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깨어 있어라(Wake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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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631회 작성일 10-05-16 14:27본문
서로 깨어 있어라(Wake up).
롬13:11~14
2010. 5/16 08:00, 11:00
하인리히 법칙(Heinrich's Law).
1930년 대 초에 미국의 한 보험회사 관리감독자였던 하인리히(H. W. Heinrich)는 각종 사고들을 분석하다가 ‘1:29:300’의 법칙을 발견했다. 한 번의 대형사고가 발생했다면 이미 그 이전에 유사한 29번의 경미한 사고가 있게 마련이고, 그 주변에 또다시 300번 이상의 징후가 나타난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이를 ‘하인리히 법칙’이 한다. 도쿄 대학교 하타무라 요타로(畑村洋太郞) 교수 또한 ‘한 번의 대실패, 대형사고, 멸망으로 이르는 길은 300번의 징후를 담고 있다.’고 했다. 작은 징후들이 쌓여서 결정적인 큰 사고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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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기번(E. Gibbon)이 「로마제국쇠망사」(1776년에 시작하여 12년 만에 완간된 6권으로 됨)를 썼다. 그가 이 책을 기록한 때가 대영제국의 최전성기였다. 모든 것이 잘되고 있는 시기에 로마제국의 멸망에 대한 이야기를 쓴 것이다. 그가 이 책을 기록한 목적은 자기 조국의 미래를 고민하면서 로마의 흥망을 통해 역사의 교훈과 경고의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서였다. 즉 전성기와 쇠퇴기가 항상 겹친다는 사실이다. 하루 중 가장 더운 시간이 정오(12시)가 아닌 오후 2시인 것처럼 역사의 가장 뜨거운 시간인 최전성기는 이미 절정을 지나 쇠망의 길목에 들어선 순간에 나타난다. 그래서 흥륭(興隆)은 언제나 쇠망(衰亡)의 그늘을 안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그의 경고가 약 1세기만에 그대로 적중한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대영제국은 20세기 초 양대(兩大)대전(大戰)을 겪으면서 해가지지 않는 나라에서 쓸쓸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서고 말았다. 하인리히 법칙이나 역사가 기번의 교훈은 같다. 그것은 ‘늘 깨어 있어라’는 것이다.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쇠망의 징후를 포착할 수 있도록 항상 눈을 크게 뜨고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신자의 ‘삶 시리즈’ 스물 세 번 째, ‘서로 깨어 있음’(Wake up)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복음의 자명종(Gospel Alarm).
전쟁에서 이긴 로마 장수들은 로마시내를 개선(凱旋)행진할 때 노예 한 사람을 눈에 띄지 않도록 마차 뒤에 숨겨두었다. 그래서 군중의 환호와 함성이 있을 때 마차 뒤에서 장군의 귀에 들리도록 노예로 하여금 소리를 치도록 했다. ‘그대여! 너는 네가 인간임을 잊지 말라. 장군이여, 당신은 인간임을 잊지 말라.’ 승리에 도취하여 마음이 교만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 노예는 영웅의 영혼을 깨우는 자명종이요, 삶의 안전장치였다. 하나님도 우리를 깨우기 위하여 이런 자명종을 우리 삶 가운데 군데군데 두셨다. 예를 들어 아내나 남편의 잔소리, 아이들 병치레, 진급누락, 사업실패, 사고, 경제적 어려움 등. 이 모두가 우리로 하여금 인생의 잠에서 깨어나고, 삶에 대한 긴장을 갖도록 하나님이 주신 자명종 소리들이다.
본문 11절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외치고 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복음의 자명종’ 소리를 들으라는 말씀이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보다 더 확실하고 분명한 자명종은 없다. 특히 본문은 어거스틴(St. Augustine)을 깨우는 자명종이 되었던 말씀으로 유명하다. 정신적 방황과 영적인 잠에 취해 있던 그에게 본문 말씀이 그의 영혼을 흔들어 깨웠다. 그는 방탕과 술 취함, 음란과 호색, 쟁투와 시기 같은 어두움의 일, 곧 육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었다. 그리하여 초대교회의 가장 위대한 교부가 되었고, 기독교 신학에 커다란 자취를 남겼다. 우리 역시 이 말씀을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며, 인생의 잠에서 깨어나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깨어 있음이란 무엇인가?
1. 영적으로 각성하는 것이다.
‘경영의 신’이라 불리는 파나소닉의 회장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의 일화다. 밤길을 걷다가 어느 집에서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 다림질을 하려는 아내와 라디오를 들으려는 남편이 서로 콘센트를 차지하려고 다투고 있었다. 이 때 그의 머리에 떠오른 것이 바로 ‘쌍가지 소켓’이었다. 이것이 파나소닉이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동력이 되었다. 흔히 볼 수 있는 단순한 사건에서 소중한 사업의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깨어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현상을 보고 시인은 시를 쓰고, 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과학자는 법칙을 발견한다. 사업가는 사업의 중요한 아이디어를 발견한다. 이것이 깨어 있음의 차이다.
그래서 우리가 읽은 첫 말씀에,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신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신이 살고 있는 그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그 시대를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씀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결정적인 ‘하나님의 때’(종말)에 매우 근접해 있다. 이것은 이미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여러 징조로 알 수 있다(마24:3~14, 딤후3:1~5).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신자들이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영혼이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잠든 영혼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에게는 어떤 말씀도, 능력도, 사건도, 징조도 필요가 없다. 보아도 보는 것이 아니고, 들어도 듣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이 잠을 죽음에 비유한 것은 의미가 크다.
깨어 있는 사람에게 느낌이 있고, 감동이 있고, 기쁨이 있고, 배움이 있다. 시냇물 흐르는 소리는 크게 들리지만 바닷물 흐르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사각형의 각이 네 개인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둥근 원에 수 억 개의 각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렇게 들리지 않는 것을 들을 수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은 깨어 있음에서 온다. 영적 성숙함이란 아무도 보지 못한 것에서 하나님의 뜻을 보고, 듣지 못한 것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영적으로 깨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깨어 있음’이란 곧 영적인 예민함을 뜻한다. 영적인 민감함을 유지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이 시대를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때를 알 수 있는 비결이다.
2. 준비하는 것이다.
인생의 문제는 때의 문제다. 때를 아는 사람이 성공한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적합한 때, 알맞은 때를 만나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때는 준비된 사람의 몫이다. 성경은 때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고 있는 책이다. 주님의 비유 중에 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 여인(마24:40)과 맷돌질을 하는 여인(마24:41)의 이야기가 있다. 두 여인이 같은 시간, 같은 밭에서, 같은 일을 하다가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여 한 여인은 데려감을 당하고 다른 여인을 버림 받았다. 맷돌질을 한 여인들도 마찬가지다. 두 비유의 공통된 교훈은 ‘깨어 있음’이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42). 깨어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를 보여준 것이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일을 하고 있어도 깨어 있지 못한 사람은 그 때를 얻을 수 없다. 여기서 ‘깨어 있음’이란 곧 영적 ‘준비’를 의미한다.
마25장에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사는 신자의 삶을 보여주는 세 비유가 나온다. 첫 번째 ‘열 처녀’(:1~13) 비유가 영적 준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유대인의 결혼풍습을 보여주는 비유로 유대인들은 결혼식을 주로 저녁에 거행했다. 신부 친구 열 명의 처녀들이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신랑이 더디 오므로 모두가 졸며 잤다. 그 중 다섯은 다른 그릇에 기름을 준비했고, 다른 다섯은 준비를 못했다. 그런데 등불이 꺼져갈 즈음 신랑이 왔다고 맞으라고 했다. 다른 그릇에 기름을 준비한 처녀들은 꺼져가는 등불에 기름을 붓고 등을 밝혀 신랑을 맞았으나 준비하지 못한 처녀들은 그 때서야 기름을 사러갔다가 신랑을 맞을 수가 없었다. 똑 같이 혼인집에서 신랑을 기다렸고, 신랑이 더디 오므로 똑 같이 졸며 잤다. 그런데 다섯은 신랑을 맞이하여 혼인잔치에 참여했고, 다섯은 잔치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바로 준비의 차이다. 예수님께서 영광의 주님으로 다시 오실 때에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버림 받지 않으려면 깨어 있어야 한다. 즉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믿음을 잘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주님은 끝 날에 믿음을 보겠느냐(눅18:8)고 탄식하셨다. 끝 날이 가까울수록 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찾기가 힘들다는 뜻이다. 동시에 무엇보다 믿음을 보겠다는 역설의 말씀이다. 바울의 권면대로 우리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지 시험하고 확증해서(고후13:5) 믿음 준비를 잘 하자. 이것이 깨어 있는 생활이다.
보통 사람은 눈앞의 현실을 넘지 못한다. 하지만 깨어 있는 사람은 미래를 준비한다. 그에게 미래는 결코 먼 시간이 아니다. 머지않아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24:44).
3.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는 깨어 있음의 의미이면서 동시에 깨어 있음의 방법이다. 잠들지 않고 깨어 있는 것, 항상 깨어서 준비하는 생활의 비결은 기도생활로 가능하다. 즉 기도하는 것이 영적인 민감함을 유지하는 비결이고, 철저하게 영적으로 준비하는 것이다. 역사의 주인공들은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세계를 움직인 사람들도 기도하는 사람들이었다. 어느 민족이나 국가든지 그 땅의 진정한 주인은 정치가나 재벌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이다.
기도의 최고 모범은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기도의 삶을 몸으로 보여주셨다. 십자가라는 중대한 사건을 두고도 주님은 평상시처럼 기도하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으로 제자들과 함께 가셨다(마26:36~46). 나는 사람들의 가장 보편적인 거짓말 중에 하나가 ‘내일 역사의 종말이 온다 해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할 것이다.’는 말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희망사항이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사업에 실패했다고 강물로 뛰어들고, 시험점수가 좋지 않게 나왔다고 옥상에서 뛰어내리면서 내일 지구가 끝이 나는데 오늘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다! 어림없는 이야기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신자들도 이 질문을 받으면 이렇게 대답을 한다. 이럴 때보면 신자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 스피노자의 제자란 생각이 든다. 주님의 제자라면 주님처럼 ‘나는 기도하겠다.’고 대답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현실적인 정직한 대답이다. 아무튼 주님은 기도로 당신의 마지막 순간을 준비하셨다. 이는 기도가 모든 문제의 해법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기도할 것을 당부하셨다. 이 당부는 주님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제자들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41). 그런데 기도하지 못했던 제자들은 주님의 염려대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훗날 베드로는 이런 실패를 거울삼아 로마제국의 박해에 직면한 신자들과 교회들을 향하여,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바울은 우리의 시대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딤후3:12,13). 이 시대의 특징과 경건한 믿음을 지키려는 신자들의 삶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영적인 깨어 있음, 곧 깨어서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절실한가를 강조한 것이다. 기도는 신앙의 장식이 아니다. 생존의 문제이다. 기도에 성공하면 흥하고 기도에 실패하면 망한다.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고 있다. 깨어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그 대상이다. 우리의 지혜는 마귀의 지혜를 능가할 수 없고, 우리의 힘은 마귀의 힘을 능가할 수 없다. 어떤 무기도 마귀의 진지를 무너뜨릴 수 없다. 하지만 기도할 때 우리는 마귀의 지혜, 마귀의 힘을 능가하고, 마귀의 진지를 무너뜨릴 수가 있다.
워치 맨(Watchman), 워치 타워(Watchtower).
요나서에 나온 선장이 요나를 향하여,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 내 하나님께 구하라.”(욘1:6)는 말은 이 시대의 교회와 신자를 향한 세상의 외침이라 생각한다.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은 풍랑을 만나 아우성인데, 한가하게 배 밑에서 잠자고 있는 선지자 요나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 신자와 교회의 모습이 아닌지 모르겠다.
성경은 신자를 깨어서 성을 지키는 파수꾼(Watchman)이라, 교회를 망대(Watchtower)라 하였다. 깨어서 지키는 사람, 깨어서 지키는 곳, 그리고 잠든 사람들을 깨우는 사람이 신자이고 교회다. 오늘날 신자와 교회가 그 사명을 다하고 있는가? 이에 명쾌하게 답을 할 수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이것은 신자와 교회 역시 깊은 멸망의 잠, 죄악의 잠, 쾌락의 잠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의 첫 부분에 나온 “자다가 깰 때”라는 말씀을 우리 모두 가슴 깊이 새길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말씀으로 서로를 격려하여 깨울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복음이 희미해지고, 신앙의 열정과 순수성을 상실하고, 교회가 세속화되어 무기력해지고, 날로 신자와 교회의 위상이 떨어져 부흥이 정체가 되고 있는, 이 신앙적 위기와 교회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아울러 세상을 위한 파수꾼과 망대의 사명을 다하는 우리와 우리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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