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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양보하라(Yi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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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026회 작성일 10-06-13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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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양보하라(Yield).

창26:12~25

2010. 6/13 08:00, 11:00

가마고개 전설

주색(酒色)에 빠진 병은 고칠 수 있어도 자기 견해가 옳다고 주장하는 자존심은 고치기가 어렵다는 옛말이 있다. 우리 옛 선비들 중에는 지조와 절개로 세상을 살아간 사람들이 많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꿋꿋한 선비정신은 그야말로 자존심의 꽃이다. 하지만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패가망신(敗家亡身)하는 예도 종종 있다.

 

남명 조식의 학통을 이어받은 집안이 딸을 출가시키기 위하여 가마행차를 하는데, 마침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어받은 집안에서도 딸을 출가시키기 위한 가마행차를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 가마가 고갯마루에서 만나게 되었다. 두 가문은 학통이 다르다는 것 때문에 서로 오랫동안 불편한 관계였다. 마주친 길이 좁긴 해도 비켜가지 못 할 만큼 좁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은 비켜가지 않고 서로에게 물러서라며 대치를 했다. 가마를 비켜간다는 것은 어느 한쪽이 굽실거린다는 명분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며칠을 서로 버티고만 있지 해결이 나질 않았다. 그러자 결국은 시집가던 딸들에게 가문의 명예를 위해 자결을 요구하게 되었다. 양가 아버지는 가마 안으로 돌덩이를 넣어주었고, 그 딸들은 치마에 돌덩이를 끌어안고 강으로 뛰어내렸다. 이렇게 문제는 해결이 되었지만 가련한 두 여인은 집안의 명예라는 미명아래 시집가는 날이 죽음의 날이 되었다. 한국판 ‘명예살인’인 셈이다. 이는 조선 광해군 때 경남 하동군 가마고개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알량한 사대부의 자존심 때문에 죽음으로 끝이 난 안타까운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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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와 같은 일이 오늘날도 우리 주변에서 계속되고 있다. 어떤 분은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점을 사회적 갈등(지역, 계층, 세대, 빈부, 노사, 이념 등)으로 꼽고 있다. 사실 우리나라가 매년 지불하는 갈등비용이 300조원에 이른다고 한다(국민 총생산 27%, OECD국가들 중 4위).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사람은 각기 개성, 가치관, 목표가 다르기 때문에 갈등은 필연적이다. 피를 나눈 부모와 자식, 그리고 형제, 사랑으로 맺어진 부부, 또한 주님 안에서 한 몸을 이룬 교우들 간에도 갈등이 있다. 심지어는 같은 부모에게서 한 날 한 시에 태어난 쌍둥이에게도 갈등이 있다. 그러므로 건강함은 갈등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창조적으로 극복한 것이다. 그 비결이 ‘양보’에 있다. 양보는 나의 권리를 상대방에게 기꺼이 넘겨주는 것이다. 이런 아름다운 양보가 있는 곳에 갈등은 자취를 감추게 되고 세상은 살맛나는 곳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채근담은 양보를 ‘세상을 살아가는 최상의 방법이라’고 했다. 이 시간에는 신자의 ‘삶 시리즈’ 스물다섯 번째, 서로 양보함’(Yield)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복이 따라다니는 사람

복의 측면에서, 두 종류의 사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복을 쫓아다니는 사람과 복이 쫓아다니는 사람이 있다. 성경 인물 중에서 야곱이 전자에 속한다면 본문에 나온 이삭은 후자에 속한 사람이다. 야곱은 복을 얻기 위해서 형을 속이고, 아버지도 속이고, 외삼촌도 속였다. 그는 평생 복을 쫓아 분투했다. 물론 그의 소원대로 복은 얻었지만 그의 고백대로 그의 일생은 ‘험악한 세월’(창47:9)이었다. 반면에 이삭의 일생은 평탄했다. 하는 일마다 잘 되었다. 복이 늘 그를 따라다녔다. 본문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삭은 다른 사람들이 시기할 만큼 복을 받은 사람이다(14).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어 잠시 블레셋 땅에 살면서 그곳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다른 사람들의 백배 수확했다(12). 그래서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13,14). 뿐만 아니라 그가 땅을 파는 곳마다 물이 솟아 나왔다(15,18,20,22,25). 사막 지역에서 우물을 파는 일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쉽게 물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삭이 우물을 판 곳마다 물이 나왔다. 이는 실로 큰 복이었다. 이런 이삭의 번영은 그의 노력이나 수고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복 주심에 있었다(12).

 

복의 결정권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다. 하지만 추론해 보면 하나님의 복이 이삭의 삶에 늘 따라다닌 이유를 알 수가 있다. 첫째는 양보하는 생활(20,22,25), 둘째는 긍정적인 삶의 태도(21,22), 그리고 셋째는 하나님 중심, 예배 중심의 생활이다(25). 반면에 블레셋 사람들처럼 복받은 사람을 시기하여(14) 멀리하고(15), 시비를 걸어 다투고(20,21), 파괴하는(15,18) 사람들에겐 하나님의 복이 임하지 않는다. 그러면 여기서 이삭의 삶에 복을 불러온 양보의 특징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양보는 갈등과 대립을 멈추는 비결이다.

하루는 마틴 루터(M. Luther)가 외나무다리 위에서 만난 두 마리의 산양을 보았다. 다리는 서로 비켜갈 수도 돌아설 수도 없을 만큼 좁았다. 멀리서 양들이 그 위기를 어떻게 해결하나 지켜보고 있던 루터는 아주 감동적인 광경을 보게 되었다. 둘 중에 큰 양이 다리 위에 엎드리자 작은 양이 큰 양을 밟고 건너는 것이었다. 그래서 두 마리가 무사히 강을 건너는 모습을 보았다. 비켜갈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심각한 갈등과 대립의 상황이 큰 양의 양보로 멋지게 극복이 되었다.

 

이삭이 바로 이 큰 양과 같은 사람이다. 그래서 이삭을 일명 평화의 사람(peace-maker)이라고 부른다. 이는 그의 양보하는 생활과 깊은 관련이 있다. 본문에서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의 번영을 시기하여 그를 자기들의 지역에서 쫓아냈다. 그리고 이삭이 장막을 치고 우물을 파서 생활하는 곳마다 쫓아와서 시비를 걸었다. 어렵게 파놓은 우물들을 메우기까지 했다. 유목민에게 물은 생명과 같고, 우물은 삶의 터전과 같다. 우물을 메웠다는 것은 생명을 위협하고 삶의 터전을 짓밟는 것인데, 이렇게 생명이 위협당하고 삶의 터전이 짓밟혀도 이삭은 저들과 맞서지 않고, 그저 양보하고 다른 장소로 옮겨갔다. 문제를 대립과 갈등으로 끌어가지 않고 양보를 통해 화해와 평화로 풀어갔다. 그래서 결국 블레셋과 이삭은 평화를 위한 언약을 맺고(28~31), 그들 사이에 평화가 정착되었다. 이는 이삭의 양보하는 생활이 가져온 아름다운 결과였다. 평화는 싸워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참된 평화는 끝없이 자기를 희생하며 양보하는 생활의 결과이다. 이것이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로 마감하셨던 우리 주님의 삶이다. 이삭을 예수님의 그림자라고 부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이와 같은 정신을 이어 받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모든 갈등과 대립이 평화롭게 해결될 것이다. 내가 손해를 보고, 불의와 속임을 당하고(고전6:7), 바보 취급을 당할지라도 양보의 미덕을 발휘하는 것이 신자의 삶이다.

 

양보는 형통의 비결이다.

사람들이 양보를 선뜻 실천하지 못한 이유가 경쟁문화의 영향으로 ‘양보하면 손해다’는 의식 때문이다. 운전자 52.4%가 양보하면 손해다고 응답했다. 사실 양보하면 당장은 손해처럼 보인다.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을 내가 누리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생 양보해도 백 걸음도 돌아가지 않는다.’(終身讓路 不枉百步)는 소학(小學)의 교훈처럼 그 손해는 작고, 그 기쁨과 유익은 크고 많다. 생각해 보라. 양보를 통해 갈등과 대립을 극복했다면 그 기쁨과 가치는 헤아릴 수가 없을 것이다. 양보는 다른 사람과 주변을 행복하고 아름답게 하기 위한 작은 ‘불편’이다. 아니 아름답고 행복한 세상을 위한 기회비용인 것이다.

 

일본의 크리스천 여류작가 미우라 아야코(三浦綾子)의 일화다. 작가가 되기 전 그녀는 남편의 수입만으로 생활이 어려웠다. 그래서 그녀는 작은 가게를 차렸다. 그저 생활에 도움을 얻고자 시작한 일인데 가게가 날로 번창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남편이 ‘우리 가게가 잘되는 것은 좋지만 주위 다른 가게들이 우리 때문에 피해를 보면 어떻게 하느냐’고 염려했다. 그녀는 남편의 이 말에 충격을 받아 그때부터 가게에 어떤 물건들은 들여놓지 않았다. 그래서 손님이 그 물건을 찾으면 다른 가게로 안내했다. 그렇게 되자 시간의 여유가 생겼고, 그래서 틈틈이 펜을 들어 글을 썼는데, 그것이 「빙점(氷點)」이라는 작품이다. 그리고 이 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돈뿐만 아니라 명예까지 얻었다. 하나님은 양보한 그녀에게 다른 방법으로 보상해주셨던 것이다.

 

바보처럼 당하기만 하고 양보하기만 했던 이삭에게 하나님은 다툴 필요가 없을 만큼 넓은 장소(르호봇)를 주셨다(22/ 물질적인 복). 그리고 하나님께서 직접 그에게 나타나셔서 항상 함께 하실 것과 자손의 번영을 약속하셨다(24/ 영적인 복). 나아가서 지금까지 그를 괴롭혔던 블레셋 왕이 찾아와서 화친을 구하였다(26~28/ 관계적인 복). 이삭은 양보하는 생활 때문에 물질적인 손해를 보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물질은 물론 영적이고 관계적인 복까지 허락하여 형통한 자가 되게 하셨다. 이것이 바로 양보의 유익이다. 양보는 손해가 아니라 형통의 비결이다(잠11:25).

 

바닷풀 이야기

바닷풀이 자라는 모습은 참으로 신기하다. 산야(山野)에서 자라는 풀들은 주로 봄과 여름에 자라지만 바닷풀은 그렇지 않다. 김과 미역은 겨울에 자라고, 파래는 봄과 가을에 주로 자라고, 모자반과 다시마는 봄부터 여름까지 자란다. 자라는 계절이 각기 다르다. 해양생물학자들에 따르면 바다에는 영양염류와 같은 자원이 부족해서 그 자원을 나누어 쓰기 위해 서로 다른 계절에 자란다고 한다. 하찮은 풀이지만 양보를 통해 부족한 자원을 나누어 사용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이 정말 감동적이다.

 

전9:11절에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능자라고 은총을 얻는 것이 아니니......”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빠름, 유력함, 지혜와 명철, 기능’은 소위 성공의 요소들이다. 그런데 인생의 성공은 이런 인간적인 재능이나 능력, 노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인생의 성공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그것은 부족한 것을 서로 가지려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지만 서로 나누어 더불어 잘 되고, 잘 사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양보하는 정신이고, 생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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