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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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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9,633회 작성일 10-06-27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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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

창6:5~12

2010. 6/27. 08:00, 11:00(박제인 파송예배)

어떤 농부

어진 왕이 있었다. 그는 백성들의 삶을 직접 살피기 위해 평복을 입고 자주 암행(暗行)을 했다. 암행 중에 배가 고픈 왕은 어느 농가를 찾아가 밥을 얻어먹게 되었는데, 주인 농부의 정성스러운 대접에 감동을 받았다. 나서는 길에 왕은 그 주인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보답하고 싶으니 소원을 말하라고 했다. 밥 한상 대접으로 인생이 바뀔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가 구한 것은 벼슬도 아니고, 재물도 아니었다. 단지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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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천한 제가 누추한 곳에서 폐하의 용안(龍顔)을 뵙고 섬길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꼭 제 소원을 들어주시고 싶으시다면 언제라도 다시 한 번 제 집을 찾아주십시오. 그래서 다시 한 번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단지 왕과 또 한 번의 만남을 소원했던 이 순수한 농부의 그 후 이야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은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다. 중요한 것은 신앙생활도 이와 같아야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을 구하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만남과 교제를 구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보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만남과 교제보다 자신의 필요에 더 관심이 많다. 물론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이고 교제다. 하나님 자신을 구하는 것이다. 이것에 성공하면 필요는 그냥 채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27:8).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이고, 이에 대하여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 것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다.

 

건강한 신앙은 본질에 집중한다.

얼굴은 사람에게 중요하다. 자기를 소개하는 곳에 꼭 얼굴 사진을 붙이도록 한다.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얼굴이란 단어의 어원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얼’+‘굴’이다. 여기서 ‘얼’은 넋, 마음, 정신을 뜻하고, ‘굴’은 장소를 뜻한다. 그래서 ‘얼굴’은 정신이 나타나는 장소란 뜻이다. 또한 ‘얼’+‘골’이다. 여기서 ‘골’은 꼴의 옛말로 형태나 모양새를 뜻한다. 얼굴은 정신(마음)의 형태를 뜻한다. 그렇다. 마음이 편치 못하거나 정신이 온전치 못하면 그것이 그대로 얼굴에 나타난다. 종합하면 사람의 얼굴은 그 사람의 정신, 인격과 성격이 나타나는 곳이다. 그러므로 얼굴은 그 사람의 실체를 반영하는 것이다. 링컨(A. Lincoln)은 ‘사람 나이 40이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고 했다. 대통령이 된 링컨에게 한 친구가 어떤 사람을 추천했다. 링컨은 그 사람의 얼굴을 보고는 거절했다. 그 사람의 얼굴에 진실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자 친구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이냐. 얼굴은 자기 책임이 아니지 않느냐’고 따졌다. 그 때 링컨이 대답하기를, ‘사람은 부모가 준 얼굴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그 후 40년 동안 자신이 살아온 삶에 따라 얼굴이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얼굴은 단순히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자신의 내면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다는 것, 혹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찾는 것이고, 또한 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구하고 찾는 것이 곧 신앙의 본질이다. 영적 건강함이란 바로 이 본질에 집중하고 본질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도, 찬양도, 기도도, 프로그램도, 신자의 교제나 섬김도, 일반생활까지도 여기에 집중되어야 한다. 앞에서 소개한 말씀(시27:8)처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은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찾고 구하는 것에 있다. 그리고 신앙생활이란 이런 하나님의 소원에 올바르게 응답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파송예배 설교를 소극적인 격려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앞으로는 적극적인 권면에 초점을 맞춰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오늘 파송예배(박제인) 말씀제목도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고 정했다. 이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넘어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군 생활, 그래서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는 군 생활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노아(Noah)의 생활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사람들의 공통점이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찾고 구한 사람들이다. 본문의 ‘노아’ 역시 그 대표적인 사람이다. 노아는 극도로 타락한 시대의 마지막을 살았지만 그 시대와 함께 망하지 않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주역이 되었던 인물이다. 노아가 살았던 시대는 하나님께서 인간창조를 탄식하시며 후회하실 만큼(6/여기서 하나님이 후회하셨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의 타락이 심각했음을 강조하는 표현임), 그래서 심판을 결행할 만큼(7) 타락한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노아는 어두운 밤하늘을 밝히는 북극성 같은,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더러운 시궁창 물에서 예쁜 꽃망울을 터뜨린 연꽃과 같은 존재였다. 본문을 통해 당시 노아의 삶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님과 동행한 노아

하나는 구별된 생활이다. 노아는 당시 사람들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5절은 당시 사람들의 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죄악의 강도와 범위’)과 그 마음의 모든 생각(‘죄악의 내향성’)이 항상(‘죄악의 습관성과 계속성’) 악할 뿐(‘선한 모든 것을 배제시킨 죄악의 지배력’)임을 보시고” 저들이 이렇게 죄악에 깊이 빠진 이유를 “그들이 육체가 되었기”(3) 때문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그러니 하나님의 신이 저들과 함께 할 수가 없었다(3). 여기서 ‘육체’를 히브리어로 ‘바살’(רשׂב)이라 하는데, 기본적으로는 사람의 몸을 뜻하지만 때로는 동물들을 바살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육체가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하나님의 지상 대리인으로 살아야 할 인간이 본능에 따라 사는 동물로 전락했다는 뜻이다(2/“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예수님은 노아시대 사람들의 모습을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마2438)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심판을 깨달지 못하고 동물적 본능에만 탐닉하고 있는 모습을 강조하신 것이다. 반면에 노아의 삶은 저들과 전적으로 달랐다. 8절의 접속사 ‘그러나’가 이를 잘 보여준다. ①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고(8), ②그러나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였고(9), ③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였다(22). ④또한 하나님의 신이 노아와 함께 하셨다(3). 이렇게 노아는 당시 사람들처럼 본능에 따라 살지 않고 성령에 따라 살았고, 눈에 보이는 세상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22)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그래서 그는 당세에 의인이요, 완전한 자라 칭함을 받았다(9). 경건한 신자의 삶은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약1:27)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이다(롬12:2).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노아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생활이다. 8절에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노아가 악한 세상과 문화와 사람들속에 살면서도 거기에 동화되지 않고 구별된 삶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함께 하시면 어떤 폭풍우도 우리를 무너뜨릴 수가 없다. 거센 풍랑도 헤쳐 나갈 수가 있다. 은혜는 우리의 생명, 우리의 강함, 그리고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기 위해 오신 하나님이시다. 이 은혜가 노아로 하여금 자기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의로운 삶을 살게 했다. 그런데 이 8절이 어떤 영어 번역 성경에는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의 눈에서 은혜를 찾았다”(Noah found grace in the eyes of the Lord)로 되어 있다. 이는 노아 당시 사람들과 노아의 삶의 차이, 관점의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당시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육체적이고 본능적인 일에만 집중하였으나, 노아의 시선은 하나님께 있었고, 그의 관심은 하나님의 은혜에 집중되어 있었다. 또한 이는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이유의 말씀이기도 하다. 여기서 하나님의 눈에서 은혜를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집중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다는 뜻이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되고, 그 은혜에 힘입어 하나님과 동행하는 구별된 삶, 의로운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인생의 마스터키(master-key)는 하나님의 은혜다. 이 은혜를 내게 머물게 하는 비결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이상한 나라에서 빠져나가는 길을 찾던 앨리스가 갈림길에서 고양이 체셔를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앨리스는 고양이에게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 묻자, 고양이가 앨리스에게 되묻는다.

 

‘어디에 가는데?’

 

앨리스가 모른다고 하자 고양이가 웃으면서 대답한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 아무 데도 갈수 없어.’

 

인생길에서 목적과 목표가 없으면 방황하게 되고, 잘못된 목적과 목표는 인생을 망친다. 많은 사람들이 앨리스처럼 인생의 갈림길에서 방황을 하고, 정신적인 혼란과 삶의 무의미를 호소하고 있다. 그것은 참된 길, 진리, 생명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 구주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14:6)고 말씀한다. 그래서 누구든지 길이신 주님을 만나면 인생의 방황이 그치고, 진리이신 주님을 만나면 정신적인 혼란을 벗어나고, 생명이신 주님을 만나면 생명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된다. 흔히 승리를 표현할 때 영어로 승리(victory)를 뜻하는 글자의 첫 문자 ‘V’를 두 손가락으로 만들어 보인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삶에 진정한 승리를 주신 분이다. 예수님은 ‘3V’이시기 때문이다. 라틴어로 길을 ‘비아’(Via), 진리를 ‘베리타스’(Veritas), 생명을 ‘비타’(Vita)라고 하는데, 첫 문자가 모두 ‘V’자다. 예수님은 Via(길)이시다. Veritas(진리)이시다. Vita(생명)이시다. 그렇다. 우리 인생의 진정한 승리는 하나님이신 우리 예수님께 온전히 집중하는 삶,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에 있다. 우리 모두 주님 안에서 참된 승리자가 되자. 특히 우리 제인이 형제에게 군 생활이 주님께 더욱 집중하는 기회, 주님의 얼굴을 간절히 구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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