 노예). 만약 주인으로부터 도망을 친 노예가 있다면, 그들은 전문적인 노예 사냥꾼들에게 추적되었고(추노 드라마처럼), 그렇게 붙잡혀 온 노예들은 이마에 도망자를 뜻하는 ‘Fugitivus’의 머리글자인 ‘F’자를 인두로 새겨 넣었다. 이것도 우호적인 주인일 경우이고, 대게는 십자가에 매달려 천천히 말라죽은 고통을 당해야 했다.

 

지금 오네시모가 이런 절박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끔찍한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는 절망적인 죄수의 신세가 되었다. 이제 그의 인생은 비참한 종말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디에도 자신의 이 안타까운 사정을 이야기할 곳도, 그렇다고 그것을 들어줄 사람도 없었다. 노예가 합법화된 세상에서 자기 주인에게 해를 준 이 무익한 노예에게 누가 관심을 주겠는가? 바깥 어두운데서 혼자 슬피 울며 이를 갈뿐이다(마25:30). 이는 죄인의 고독과 고통, 비애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놀라운 사건이 그에게 펼쳐진다. 이제 끝이라고 여겼는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새로운 출발의 기회였다. 그 절망의 감옥이 오히려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기적의 장소가 되었다(그렇다. 하나님은 어떤 절망적인 곳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마음을 열고 찾으면 발견할 수 있는 희망의 문을 준비해 두신다.). 그곳에 그의 인생을 바꿔줄 사람이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바로 복음 전도자 바울이다. 바울을 통해 그의 인생이 새롭게 변화된 것이다. 그래서 본서는 주인에게 유익한 자가 되라는 뜻에서 ‘오네시모’란 이름을 붙여주었으나 주인을 배신하여 무익한 자가 되어 죽게 된 노예 오네시모가 자신의 이름처럼 유익한 자로 변화된 이야기다. 어떻게 이 무익한 자가 유익한 자로 변하게 되었을까?

 

1. 만남이다.

피카소(P. Picasso)의 미공개 작품 한 점이 런던의 한 경매장에서 경매되었는데, 자그마치 293억 원에 팔렸다고 한다. 그 작품은 1943년에 만든 ‘황소머리’라는 조형물이다. 그런데 그토록 비싼 가격에 비해 그 재료는 정말 형편없는 것이었다. 1943년 길을 가던 피카소가 우연히 버려진 자전거 한 대를 발견하고, 그 자전거에서 안장과 핸들을 떼어냈다. 그리고 그 안장에다가 핸들을 거꾸로 붙였다. 그리고 그 이름을 ‘황소머리’라고 붙인 것이다. 그게 다였다. 중요한 것은 버려졌던 그 자전거,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그 자전거가 피카소의 손을 거치는 순간 수 백 억이 넘는 초고가의 예술품으로 탈바꿈을 하게 된 점이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누구를 만나느냐가 중요하다. 앞에서 ‘나는 누구며 누구와 함께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까?’가 우리 삶을 결정한다고 했는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누구와 함께’ 이다. 즉 누구를 만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결국 이것이 자신의 정체성을 결정하고, 삶의 목적과 방법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오네시모의 삶에서 이를 확인할 수가 있다. 그가 이런 절망 가운데서 희망을 보게 된 것은 ‘만남’ 때문이다. 로마 감옥에서 사도 바울을 만나고, 그리고 이 바울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무익한 그를 유익한 사람으로 변화시킨 것이다(11). 폐품 같은 그를 명품으로 거듭나게 했다. 버려진 자전거가 거장 피카소를 만나 최고의 예술품으로 다시 태어난 것처럼, 어떤 절망적인 인생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복되고 유익한 인생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내 자신이 유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선 날마다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야 한다. 그리고 사도 바울처럼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도록 만남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어둠의 장막에서 떨고 있는 수많은 이 땅의 오네시모들이 유익한 인생을 될 것이다. 이것이 세상을 아름답게, 서로를 유익하게 하는 비결이다.

 

2. 사랑이다.

빌레몬서는 1장 밖에 안되는 짧은 책이지만 목회자로서 영혼을 사랑하는 바울의 마음이 가장 잘 나타나 있다. 버림받은 한 인생을 위해 어쩌면 이렇게도 간절할 수 있을까? 당시 도망노예는 오늘날 강간살인범보다 더 부정적으로 보았다. 로마는 모든 부분에 있어서 관대했지만 체제(질서)에 도전하거나 파괴하는 세력은 가혹하게 처단했다. 도망노예에게 가혹한 형벌을 법적으로 허용한 것은 이를 사회질서의 파괴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사회에서 도망노예는 사랑할 이유도, 사랑을 받을 가치도 없는 사람이었다. 이런 그를 향하여 바울이 보여준 사랑은 감동 그 자체였다. 본서는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종이 아닌 형제로 여겨(16) 그를 용서해 줄 것(17)과 자신을 돕는 자로 곁에 둘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13,14)는 바울의 부탁이다. 본문에 오네시모를 향한 바울의 사랑을 잘 보여주는 단어가 몇 개 나온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10절에서는 “옥중에서 낳은 아들”이라 하였고, 12절에서는 “내 심복”이라고 했다. 특히 17~18절에서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각별히 대해 줄 것을 당부한다.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진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 오네시모에 대한 바울의 마음이 잘 나타난 표현들이다. 여기서 심복이란 ‘심장’, ‘마음’이란 뜻이다. 심장이나 마음은 우리의 몸에서 가장 소중한 장기(臟器)이다. 오네시모가 심장처럼 바울에게 소중한 존재라는 뜻이다. 바울은 버림받은 인생,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못한 사람,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는 말하는 짐승과 같은 노예, 그것도 주인에게 해를 주고 도망하다 붙잡혀 처형을 앞두고 있는 노예를 아들로 받아주고,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 바울은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가치가 없는 자를 위하여 가장 소중한 것을 준 것이 주님의 사랑이다. 바로 이 사랑으로 바울은 오네시모를 받아준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랑이 오네시모를 새로 태어나게 만든 것이다. 사랑이 무익한 자를 유익한 자로 변화시키는 능력이다. 별 볼 일 없는 인생을 탁월하게 주목받는 인생으로 변화시키는 힘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한 것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서로에게 유익한 자가 되고, 누구든지 사랑을 받으면 유익한 자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그 후 오네시모

그러면 이렇게 바울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주님의 사랑을 경험한 오네시모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천주교회에서는 오네시모를 성자로 추대하고 있다. 천주교 문헌 중에 「성 예로니모」에 의하면, 오네시모는 에베소 교회 감독이 되었고, 네로황제에 의해 골로새 교회가 핍박을 받아 빌레몬과 그의 아내 압비아, 당시 골로새 교회의 감독이었던 그의 아들 아킵보가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서 죽임을 당하게 될 때, 오네시모는 에베소 교회 감독 자리를 버리고 로마로 달려가 빌레몬 가족과 만나, 그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그의 알려지지 않은 묘비에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오네시모! 그는 영원히 주인 빌레몬과 예수님을 따라갔다.’ 뿐만 아니라 에베소 교회 감독으로 있으면서 바울이 기록한 편지들을 수집하여 신약성서 형성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주님 안에서 중요한 것은 외적인 이력이나 배경이 아니라 내적인 변화다. 짐승처럼 여겼던 노예도 변화되니 이렇게 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유익하게 쓰임을 받았다.

 

나비효과(butterfly effect).

나비효과라는 말이 있다. 이는 중국 베이징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다음 달 미국 뉴욕에서 폭풍을 발생시킬 수도 있다는 과학이론이다. 미국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E. Lorentz)가 1961년 기상관측을 하다가 생각해낸 원리인데, 훗날 물리학에서 말하는 카오스 이론(Chaos Theory)의 토대가 되었다. 작은 힘이지만 때로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는 이 이론은 처음엔 과학에서만 사용지만 점차 경제학과 일반 사회학 등에서도 적용되었다. 가령 제1차 세계대전이 세르비아 청년(Gavrilo Princip)의 총성에서 시작되었고, 세계대공황(1930년 대)이 미국의 어느 시골 은행의 부도로부터 시작되었다. 또한 1년 전 인터넷에 올려진 악플이 톱스타의 자살로 이어졌다. 이 모두가 나비효과의 예가 될 수 있다.

 

나비효과처럼 나의 사소한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혹은 미소가 다른 사람의 마음과 삶에 폭풍이 될 수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고, 또한 주기도 하며 살고 있다. 문제는 그것이 유익한 것이어야 한다. 특히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게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고전10:32)는 바울의 당부처럼 누구에게든지 어디서든지 선한 영향력을 주는 유익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위해선 날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만나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이 어린이 주일인데, 부모인 우리가 해야 할 소중한 일은 우리 자녀들을 유익한 사람으로 길러내는 것이다. 이 또한 우리 자녀로 주님을 만나게 하는 것과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내 자신을 비롯하여 우리 자녀들이 유익한 사람으로 세워질 때, 나비효과처럼 폭풍과 같은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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