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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활력을 주라(Zip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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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6,658회 작성일 10-06-20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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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활력을 주라(Zip up).

요20:19~23

2010. 6/20 08:00, 11:00

나는 어떤 사람인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생수와 같이 주변을 시원하게 해주는 사람, 원기를 불어 넣어주는 사람, 삶에 대한 용기와 의욕을 일으켜 주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만나고 싶어 하고, 곁에 있고 싶어 하고, 그에게서 무언가를 배우고 싶어 한다. 함께 있으면 힘을 얻고, 용기를 얻고, 위로와 격려를 얻기 때문이다. 움츠렸던 어깨가 펴지고, 삶이 즐겁고, 삶에 대한 비전과 열정이 솟구치고, 긍정의 에너지가 넘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있으면 넘어졌으나 다시 일어설 수가 있고, 실패했으나 다시 도전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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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 반대도 있지만)사람에게 힘이 되는 것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내 주위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가? 나는 어떤 사람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버드대학 데이비드 맥클랜드(D. McClelland) 교수는 ‘당신의 준거집단(Reference Group)이 인생에서 성공과 실패의 95%를 결정한다.’고 했다. 준거집단이란 우리가 습관적으로 만나고 자신이 그들 중 한 사람이 되길 원하는 사람들이다. 즉 자신의 가족을 비롯하여 교회의 지체들, 직장동료와 같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구성원들이다. 그들에게 내 인생이 크게 의존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또한 영향을 주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이 시간에는 이 점을 중심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그렇다면 나를 만나는 사람에게, 그리고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나는 어떤 사람인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이에 대한 결론으로, 신자의 ‘삶 시리즈’ 스물여섯 번째, 서로 활력을 줌’(Zip up)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

인생이란 날씨처럼 항상 맑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흐림도 있고, 눈보라나 폭풍우도 있다. 그래서 때로 낙심과 좌절의 일들을 만나게 된다. 외로워서 낙심하고,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낙심하고, 괴로움 때문에 낙심한다. 혹은 두려움 때문에 낙심하고, 불안과 염려로 낙심한다. 그런데 이 낙심은 참으로 무서운 마음의 병이다. 히브리어로 낙심을 ‘마사스’(מסס)라고 한다. ‘용해시키다’, ‘황폐케 하다’란 뜻이다. 낙심은 우리의 모든 것을 황폐케 하고, 녹여버린다. 몸과 마음, 건강과 관계, 희망과 행복도 용해시켜 황폐화시키는 것이 낙심이다. 또 헬라어로는 ‘카코스’(κακός)라고 하는데, ‘무가치한’, ‘해로운’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낙심은 인생에 있어 무익하고 해롭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낙심이란 병에 걸리면 자기 통제력을 상실하여 극단적인 방법(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본문에도 낙심한 사람들이 나온다. 주님의 제자들이다. 자신들의 야망실현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3년 동안 열심히 따랐는데, 그 주님이 알 수 없는 말씀만 하시며 허망하게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셨다. 그 죄목도 반란죄였다. 생각해 보라, 제자들의 좌절과 절망, 낙심이 얼마나 컸을까? 자신들의 모든 것을 걸었던 주님의 죽음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게다가 주님과 함께 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 화가 자신들에게도 미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19). 그런데 그 절망과 낙심의 현장에 부활의 주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을 향하여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고 격려하셨다. 이어서 “성령을 받으라.”(22)고 하셨다. 주님의 나타나심과 그의 말씀은 제자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20).

 

신자의 삶에 활력을 주시는 분, 성령.

그리고 중요한 것이 ‘성령’이다. 우린 성령을 받은 후 변화된 제자들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들은 새 방언을 말하며(행2:5~13), 닫았던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가 목숨을 걸고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었다(행2:14~28:). 삶의 활력을 온전히 회복한 것이다. 성령은 생명의 영이시고, 새롭게 하시며 소생케 하시는 영이시다. 창세기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living person)이 되었다(2:7)고 했다. 인간의 처음 모습은 생명이 없는 단지 흙덩이에 불과했는데, 성령이 임하시자 ‘살아있는 존재’(living being)가 되었다는 뜻이다. 또한 예수님은 성령을 인간의 모든 목마름을 해결해 주는 ‘생수’라 하셨고(요7:38~39), 선지자 에스겔은 이 생수의 강물이 닿은 곳마다 살리는 역사, 치료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난 환상을 보았다(겔47:). 그리하여 버려진 땅, 사람들이 살지 않는 황폐한 곳이 생명력이 가득한 활력이 넘치는 곳이 되었다. 성령은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소생시키시고, 회복시켜 활력이 넘치는 삶을 살게 하시는 분이시다.

 

요한은 성령을 ‘파라클레토스’(παρακλητος)라고 불렀다. ‘남을 돕기 위하여 부름 받은 이’란 뜻(παρα ‘~의 곁에’ +καλεω ‘초청하다’, ‘부르다’)으로, 어머니가 아기 곁에서 아기를 안아주고, 돌봐주고, 보호하고, 조목조목 가르쳐 주는 것, 외롭거나 시련을 당한 사람 곁에 있으면서 도와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 성경은 이를 ‘보혜사’(保惠師)라고 번역하였고, 영어성경은 ‘Helper’(헬퍼)로 번역하고 있다(요14:16). 그 외에도 격려자(Encourager), 위로자(Comforter)란 의미도 있다. 그러므로 성령은 우리의 삶에 활력을 주시기 위하여 곁에서 도우시고, 격려하시고, 위로하시는 분이시다. 이 세 가지가 곧 다른 사람에게 활력을 주는 방법이기도 하다.

 

1. 도움

목마른 사람에게 한 그릇의 냉수는 생명과 같다. 힘든 세상을 살면서 누군가의 작은 도움이 큰 힘이 되고, 격려가 되고, 위로가 될 때가 있다. 삶의 활력이 될 때가 있다.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눅10:30~37)가 좋은 예다. 강도를 만나 거반 죽어가던 사람이 사마리아인의 도움으로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성경은 도움을 주님을 섬기는 아름다운 일이요, 꼭 실천해야 할 삶이라 강조하고 있다(마25:31~46, 히13:1,2). 그러므로 우리 곁에서 도우시는 성령처럼 작은 도움의 실천이 다른 사람의 삶에 활력을 주는 비결이다. 기회 있는 대로 누구에게나 도움을 주는 손길이 되자.

 

2. 격려

월드컵 두 번째 경기 아르헨티나 전에서 자책골로 눈물을 흐린 박주영 선수를 보며 마음에 짠한 생각이 들었다. 그 눈물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물론 (불가항력이었지만)어이없는 실수로 인한 아쉬움과 자책의 의미였겠지만 다른 한편으론 악풀러들의 비난에 대한 두려움(?)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많은 격려의 글들을 보며 큰 감동을 받았다.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이태리 전에서 페널티 킥을 실축한 안정환을 붙들고 히딩크 감독은 ‘다시 너를 믿을 거야. 너는 다시 골을 넣어서 모든 국민에게 희망을 줄 수 있어!’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결국 그는 해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 머리 위에 골을 얹어 놓는 것 같았다고 간증하였다. 격려가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다. 격려는 용기를 주어 일어서게 하는 것이다(en+courage). 가능성에 불을 붙이는 것이다. 사람을 세워주는 것이 격려다. 격려는 윤활유처럼 삶의 활력을 준다. 그래서 다시 일어나게 되고, 도전하게 되고, 어떤 장애도 극복하면서 역동적인 인생을 살게 한다. 그러므로 서로 격려하며 살자.

 

3. 위로

영어로 위로라는 단어가 ‘comfort’ 외에 ‘salve’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는 ①‘~에 약(연고)을 바르다.’ ②‘(마음의 괴로움)을 풀어 주다.’ ‘(괴로움)을 덜어주다’ ‘~달래다’라는 뜻이 있다. 이 단어만으로도 위로의 성격을 잘 알 수 있다(외적인 상처를 치료해 주고, 내적인 아픔이나 고통을 해결해 주는 것). 그래서 바울은 위로를 ‘진통제’란 뜻을 가진 단어로 사용하기도 했다(골4:8). 이렇듯 사람은 위로가 필요하고, 위로는 삶의 산소와 같은 역할을 하여 활력을 불어 넣어 준다. 그러므로 가족 간에도, 이웃 간에도, 교우들 간에도 위로를 많이 하며 살자. 특히 위로받기보다 위로하는 사람이 되자. 

 

인생을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것 중에 하나가 위로다. 사람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두려움과 고통과 시련과 슬픔을 피할 수가 없다. 신자일지라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이런 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데 위로를 통하여 두려움을 극복하고, 슬픔과 고통을 극복하여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 위로받을 때가 없고, 위로해 줄 사람이 없는 사람의 삶은 비참하고 황폐하다. 장영희 씨의 「문학의 숲을 거닐다」에서 ‘인간이 아름다운 이유는 슬퍼도 상처 받아도 서로를 위로하며,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가는가를 추구할 줄 알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물론 사람의 위로와 격려, 도움에는 한계가 있다.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고, 격려나 위로가 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실천할 때 성령의 도우심과 격려와 위로가 부어지게 된다. 그래서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심령이 활활 타오르게 된다.

 

재수있는 새(吉鳥)가 되려면

어느 참새학교가 있었다. 그 참새학교의 교과목은 ‘날기’, ‘훔쳐 먹고 도망가기’, ‘허수아비 알아보기’ 등 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특강이 있다고 해서 참새들이 전선위에 줄을 지어 앉았다. 그날 특강 강사는 제비였고, 강의 제목은 ‘재수있는 새가 되려면’ 이었다. 제비는 차분하게 강의를 시작했다.

 

‘우리는 사람의 집에 살기 때문에 거기서 배우는 것이 많습니다. 전에 우리가 살던 집에는 딸이 둘 있었습니다. 두 딸은 인물도 머리도 몸매도 좋았는데, 태도가 너무 달랐습니다. 언니가 전화를 걸때 보면 기쁜 소식이 있을 때였습니다. 시험합격소식, 아파트당첨소식, 첫아이 낳은 소식 등. 그러나 동생은 정반대였습니다. 안 좋은 소식만 전하는 것입니다. 시험에 실패한 소식, 교통사고소식, 사업에 망한 소식 등. 그런데 나중에 보니 인생도 그렇게 갈렸습니다. 언니는 어디서나 반가이 맞아주는 생수와 같은 사람이 되고, 동생은 더러운 물처럼 사람들이 피해가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온갖 소식들이 널려있습니다. 그런데 길조란 이런 많은 소식 가운데에서 기쁜 소식들만 전하는 새입니다. 내가 길조가 되느냐, 흉조가 되느냐는 나에게 달렸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전하려고 하는 그 소식이 기쁜 소식인지 아니면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하는 나쁜 소식인지를 한번 확인해 보세요. 이런 작은 것 하나하나가 습관이 되고, 성격이 되고, 운명이 된답니다.’

 

신자는 길조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활력이 넘치게 해야 한다. 누구에게나 기쁜 소식 좋은 소식만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신자는 ‘복음’(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위해서는 내 자신이 먼저 기뻐야 한다. 활력이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에게 없는 것, 자신이 경험하지 못하고, 누리지 못한 것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비결은 성령 안에 있다. 성령의 도우심과 격려하심, 위로하심에 있다. 이를 경험하고, 또한 실천하는 삶을 통해 활력이 넘치는 삶, 활력을 주는 삶을 살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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